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와불 (1)
부채 위 지도에는 몇 개의 점이 있었다.
그 점은 한빈이 장운현에서 반드시 확인해야 할 곳을 표시한 것이었다.
지도를 들고 다닌다면?
그것은 한빈의 존재를 알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빈은 그런 이유로 붉은 무복을 벗어 던지고 하얀 옷으로 말끔히 차려입었다.
설화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두면 눈에 띄는 외모이기에 적당히 남장을 시켜서 데리고 다니는 중이었다.
한빈은 지금 무엇을 계획하고 있을까?
한빈은 이곳에서 일어날 피해를 막는 것은 하책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이곳에 일어날 피해만 막는다면 하북팽가와 관련된 상인들만 뒤로 빼내면 충분했다.
그럼 한빈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적이 원하는 것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한빈은 적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적이 원하는 건 없애든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병법의 기본 원칙.
적이 원하는 것이 이곳에 있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전생의 기억에 의하면 앞으로 보름이 지난 후 역병이 돈다는 소문과 함께 환자들이 나타난다.
이후의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국가에서는 역병에 한해서는 인정사정없이 철저한 봉쇄를 원칙으로 한다.
황실의 명을 받은 하북성 군대는 장운현을 포위한다.
물 샐 틈 없는 포위망은 무림인마저도 빠져나가기 어려웠다.
그 상황은 한동안 이어졌다.
육 개월 후 봉쇄를 풀고 장운현을 살폈을 때 하북성의 군사들은 다시 놀라게 된다.
전염병으로 죽었다고 생각되는 사람보다는 굶어 죽은 사람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배고픔에 서로 싸우다가 쓰러진 사람들도 꽤 되고 말이다.
그러던 중 마을의 곳곳에서 무엇인가를 파낸 흔적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시체를 묻으려고 파낸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해 봤지만, 구덩이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여기까지가 한빈이 아는 사건의 경위였다.
사건의 주범은 지금 이 마을을 지켜 보고 있을 것이었다.
* * *
같은 시각.
백사문의 진세미도 장운현의 입구 앞에 잠시 섰다.
천천히 입구에 들어서려던 진세미가 힐끔 뒤를 돌아봤다.
그 모습에 그녀의 호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무슨 일이라도……?”
“아니에요. 이상한 기척이 느껴져서요.”
“이상한 기척이라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세미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진세미는 마치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기감을 끌어올려 집중해 보면 미세하게 느껴지던 기척은 봄날 햇볕에 녹는 눈처럼 사라졌다.
그것은 자신의 기감에 따라 기척을 조절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런 능력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거기에 그런 능력을 갖춘 고수라면 숨어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되었다.
고개를 흔든 진세미는 호위를 바라봤다.
“마휘 군사님이 챙겨 준 건 잘 보관하고 있겠지?”
“그럼요, 아가씨. 이건 목숨을 걸고 지키겠습니다.”
호위는 자신의 등짐을 가리켰다.
진세미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호위 무사가 다급히 따라가고 그 뒤로 열 명 정도의 무사들이 사파 특유의 흉흉한 기세를 뿜어내며 따랐다.
그들의 행렬이 점점이 되어 마을 속으로 사라지자 장운현의 숲속에서 눈을 빛내는 이가 있었다.
“호호, 자꾸 먹잇감이 늘어나네.”
긴 머리를 늘어뜨린 하얀 무복 차림의 여인이 혼잣말을 뱉자 옆에서 검은 그림자가 스르륵 나타났다.
“누님, 입맛 다시지 마. 우리 목표는 사람이 아닌 걸 기억하라고.”
“조금 즐기자는데 왜 이리 정색을 하실까? 전쟁터에서도 낭만은 피어나기 마련이잖아. 요즘 애들은 낭만을 몰라, 낭만을.”
“그건 누님이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호호, 누님은 무슨 누님. 이렇게 젊은 누님 봤어?”
“화장만 하면 젊어지는 줄 알아?”
“그러니까. 생기가 필요한 거지.”
하얀 무복의 여인이 그림자 쪽으로 손을 내밀자 그림자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스사삭.
하얀 무복의 여인은 그림자 쪽을 보며 콧방귀를 꼈다.
