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난공불락 (4)
작은 움막의 옆에서는 거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그때였다.
움막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점심시간이다!”
그 목소리에 아이들이 우르르 움막으로 모여들었다.
아이들이 움막으로 들어가자 건장한 거지 하나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왔다.
그를 본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서 네가 왜 나와?”
“거지 집에서 거지가 나오는 게 이상하냐? 팽가야?”
사내는 지난번 여정에서 한빈과 의형제를 맺은 광개였다.
한빈이 물었다.
“네가 맡은 하남 분타는 어떻게 하고 여기에 있는 거지?”
“엥?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불러 놓고.”
“그게 무슨 말이냐? 광개.”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광개의 시선이 홍칠개에게 향했다.
한빈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광개는 홍칠개를 바라보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르신, 팽가가 불렀다면서요?”
“내가 언제 불렀다고 했냐? 네가 필요하다고 했지.”
“그게 그거 아닙니까?”
“광개 네가 돈이 되는 일이 있으면 불러 달라면서.”
“그거야 그렇죠.”
“내가 자세히 보니, 내 제자가 하는 일에 돈이 안 되는 게 없더구나. 그래서 부른 거지.”
“아, 분타 일도 쌔빠지게 바쁜데…….”
광개는 슬쩍 한빈의 눈치를 봤다.
그 눈빛을 본 한빈이 말했다.
“사부님 말씀이 맞아. 이번 일도 돈이 조금 되는 일이다.”
“오, 역시 내 의형제라니까.”
광개가 호탕하게 웃으며 한빈을 안으려 했다.
순간 한빈이 미꾸라지처럼 한 발 뒤로 빠져나가서 외쳤다.
“가까이 붙지 말고 거기에서 얘기하자고! 아니면 좀 씻든가?”
“홍칠개 어르신께는 아무 말도 못 하면서 왜 나만 가지고 달달 볶는 건가? 친구.”
“사부님도 나를 만날 때는 씻는다.”
“정말인가요? 어르신.”
광개는 홍칠개를 바라보며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홍칠개는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했다.
“험.”
그 모습에 광개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지가 거지답게! 그거 어르신이 하신 말씀이 아닙니까?”
“광개야!”
“네, 어르신.”
“내가 동냥 생활 육십 년에 느낀 것이 뭔지 아느냐?”
“뭡니까?”
“거지도 때때로 품위를 지켜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아.”
“헛소리 말고 밥이나 내와라. 점심 먹으면서 얘기하자.”
“대신 밥값은 주셔야 합니다.”
광개는 콧김을 뿜으며 움막 뒤로 갔다.
그 모습에 한빈이 외쳤다.
“밥값은 내가 줄 테니. 고기 좀 구워 봐!”
“오, 진짜 밥값을 준다는 거지? 그럼 내 진수성찬으로 차려 줄 테니 기대해, 친구.”
말을 마친 광개는 뒤쪽에서 투닥거리며 뭔가를 만들었다.
그 소리에 한빈이 입맛을 다셨다.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설화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
거지가 진수성찬을 차려 주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설화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짜 동냥해 온 밥을 빼앗아 드시게요?”
“설화 너도 저놈이 차려 주는 점심을 먹어 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야. 아마 거지가 된다고 집을 나갈 수도 있어.”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공자님.”
설화가 못 믿겠다는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시답지 않은 이야기가 지난 후 광개가 움막 뒤에서 나왔다.
“다들 이리 오시죠!”
광개의 외침에 한빈 일행은 움막 뒤로 갔다.
움막 뒤에는 모닥불이 피워져 있었고 그 위에는 손질된 토끼 고기가 올려져 있었다.
광개는 토끼구이를 하나 집어 한빈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든 한빈이 한 입 베어 물고는 엄지를 치켜들었다.
“역시, 최고라니까.”
한빈을 시작으로 홍칠개도 꼬치를 하나 들었다.
설화도 한 입 베어 물더니 눈을 크게 떴다.
“당과만큼 맛있어요.”
설화의 말에 놀란 것은 한빈과 홍칠개였다.
