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난공불락 (1)
설무익의 수하는 자신도 모르게 여자 약초꾼을 보며 침을 삼켰다.
약초 꾸러미 하나에도 힘들어하는 연약함과 까무잡잡한 건강미가 묘하게 상반되는 매력으로 다가온 것이다.
설무익의 수하는 자신도 모르게 여자 약초꾼에게 말을 걸었다.
“저, 짐이라도 들어 드릴까요?”
“괜찮아요.”
여자 약초꾼은 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설무익의 수하는 여자 약초꾼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씩 웃으며 약초가 담겨 있을 거라 생각한 짐을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들려고 시도했다.
“끙.”
설무익의 수하는 자신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흘렸다.
아무리 들어 올리려 노력해도 여자 약초꾼이 내려놓은 짐이 요지부동이었던 것이다.
여자 약초꾼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요.”
“아니, 제가 할 수…….”
설무익의 수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그의 육체가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다.
뿌득.
그 비명이란 것은 추상적인 의미가 아닌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무리를 하는 바람에 탈골이 된 것이다.
앞서가던 설무익이 외쳤다.
“거기서 뭐 해? 빨리 오지 않고!”
“고, 공자님. 알겠습니다.”
수하는 탈골된 어깨를 움켜쥐고 뛰어갔다.
수하는 뒤를 돌아보며 약초꾼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어깨가 탈골될 정도의 짐을 짊어지는 약초꾼이라고?
수하는 설무익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려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이야기해 봤자 또 잔소리를 들을 것이 분명해서였다.
설무익 일행은 그렇게 천수장에서 멀어져 갔다.
설무익 일행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 소대섭이 심미호에게 물었다.
“쟤네들은 뭔가?”
“잘은 몰라도 착한 사람들인 것 같아요. 제 짐을 들어 주려고 하다가 어깨가 빠졌어요.”
“에이, 조심하지 않고. 흑철이 보통 무게던가?”
“그러게 말이에요.”
그때 심미호와 소대섭의 머리 위로 비둘기가 지나갔다.
그 모습에 심미호가 말했다.
“전서구인가 보네요?”
* * *
잠시 후.
전서구가 날아간 곳은 철노의 처소 앞이었다.
철노의 처소 앞에는 생각보다 많은 새장이 쌓여 있었다.
이건 업무의 효율을 위해 한빈이 전부터 설치해 놓은 것이었다.
철노의 처소 앞에 놓은 것은 천수장에 제일 많이 머무는 것이 그였기 때문이다.
정보는 가까이.
그것이 한빈의 신념이었다.
비둘기가 철노의 처소 앞으로 오자 설화는 재빨리 지붕으로 날아올랐다.
쉭!
지붕 위로 날아오른 설화는 비둘기 다리에 맨 쪽지를 꺼냈다.
비둘기를 새장 속에 넣은 설화는 모이 한 주먹을 밀어 넣고는 한빈에게 달려갔다.
“공자님, 전서 왔는데요.”
“설화야, 그냥 읽어.”
한빈이 귀찮다는 듯 손짓하자 설화가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제가 읽어도 돼요?”
“그냥 읽어도 돼. 잘 읽으면 당과 하나 예약이다.”
한빈은 손을 흔들며 설화를 재촉했다.
사실 이러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반박귀진을 계속 사용하다 보니 몸에 무리가 온 것이다.
산동 가람산에서부터 하북까지 한빈은 쉴 틈 없이 반박귀진을 사용했다.
반박귀진을 열두 시진 내내 사용하는 것이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가능했다.
아무리 력(力)의 속성을 쓴다고 해도 속성 자체가 열두 시진이 지나면 회복되는 성격이 있었다.
그러니 박박귀진은 깨어 있을 때도 잠잘 때도 사용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게 무한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반박귀진의 부작용이 바로 무기력이었다.
힘을 숨겨 두는 반박귀진을 오랫동안 사용하다 보니 묘하게 진짜 무기력감이 찾아왔다.
이것은 한빈이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
그때 설화의 목소리가 한빈의 상념을 깨웠다.
