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난공불락 (3)
서재오는 고개를 들어 설화를 바라봤다.
설화가 가리키는 곳은 다름 아닌 무명천 위에 놓인 자신의 물건이다.
서재오가 물었다.
“설화야. 이 검을 달라는 것이냐? 이건 내 애검인 매화삼경이다. 이 검이 가지고 싶다면 이것보다 좋은 검으로 만들어 주지. 더 가볍고 더 예리한 놈으로 말이다.”
“그게 아니에요, 아저씨.”
“그럼 설마 매화 패를 달라는 것이냐?”
“네, 맞아요. 제가 여기 있을 때까지만 제가 맡을게요.”
“헉!”
서재오는 비명을 질렀다.
그 말은 설화가 천수장에 있는 한 자신도 떠나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매화 패가 탐나서라기보다는 자신을 묶어 두려는 뜻임을 서재오도 알고 있었다.
왜일까?
그의 머릿속에 의문이 쌓여 갔다.
체면을 버리고 이제라도 튀어야 하나?
서재오가 망설이고 있을 때 홍칠개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자네 매화검수 맞지?”
“아, 어르신. 저 매화검수 맞죠.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매화검수가 설마 약속을 어기지는 않겠지.”
“그건 그렇지만 설화의 얘기는…….”
“아무래도 화산파 장문인에게 전서구 하나 날려야겠네?”
“전서구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안부라도 전할 겸 말이야. 그리고 매화검수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약속을 어겼다는 말도 덧붙여야겠지.”
“어, 어르신.”
서재오가 절망이 서린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지박령이라도 씐 걸까?”
그의 중얼거림 뒤에 설화가 나지막이 말했다.
“맞아요.”
“헐. 맞긴 뭐가 맞아?”
“그 지박령 말이에요. 저한테도 들러붙었거든요.”
설화는 해맑게 웃으며 눈짓으로 한빈을 가리켰다.
서재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뒤쪽에서 윤 표두가 한빈에게 다가왔다.
“사 공자, 잘 지냈는가?”
“아, 윤 표두님.”
“우리한테 맡겨 놓은 것은 찾아가야지.”
“제가 맡겨 놓은 게 있던가요? 그러지 않아도 부탁드릴 것이 있어서 찾아뵈려고는 했는데요.”
“흠, 나보다 이 친구가 더 섭섭하겠네.”
천리표국의 윤 표두는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을 바라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 있었다.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사내가 정중히 포권했다.
“공자님, 잘 지내셨습니까?”
목소리를 듣고 난 한빈은 그제야 무릎을 탁 쳤다.
사내는 다름 아닌 검오.
하남정가로의 여정 중 만났던 양악군의 오른팔이었다.
다른 이는 다 풀어주고 검오는 윤 표두에게 맡겼었다.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검오의 어깨를 감쌌다.
“검오라고 했지? 우리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그 모습에 모두는 검오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 * *
삼 일 후, 하북팽가의 정문.
한빈과 적혈맹호대 그리고 천리표국의 마차가 정렬해 있었다.
장운현으로 떠나는 한빈을 마중 나온 것은 대공자 팽혁빈.
그는 주변을 쓱 둘러보며 한빈에게 물었다.
“막내야, 대체 이건 다 무엇이냐? 혹시 장운현에서 전쟁이라도 치를 셈이냐?”
“전쟁이라뇨?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그럼 저건 다 무엇이냐?”
“저건 만일에 대비해서 준비한 식량과 생필품들입니다.”
한빈은 뒤쪽에 마차들을 엄지로 가리켰다.
팽혁빈은 더욱 호기심이 이는지 상체를 기울이며 은밀하게 다시 물었다.
“잠깐 둘러보러 간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저렇게 많이 준비했다고?”
“뭐든 확실하게 준비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한빈이 웃자 팽혁빈은 손을 저었다.
“그래, 네가 알아서 하겠지. 하지만 감당 못 할 일이 생기면 언제라도 손을 내밀거라.”
“네. 알겠습니다, 형님.”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언 하나 해도 될까?”
“말씀하시지요.”
“수하들 중 건강이 안 좋은 친구들이 보이는구나. 긴 여정에는 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건강이 안 좋다니요?”
“저 친구들 말이다.”
팽혁빈이 가리킨 곳에는 장자명과 검오가 있었다.