설화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기 때문이다.
광개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토끼구이가 거의 동날 무렵.
광개의 표정이 진지하게 바뀌었다.
“친구,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전염병에 준비해야 할 것 같다, 친구.”
“저, 전염병이라고…….”
광개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홍칠개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전염병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제자야.”
모두가 놀란 듯 한빈을 바라봤다.
광개와 홍칠개의 반응은 당연했다.
전염병에 가장 취약한 계층은 당연히 거지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같은 개방도가 아니더라도 거지 무리가 죽는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였다.
지금 움막에서 밥을 먹는 아이들도 개방도는 아니지만, 개방의 보호를 받는 거지들이었다.
전염병이 돌게 되면 민심이 사나워지게 마련.
거지들은 밥줄이 끊기게 된다.
거기에 더해 전염병의 원인으로 거지가 지목된다면 굶어 죽기 전에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한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말이지…….”
이어진 한빈의 이야기에 모두는 조금씩 입을 벌렸다.
한빈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장운현에 독이 퍼진다는 것이었다.
독이 퍼진다는 표현이 조금 이상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빈의 말대로라면 그 표현은 정확했다.
한빈은 음식 재료에 독이 섞여 유통될 것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그 독의 증세가 마치 역병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설명을 다 듣고 난 광개가 눈썹을 꿈틀대며 물었다.
“친구, 그러면 막으면 되지 않나?”
“어떻게 막을 건데?”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광개가 답답한 듯 가슴을 탁탁 치며 말을 이었다.
“재료에 섞어서 푼다면 당연히 유통을 막아야 하지 않겠나?”
“무슨 방법으로 막을까?”
“독이라면서? 왜 방법이 없어?”
광개는 답답한 듯 따지듯 물었다.
그 모습에 한빈은 차분한 표정으로 답했다.
“북쪽 지방에서 자라는 허혈초라고 들어봤나?”
“금시초문이군.”
광개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천의 사천당문이나 백독곡의 백독문도 모르는 독초였다. 정보력이 가장 뛰어나다는 개방이지만 어찌 보면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허혈초는 북쪽 지방에서는 잡초처럼 자라는 식물이지. 짐승이 먹어도 사람이 먹어도 추위에서는 힘을 못 펴. 하지만, 이곳에서라면 달라지지.”
“…….”
“허혈초에서 추출한 독은 보름은 복용해야 증상이 나타나는데, 그 증상이 아까 말한 대로 역병과 판박이지. 문제는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는 독의 성격상 무색무취라는 거야. 은침을 담가도 표시가 안 나는 독이지.”
“음.”
“아무리 미리 말해 줘도 찍어 먹어 봐야 똥인지 된장인지 안다는 거지.”
“그럼 자네는 어떻게 알았나?”
“…….”
그 물음에 한빈은 팔짱을 끼고 광개를 바라봤다.
한참을 보던 한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믿을 수 있을까?”
“당연하지, 나를 못 믿으면 누굴 믿어?”
“자네 말고 네 입을 말하는 거다.”
한빈의 말에 광개는 자신의 입을 가렸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한빈이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 믿을 수 있겠네.”
“그건 또 무슨 말인가?”
“뭐, 지난번에 쓴 비밀 유지 계약서 아직 유효한 거 알지?”
“흠.”
광개는 뭔가 생각난 듯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에 표정을 푼 한빈이 말을 이었다.
“이건 황보세가에 있었던 일이야…….”
한빈은 황보세가에서 괴인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아직까지는 황보세가의 가주만 아는 비밀.
물론 그곳에 흑철이 있다는 이야기나 괴인이 이 공자로 변장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살짝 뺐다.
황보만청과 죽을 뻔했다는 말까지 한 한빈은 슬쩍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모두 침을 삼키며 한빈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부터는 미리 만든 이야기를 전해야 할 때였다.
“그자가 우리가 죽을 줄 알고 말을 하더군.”
“무슨 말을 했는가?”
광개가 다급히 물으며 침을 삼키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장운현에서 일을 벌일 거라고 말일세. 목표가 분명히 개방도라고 했네.”
