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169화 (169/621)
  • 169화. 와불 (2)

    잠시 후.

    설화는 철전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일단 화(花)를 쓴 설화는 잠시 망설였다.

    한빈은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혈을 써야 하나 설을 써야 하나를 고민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설화야.”

    “네, 공자님.”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한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 정할 필요는 없어. 네 마음 가는 대로 쓰면 돼. 글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글자가 나타내는 향이 중요한 거다, 설화야.”

    “아, 글자의 향기라고요?”

    설화는 마치 한빈의 말을 되새김질하듯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에 한빈은 어색하게 웃었다.

    한빈이 말한 글자의 향기란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 향기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빈 자신만이 맡을 수 있는 향기가 먹물에 섞여 있었다.

    “뭐, 그렇지.”

    “알겠어요. 공자님.”

    설화는 희미하게 웃으며 붓을 내려놨다.

    툭.

    동전에는 한 글자만 적혀 있었다.

    한빈이 철전을 잡았다.

    “이건 내가 올려 줄 테니, 밖에서 소원을 빌고 와. 그리고…….”

    한빈은 마지막 말은 설화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그러고는 밖의 와불을 바라보며 초식을 떠올렸다.

    ‘백발백중.’

    * * *

    설화는 조용히 나가서 와불에 소원을 빌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설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와불에 거의 다가섰을 때였다.

    앞자리에서부터 군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와불에 공양을 드리기 위해 맨 앞에 선 사람 중 하나가 외친 것이 소란의 시작이었다.

    “기적이다!”

    “무슨 일인데 기적이라고 하시나요?”

    뒤쪽에 중년 여인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묻자 기적이라고 외친 사내가 손을 들어 와불의 손바닥을 가리켰다.

    “저기 보세요, 철전이…….”

    사내는 와불의 손바닥 위에 있는 철전을 가리키며 살짝 떨었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그 철전으로 모였다.

    철전을 확인한 중년 여인이 손뼉을 쳤다.

    “어머나, 세상에!”

    그 뒤를 이어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어떻게 와불의 손바닥 위에 철전이 서 있지?”

    “그러게 말이에요? 기적이네. 기적.”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뚫고 설화가 철전을 확인했다.

    “앗.”

    설화마저도 낮게 탄성을 질렀다.

    수많은 철전 중에 딱 하나가 다리라도 달린 것처럼 딱 서 있는 것이었다.

    설화는 눈을 가늘게 뜨고 철전에 집중했다.

    순간 설화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철전에는 다름 아닌 화(花) 자가 적혀 있던 것이다.

    한빈이 다루의 이 층에서 던져 놓은 철전이 분명했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저 철전 주인의 소원은 확실히 이루어지겠네요.”

    “그러게 말이야. 철전 주인은 좋겠어.”

    “부처님이 철전을 세워 주신 게 분명해.”

    그들의 웅성거림에 설화는 고개를 돌려 다루의 이 층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활짝 웃으며 손짓하고 있었다.

    손짓으로 봐서는 소원을 빌라는 뜻 같았다.

    설화는 조용히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설화가 고개를 들었다.

    와불 앞에서 일어난 소란은 꺼질 기미가 안 보였다.

    이젠 구경꾼들까지 모여 와불에 올려진 철전을 구경하고 있었다.

    설화는 그 소란을 뒤로한 채 한빈이 있는 다루로 올라왔다.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왼손만은 박자에 맞춰 탁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톡톡.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한 설화는 돌아와 앉자마자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공자님, 어떻게 된 거예요?”

    “아무래도 우연인 것 같네.”

    “저렇게 동전이 서 있는 게 우연이라고요?”

    “손바닥 위에 동전을 올려놓은 것은 내 실력인데, 철전이 저렇게 설 줄은 나도 몰랐어.”

    “아.”

    설화가 입을 벌렸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한빈이 말했다.

    “그러니까 네 소원은 이루어질 거야. 소원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다행이고요. 헤헤.”

    설화가 실없이 웃었다.

    그 모습에 한빈은 턱을 괴며 와불의 주변을 바라봤다.

    물론 왼손으로 탁자를 치는 것은 그대로였다.

    한빈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한빈은 지금 누군가가 불상에 다가오기까지의 시간을 재고 있었다.