그들은 며칠 밤을 새운 것처럼 입술이 바싹 말라 있었으며 눈은 시뻘게져 있었다.
“원래 체력이 약한 친구들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다. 나는 이만 가 보겠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팽혁빈은 돌아섰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장자명과 검오는 서로를 바라봤다.
장자명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원래 건강이 안 좋았나?”
“장 의원님,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잠도 안 재우고 일을 시키다니 너무합니다.”
“그러게 말이다. 참, 자네는 기간이 어떻게 되지?”
“기간이라니요?”
“계약 기간 말이야.”
“아, 계약 기간이요? 저는 종신인데요.”
“아, 그렇구나.”
장자명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을 보니 괜스레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은 왜일까?
그것도 잠시 어깨를 살짝 떨었다.
요 며칠간의 작업량이라면 남은 기간을 버텨 내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
검오의 지원이 없었다면 쓰러져도 진작 쓰러졌을 것이었다.
그때 한빈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제 장운현으로 출발한다.”
손짓한 한빈은 조용히 마차에 올랐다.
창밖으로 장운현이 위치한 남쪽을 바라보던 한빈은 앞으로의 계획을 머릿속에 그렸다.
곧 하북을 넘어 북경까지 뒤집어 놓을 일이 장운현을 중심으로 벌어질 것이다.
“뭐, 계획대로라면 꿩 먹고 알 먹고지. 일단 방패는 구했으니 창도 구해 볼까?”
한빈의 혼잣말에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공자님, 우리가 언제 방패를 구했어요?”
“철노가 며칠 전에 구해 놨잖아.”
“혹시…….”
“그 혹시가 맞아. 흑사문은 훌륭한 방패가 되어 줄 거야.”
“흑사문을 치는 게 아니고 방패로 쓴다고요? 대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건 아직까지는 비밀이야.”
한빈이 씩 웃자 설화는 더는 묻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설화는 흑천에서 배우지 못한 강호라는 세상을 이곳에 와서 배운다 생각했다.
죽이거나 죽거나 하는 선택밖에 없는 살수의 세계와는 달리 강호라는 세상의 모습은 더욱 복잡했다.
설화는 보이지 않게 손을 꽉 쥐었다.
꽉 쥔 손에서 뭔가가 느껴진다.
그것은 바로 당과 꼬치였다.
설화는 고민을 뒤로하고 당과를 베어 물었다.
* * *
한 시진 후 흑사문.
설무익에게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전서구를 확인한 설무익은 급하게 아버지 설경추에게 달려갔다.
덜컹.
“아버지, 드디어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움직였습니다!”
큰 목소리로 외친 설무익은 묘한 분위기에 눈을 크게 떴다.
흑사문의 고수들과 백사문에서 나온 진세미가 설무익을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무익은 조용히 흑사문주 설경추의 앞으로 다가갔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버지.”
“휴우…….”
흑사문주 설경추는 한숨을 뱉어 냈다.
설무익은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주변을 둘러봤다.
그때 진세미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이 마주친 진세미는 한 걸음 설무익에게 다가왔다.
“소식이 너무 느리네요. 저희는 반 시진 전에 이미 정보를 입수했어요.”
“반 시진 전이라니요? 지금 막 떠났다는데…….”
설무익은 손에 쥔 전서를 보여 줬다.
그 모습에 진세미도 쪽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건 제가 반 시진 전에 받은 전서입니다. 설 공자가 맡긴 일을 집중 못 하신다는 얘기가 있기에 제 수하를 풀어놨습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진 소저.”
“말 그대로입니다. 제 수하의 전서구는 반 시진 전에 도착했는데, 설 공자의 수하가 보내온 전서는 지금 도착했지요. 반 시진이면 문파 하나의 현판을 내릴 수 있는 시간입니다, 설 공자.”
진세미는 할 말 없다는 듯 돌아섰다.
그러고는 수하들에게 외쳤다.
“다들 떠날 채비를 하여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실내에 있던 무사 반이 빠져나갔다.
씁쓸한 표정으로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본 설경추가 탁자를 내려쳤다.
쾅!
순간 탁자가 우지끈 소리를 내더니 반으로 갈라져 내려앉았다.
그 모습에 흑사문의 고수들이 뒤로 한 발 물러났다.
흑사문주의 심기가 뒤틀린 것을 알아챈 것이다.