“이런 썩을!”
광개는 흥분한 듯 들고 있던 꼬치를 부러뜨렸다.
홍칠개도 흥분한 듯 볼살을 실룩이며 이를 갈았다.
“그런 천인공노할 놈들이 있나? 하필이면 가장 힘없는 개방을 목표로 한다는 말인가. 처죽일 놈들!”
광개와 홍칠개가 흥분하고 있을 때 한빈이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적이라도 그럴 겁니다.”
“그게 무슨 얘긴가? 친구.”
“잘 생각해 보라고. 병법에 적을 공격하기 전에 눈과 귀를 막으면 백전백승이라는 이야기가 있잖나?”
“그야 그렇지.”
“개방이 정파의 눈과 귀 아닌가?”
말을 마친 한빈은 조용히 홍칠개와 광개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의 눈빛에 서린 감정이 불타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 토끼 고기를 갖다 놓으면 노릇하게 익을 정도였다.
사실 한빈이 말한 것 중 반은 진심이었다.
자신이 적이라도 상대의 정보 조직부터 괴멸시킨 후 싸움을 시작할 것이었다.
“음.”
광개는 침음을 삼키며 한빈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창을 영입하는 데 반쯤 성공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번 작전에서 개방은 창.
흑사문은 한빈의 방패가 되어야 했다.
사실 한빈은 철노가 흑사문을 물어 온 날.
이것이 운명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한빈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광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대책은 있는 건가? 친구.”
“개방이 목표라면 이곳에서 개방이 사라지면 되는 거 아닌가?”
“우리가 사라진다고?”
“그래. 어린아이들은 다른 곳에 보내고 힘 좀 쓴다는 개방도는 남아서 놈들을 족칠 준비하는 거지.”
“오호.”
광개가 눈을 빛냈다. 그 옆에 있던 홍칠개도 손뼉을 치며 한빈의 의견에 동의했다.
한창 의견을 나누던 광개가 슬쩍 한빈의 눈치를 봤다.
“이런 얘기 하긴 뭐하지만, 혹시 보수가 있으면 좋긴 한데…….”
“하하. 물론 주지.”
활짝 웃은 한빈이 설화에게 턱짓했다.
신호를 받은 설화는 광개의 앞에 보따리를 갖다 놨다.
쓰윽.
보따리를 본 광개의 눈빛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친구, 왜 계약서를 내미나? 이 거지에게 뜯어먹을 게 어디 있다고!”
손사래 치는 광개를 본 한빈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휴, 자네는 이게 계약서로 보여?”
“보따리에 들어 있는 게 계약서 말고 뭐가 있다고?”
계속 손사래를 치는 광개의 모습에 한빈이 턱짓하자 설화가 보따리를 풀었다.
순간 광개가 눈을 감았다.
그것도 잠시 호기심 때문인지 슬쩍 눈을 떴다.
보따리에 담긴 것은 광개의 예상과는 달리 장신구였다.
“이게 대체 뭔가? 친구.”
“이게 보수야.”
“이게 보수라고?”
“이 장신구의 가치는 나중에 가르쳐 주지. 일단 이곳에 남을 개방의 고수들에게 나눠 주면 되네.”
한빈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을 털었다.
* * *
광개와 홍칠개에게 숙제를 남겨 준 한빈이 향한 곳은 장운현의 번화가였다.
번화가에 들어선 한빈은 설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설화는 기다렸다는 듯 한빈에게 부채를 건넸다.
한빈은 부채를 활짝 펼치며 번화가를 활보했다.
누가 보면 번화가에 놀러 온 부잣집 공자 같은 분위기.
걸음걸이마저 설렁설렁한 게 기루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몇몇 기루의 점소이는 한빈의 모습을 보고 소매를 잡아끌기까지 했다.
한빈은 지금의 반응에 만족하여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는 여전히 부채를 접었다 펼쳤다를 반복하며 거리를 활보했다.
하지만, 한빈의 눈동자만큼은 여유가 없었다.
쉬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사실 부채에 있는 산수화의 곳곳에는 장운현의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