    톡톡 치던 한빈의 손이 멈춘 것은 점소이가 차를 한 잔 더 내오고 나서였다.

    “주문하신 차 내왔습니다, 손님.”

    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춰 치던 것을 멈춘 한빈이 점소이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점소이는 최대한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이 사그라들기 전에 한빈이 품속에서 철전을 꺼내 다시 점소이에게 쓱 건넸다.

    눈이 커진 점소이가 말했다.

    “계속 안 주셔도 되는데…….”

    말과는 달리 철전은 점소이의 품속으로 사라졌고 한빈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내가 초행길이라 궁금해서 그러는데, 이 근처에 구경할 만한 곳이 있나요?”

    “구경할 만한 곳이라고요?”

    점소이가 놀란 듯 되묻자 한빈이 말했다.

    “뭐, 별건 아니고, 저렇게 사람이 몰려 있는 곳도 좋지만 좀 한적한 곳을 구경하고 싶어서요.”

    한빈이 철전 하나를 다시 탁자 위에 올려놨다.

    점소이는 철전을 번개처럼 집더니 입에 물레방아를 달아 놓은 듯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까…….”

    점소이의 설명은 한동안 이어졌고 한빈은 그가 말하는 장소를 머릿속에 담았다.

    한참 동안 설명하던 점소이가 숨을 고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후……. 여기까지가 장운현의 명물들입니다, 손님. 그런데 제가 말씀드린 폐가나 귀신 들린 우물 같은 데는 괜히 담력을 시험한다고 일부러 가지는 마십쇼.”

    점소이는 명승지뿐 아니라 신기한 곳도 술술 읊었다.

    “하하, 알겠습니다.”

    한빈이 기분 좋게 웃자 점소이는 고개를 숙이며 자리로 돌아갔다.

    점소이가 사라지자 설화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봐도 수상한 사람은 없었어요.”

    이것은 한빈이 설화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고맙다, 설화야”

    한빈이 설화를 보며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점소이가 다과가 든 접시를 들고 왔다.

    “손님, 이건 제 성의입니다.”

    “곧 일어날 건데…….”

    “그래도 성의니 맛이라도 보고 가시죠.”

    “네, 그러죠.”

    한빈이 씩 웃자 점소이는 허리를 숙이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접시에 담긴 과자와 새로 내온 차를 맛본 한빈이 말했다

    “설화야, 그럼 이만 나갈까?”

    말을 마친 한빈은 다루를 나와 관도를 걷기 시작했다.

    설화가 궁금증을 못 참고 물었다.

    “공자님, 대체 무슨 꿍꿍이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감을 못 잡겠어요.”

    “아, 별건 아니고 와불이 수상해서.”

    “와불이 수상하다니요?”

    “생각해 봐, 누워 있던 불상이 어느 날 갑자기 좌선을 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믿어?”

    “마을 사람들은 믿잖아요.”

    “그러니까 더 이상하지. 그건 누군가가 믿게 만들었다는 게 아닐까?”

    “사람들을 믿게 만들었다고요?”

    “아까 얼핏 보니 철전 중에 좀 독특한 놈들이 있더라고.”

    한빈이 다른 이야기를 꺼내자 설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독특하다니요?”

    “철전 중에 색이 다른 놈이 섞여 있었어.”

    “그게 이상한가요? 철전이야 사람 손을 타게 되면 색이 변하게 마련이잖아요.”

    “내가 본 건 찌그러진 철전이야.”

    “그게 이상한가요?”

    “돈을 그렇게 찌그러뜨리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지.”

    “찌그러진 철전으로 뭐 하게요?”

    “할 거야 많지. 전에 동냥 그릇에 담긴 철전으로 정보를 모았던 친구를 하나 아는데…….”

    “아, 그만요. 공자님.”

    설화가 손을 내저었다.

    한빈이 말한 것은 설화였다.

    거지 행색을 하고 동냥 그릇에 담긴 철전으로 정보를 교환하던 과거의 설화를 말하는 것이었다.

    설화의 표정을 본 한빈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내가 보기에는 와불도 그 방식과 똑같아. 조금 더 치밀하고 조금 더 판이 크다는 걸 제외하고는 말이지.”