“흥. 저런 매력 없는 놈하고 일하려니 짜증 나네.”
말을 마친 여인도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삭.
그들이 사라진 곳에는 나뭇잎만 흔들릴 뿐이었다.
* * *
한빈과 걷던 설화가 물었다.
“누구의 짓일까요? 혹시 사파?”
“사파는 아니야.”
한빈이 단칼에 자르자 설화가 눈매를 좁히며 다시 물었다.
“그럼 혹시 마교요?”
“잔혈마도 사건 이후에 대응을 안 하는 마교가 이런 일을 벌인다고? 그것도 아닌 것 같다.”
한빈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이것은 진심이었다.
그것은 마교답지 못한 일이었다.
마교 놈들은 적어도 뒷문을 따고 들어온 적은 없었으니까.
힘을 중시하는 마교의 특성상.
중원을 침공하려고 하면 근처에 있는 곤륜파부터 치고 왔을 것이었다.
독을 풀어서 마을 하나를 전멸시키는 것은 그들의 방식이 아니었다.
적어도 마교와 지긋지긋한 싸움을 벌였던 한빈의 경험으로는 그랬다.
그렇다면 이 일의 주범은 누구일까?
이것은 한빈도 궁금한 점이었다.
그런 한빈의 눈빛을 알아챘는지 설화가 질문을 이어 나갔다.
“설마 정파는 아니겠죠?”
“그럼, 당연히 정파는 아니지.”
한빈은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반쯤은 거짓이었다.
한빈은 황보세가에서 마주쳤던 괴인의 집단이 벌인 일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괴인은 아마도 정파의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가장 의심이 가는 곳은 전생에 악연으로 이어진 위씨세가였다.
한빈의 촉은 위씨세가와 의문의 집단 사이에 반드시 접점이 있을 거라는 데에 쏠리고 있었다.
한빈과 남자아이로 변장한 설화는 남들이 보기에는 나이 차이 나는 형이 동생에게 장운현을 구경시켜 주는 것처럼 보였다.
한빈과 설화 사이에 오가는 대화에 정, 사, 마가 안줏거리가 되고 있을 거라는 것은 아무도 상상 못 했다.
그만큼 그들의 표정을 밝았다.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거리를 살피던 중 설화가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보세요.”
“어디?”
“저기요. 사람들이 벌 떼처럼 모여 있잖아요.”
시선을 돌리자 관도 위에 몰려 있는 사람들이 한빈의 눈에 들어왔다.
설화가 눈을 크게 뜨더니 다급하게 외쳤다.
“저기 맛있는 거 파는 거 같은데요!”
한빈도 고개를 끄덕였다.
삼 층 전각 높이만 한 불상이 보이고 그 아래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한빈이 생각하기에도 좌판을 깔기에 좋은 자리였다.
“거참, 자리 한번 잘 잡았네.”
한빈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설화는 인파 속을 헤치고 뛰어갔다.
한빈도 설화의 뒤를 따랐다.
겨우 앞자리에 도착한 한빈은 고개를 갸웃해야 했다.
한빈이 예상했던 음식 좌판은 어디에도 없었다.
설화도 실망했는지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다.
혹시나 하고 눈매를 좁히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누군가가 설화의 어깨를 톡톡 쳤다.
고개를 돌려 보니 지팡이를 든 노파가 멀뚱히 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할머니.”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자 할머니가 물었다.
“외지 사람이지?”
“네, 그런데요?”
“어휴,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
“줄을 서야지, 줄을.”
“줄이요?”
“뒤를 봐 봐.”
할머니가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흉흉한 눈빛을 한 마을 사람이 설화를 째려보고 있었다.
설화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할머니를 바라보자 한빈이 잽싸게 그녀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후다닥 인파에서 다시 나온 한빈은 주위를 돌아봤다.
한빈의 눈에 이 층 창가가 비어 있는 다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빈은 불상이 잘 보이는 다루의 이 층으로 설화를 이끌었다.
자리에 앉은 한빈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대체 무슨 일일까요, 공자님?”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그때 점소이가 주문을 받기 위해 다가왔다.