흑사문주 설경추는 아들 설무익의 앞으로 다가갔다.
“무익아, 이번 일이 우리 흑사문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아느냐?”
“네,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 그랬다는…….”
흑사문주 설경추는 말끝을 흐리며 자신의 검집을 어루만졌다.
아들의 목이라도 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설무익은 검집을 쥔 설경추의 손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설경추의 화를 풀 때였다.
설무익은 조용히 품에서 자신의 전리품을 꺼냈다.
그 모습에 설경추가 물었다.
“그것은 무엇이냐?”
“이것은 그러니까…….”
설무익을 말을 잇지 못했다.
한 장의 쪽지라 생각한 문서의 틈이 살짝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순간 등골이 오싹함을 느낀 설무익은 재빨리 말을 바꿨다.
“아닙니다. 저는 물러나 반성하겠습니다.”
“다음에 실수한다면 내가 네 목을 베겠다.”
흑사문주 설경추는 안광을 번쩍이며 검집을 들어 설무익의 목에 겨눴다.
설무익은 포권한 뒤 재빨리 문주전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문서를 다시 살폈다.
천천히 걸어가며 문서를 살피던 설무익이 비명을 질렀다.
“악!”
* * *
이틀 뒤.
장운현에 도착한 한빈 일행은 하북팽가에서 경영하는 객잔에 짐을 풀었다.
미리 통보하는 바람에 객잔에 다른 손님은 없는 상태.
한빈은 적혈맹호대에게 묘한 지시를 내렸다.
그것은 객잔 주변에 울타리를 만드는 것이었다.
높이나 두께 모두 난공불락의 요새에 가까웠다.
하지만, 한빈이 이제까지 지시한 내용 중 필요 없는 것이 있던가?
한빈의 지시 하나하나가 모두 생명과 직결된 내용이었다.
소대섭은 깊이 포권했다.
“알겠습니다, 주군.”
“참, 이것도 대원들에게 나눠 줘.”
한빈이 건넨 것은 검오와 장자명이 만든 목걸이였다.
목걸이를 받은 소대섭은 조용히 대원들에게 그것을 나눠 줬다.
모두의 반응은 똑같았다.
“이게 뭐지?”
“무슨 목걸이지? 그렇게 값나가 보이지는 않는데.”
모두가 목걸이를 보며 웅성거리고 있을 때 조호는 호기심을 못 이기고 한빈에게 달려왔다.
“주군, 이게 뭡니까?”
“피독주.”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답하자 적혈맹호대 모두의 술렁임이 더 커졌다.
“피독주?”
“이게 피독주라고?”
피독주라 하면, 독을 막아 주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평범한 목걸이로만 보였다.
타원형으로 된 목걸이는 그저 장신구로만 보였던 것이다.
그 술렁임 속에 조호가 다시 물었다.
“주군, 피독주라니요? 혹시 사천당가라도 쳐들어오나요?”
“사천당가가 왜 여기에 오겠어? 자기네들 구역에서 독단하고 암기 찍어 내느라 얼마나 바쁜 애들인데.”
“그럼 피독주가 왜 필요하지요?”
“그건 잠시 어디 다녀와서 얘기해 줄 테니 울타리나 튼튼하게 쳐 놓고 있어.”
말을 마친 한빈은 홍칠개에게 걸어갔다.
“사부님, 제가 아까 말씀드렸던 거 부탁드립니다.”
“오호, 알았다. 같이 가 보자꾸나, 제자야.”
홍칠개가 활짝 웃으며 앞장서자 한빈과 설화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본 조호는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목걸이를 매만졌다.
그 모습에 새로 일행에 합류한 검오가 다가갔다.
“조호야.”
“아, 검오야? 왜 그래?”
검오는 조호와 동갑내기였다.
그 때문인지 오랜 친구처럼 편하게 대하는 중이었다.
“그 목걸이, 장 의원님과 내가 만들었어. 그러니 안심하고 쓰면 돼.”
“아, 장 의원님과 검오 네가 만들었다니 안심할게.”
조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걸이를 걸었다.
나머지 대원들도 장자명과 검오가 만들었다고 하니 의심 없이 목에 걸었다.
그만큼 적혈맹호대 대원 모두에게 장자명과 새로 합류한 검오의 신임은 두터웠다.
* * *
한빈이 도착한 곳은 다리 밑에 있는 작은 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