    “판이 크다면 혹시…….”

    “그 혹시가 맞을 것 같다. 설화야.”

    “그럼 무림 단체의 정보 조직이라는 거죠? 대체 어느 단체일까요? 그럼 그 조직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었다는 거죠?”

    설화는 어느 때보다 눈을 빛냈다.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한빈은 부채를 펴고 앞서 나갔다.

    촤르륵.

    펼친 부채를 바라보는 한빈의 눈동자가 빨라졌다.

    사실 설화의 철전이 부처의 손바닥 위에서 꼿꼿이 선 건 우연이 아니었다.

    한빈은 부처의 손바닥 위에 손금을 겨냥했다.

    백발백중 덕분에 철전은 손금 중 가장 수상한 부분에 명중했다.

    그 손금 사이로 철전이 꽂히자 소란이 일어났다.

    소란은 당연히 의도된 것이며 누가 불상을 살피러 오나를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불상을 살펴보러 오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딱 하나였다.

    한빈이 찾는 누군가는 불상을 이미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때 한빈을 뒤따르던 설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공자님, 어디를 가시는 거예요?”

    설화는 큰 목소리에 이어, 한빈만 들을 수 있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누가 따라붙은 것 같아요. 공자님.”

    한빈은 설화만 볼 수 있게 손으로 신호를 보냈다.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한빈은 남들이 들을 수 있게 외쳤다.

    “그럼 구경이나 가 볼까!”

    “그래요.”

    설화가 맞장구쳤다.

    얼마나 갔을까?

    한빈이 설화에게 말했다.

    “여기가 아닌가 보다. 이제 돌아가자.”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설화는 말과는 다르게 눈짓으로 알았다는 표시를 보냈다.

    한빈이 작게 말했다.

    “참, 끈덕지네.”

    “따돌린 거 아닌가요?”

    “처음 놈은 따돌렸는데, 중간에 붙은 놈들이 말썽이네.”

    “끊고 가시는 게 어때요? 공자님.”

    “괜히 끊으려다가 칼날만 상하는 수도 있어.”

    “그 정도예요? 공자님?”

    “지난번에 봤던 잔혈마도보다 한 수 위야.”

    말을 마친 한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

    설화는 아무 말 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잔혈마도와 붙었던 이야기는 설화도 아는 사실.

    잔혈마도는 흔히 말하는 화경의 고수였다.

    그런데 잔혈마도보다 위라니?

    설화가 눈을 크게 뜨고 있자 한빈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마.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니까.”

    “그런데 왜 걱정을 안 해요?”

    “한 명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되는데, 둘이면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선택의 여지가 없다니요?”

    “그런 고수가 툭 치면 그냥 누워야지 어떻게 해?”

    뭐, 반은 농담이었다.

    구걸십팔보와 용린검법 중 속(速)의 속성이 있는 한 최소한 도망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더해 뒤를 따르는 둘의 행태로 보면 한빈과 설화를 공격해 올 리가 없었다.

    설화의 마음과는 다르게 한빈은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먼 산을 바라봤다.

    한빈이 다루를 나와 이렇게 돌아다니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지도에 표시해 둔 장소를 찾아보며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한빈이 찾아야 할 사람은 두 종류였다.

    첫 번째는 보물을 지키려는 자.

    두 번째는 보물을 빼앗으려는 자였다.

    첫 번째 무리인 와불과 관련된 자들은 다루를 나오면서 한빈을 따라붙었다.

    하지만, 천리추종향이 있으니 언젠가는 찾을 수 있기에 바로 따돌리고 말았다.

    한빈이 느낀 그들의 경지는 일류였다.

    그렇게 설화와 장운현을 둘러보던 중 운이 좋은 건지는 몰라도 두 번째 무리인 보물을 빼앗으려는 무리도 발견했다.

    황보세가에서 봤던 정체불명의 괴인과 흡사한 기척.

    화경으로 추정되는 경지.

    분명히 보물을 빼앗으려는 무리가 분명했다.

    설화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한빈은 분명 기뻐하고 있었다.

    병법에서 말하길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싸움에서 위태로움이 없다고 했다.

    이제 적을 발견했으니 사냥을 준비해야 했다.

    한빈은 보이지 않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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