“뭘 드릴까요? ”
한빈은 차를 주문하며 잠시 숨을 돌렸다.
점소이가 떠나자 한빈이 밖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진짜 줄을 섰네.”
“그러게요, 공자님.”
설화도 밖의 광경이 신기한 듯 사람들과 불상을 번갈아 보고 있다.
황금빛이 도는 불상이라?
한빈은 조용히 눈매를 좁히며 불상을 바라봤다.
조금 자세히 보니 황금은 아니었고 나무로 만든 목조 불상에 황금색 도료를 입혀 놓은 것이었다.
그 불상의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한 줄로 서기에는 너무 인원이 많다 보니 갈지(之)자로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사이를 설화와 뚫고 갔으니 마을 사람들의 원성을 들을 만도 했다.
문제는 저곳에 왜 사람이 몰려 있느냐였다.
과연 저건 무슨 상황일까?
그 의문을 해결해 준 것은 차를 내온 점소이였다.
“손님, 차 나왔습니다. 와불(臥佛)을 저렇게 유심히 보시는 걸 보면 외지 사람이신가 보네요.”
점소이가 미소를 짓자 한빈은 품에서 철전 다섯 닢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일단 받으시고.”
“어이쿠, 감사합니다.”
“지금 와불이라고 그러셨죠?”
“네, 와불이 맞습니다.”
“멀쩡히 앉아 있는데 왜 와불이라고 한 거죠?”
한빈이 밖의 불상을 가리켰다.
밖에 있는 불상은 편안히 좌선을 하고 있었다.
점소이는 한빈이 준 철전 때문인지 방글방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 불상은 원래 누워 있던 겁니다요.”
“점소이 양반, 저 불상이 누워 있었다고요?”
“제가 여기서 일한 지 한 십 년은 넘었으니 저 불상에 대해서 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점소이는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랑스럽게 불상에 대한 일화를 털어놓았다.
원래는 누워 있는 와불이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불상이 좌선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때부터 저 불상을 와불 또는 생불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설명을 다 들은 한빈은 신기하다는 듯 불상과 줄을 선 이들을 바라봤다.
“그런데 저 불상 앞에서 공양을 드리면 될 것을 왜 저렇게 줄을 선답니까?”
“아, 그 설명도 드려야 하는데 깜빡했네요.”
“네, 말해 보세요.”
“저 불상에 소원을 빌고서 철전을 올리면 묘하게 철전이 사라진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철전에 자기 이름을 써서 저 불상의 손에 올려놓고 다음 날 확인합죠.”
“오, 그런 신기한 일이…….”
한빈은 말끝을 흐리며 안력을 돋워 사람들의 행동을 바라봤다.
점소이의 말대로였다.
사람들은 불상의 손바닥 위에 철전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공양을 드리고 있었다.
묘한 것은 철전을 겹쳐 놓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빈이 다시 질문을 이었다.
“그럼 다음 날 남은 철전은 어떻게 되죠?”
“이제까지 부처님이 철전을 안 가져간 날은 없습니다요.”
“허. 그럼 소원도 다 이루어졌겠네요?”
“이건 비밀인데요…….”
점소이는 말끝을 흐리며 한빈의 귀에 얼굴을 갖다 댔다.
“얘기하시죠.”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점소이가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소원이 이루어지는 건 솔직히 복불복 같습니다요. 요건 비밀입니다. 요거 외부 손님들이 알면 매출 떨어지거든요.”
“아, 그렇군요.”
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채를 폈다.
촤르륵.
부채를 펼치는 경쾌한 소리가 난 후 한빈은 불상과 지도 위의 점을 번갈아 바라봤다.
불상이 있는 위치는 지도에 표시된 점과 비슷했다.
일단 한 군데는 확인했으니 이제 다른 곳이 남았다.
그때 설화가 말했다.
“저희는 소원 안 비나요?”
“설화야, 너도 빌고 싶니?”
한빈이 팔짱을 끼며 묻자 설화가 두 손을 모았다.
“네, 저도 빌고 싶어요.”
“흠, 그럼 이렇게 하자.”
“공자님, 어떻게 하자고요?”
기대감 가득한 설화의 모습에 한빈이 품속의 철전을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