“대공자 귀환, 소가주 후보 한빈은 하북팽가로 올 것. 이거 딱 두 가지인데요.”
“아, 첫째 형님이 오셨군.”
“첫째 형님은 어떤 분이에요? 혹시…….”
설화가 눈매를 빛내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뭔데?”
“당과 잘 사 주는 분일까 해서요? 헤헤.”
설화가 실없이 웃자 한빈은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사실 한빈에게 첫째 형에 대한 기억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전생의 경우, 첫째 형이 하북팽가로 돌아왔을 때는 한빈이 가출하고 난 뒤였다.
잠시 과거를 떠올리던 한빈이 무심코 혼잣말을 뱉었다.
“아마 지금이…….”
한빈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져 설화마저도 들을 수 없었다.
* * *
다음 날 하북팽가의 가주전.
한빈이 가주전에 들어섰다.
한빈이 들어서자 원로와 각주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황보세가 쪽에서 일이 잘 안 풀렸다고 하던데…….”
“그야 당연하지, 그게 기한 안에 할 수 있는 일이던가? 더욱이 사 공자야, 사 공자.”
그들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한빈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한빈은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해 놨다.
정화 부인 측 인원이 빠졌는데도 이렇게 한빈에 대한 험담이 오간다는 것은?
한빈은 씩 웃었다.
아직도 가문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태사의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였다.
타다닥.
뒤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걸음 소리의 주인공은 한빈을 가로지르더니 뒤돌아섰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거대한 장한이 그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장한은 쌀쌀한 날씨에도 소매가 없는 상의를 걸치고 있었다.
구릿빛 피부에 드러난 근육은 마치 붓으로 획을 그어 놓은 것만 같았다.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사내가 말했다.
“막내야, 잘 지냈느냐?”
“…….”
한빈은 말없이 그가 등 뒤에 메고 있는 거도를 바라봤다.
창만큼 긴 거도의 검신.
한빈은 그가 첫째 형임을 알 수 있었다.
‘안 본 사이에 저렇게 컸다니!’
한빈의 표정을 본 첫째 팽혁빈이 한빈의 양어깨를 힘차게 잡았다.
“날 모르겠느냐?”
“아, 형님 아니십니까?”
한빈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하자 팽혁빈이 웃었다.
“그래, 안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네, 형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크기는 내가 더 컸지.”
팽혁빈은 한빈의 어깨를 감싸고 같이 가주 팽강위 쪽으로 걸어갔다.
팽강위의 앞에 선 한빈과 팽혁빈이 동시에 외쳤다.
“가주님을 봬옵니다!”
“아버님을 뵙습니다!”
두 아들의 인사를 받은 팽강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터벅터벅.
묵직한 발소리를 내며 걸어온 팽강위가 한빈과 팽혁빈을 번갈아 보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원로와 각주를 이곳에 부른 이유는 한 가지네.”
잠시 말을 끊은 팽강위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는 바늘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한 눈빛으로 모두를 바라봤다.
원로와 각주는 재빨리 숨을 죽였다.
주위가 잠잠해지자 가주 팽강위가 말을 이었다.
“모두 집안에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을 알고 있을 것이네.”
“…….”
주변은 더욱 조용해졌다. 모두 숨소리조차 죽이며 팽강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팽강위가 말한 불미스러운 일이라는 것은 당연히 정화 부인이 벌인 일이다.
모두의 표정을 확인한 팽강위가 말을 이었다.
“소가주 후보 중 하나가 탈락했으니, 당연히 빈자리를 메꿔야 하는 법. 나는 모두의 의견을 듣고 싶네.”
가주 팽강위는 원로와 각주를 하나하나 살피며 턱짓했다.
할 말이 있는 사람에게 자유롭게 발언권을 주겠다는 뜻이었다.
한빈은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지금 어떤 논의가 진행되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소가주 후보라면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가문의 경영.
모든 권한을 소가주 후보에게 주지는 않지만, 가문의 경영 중 일부를 후보에게 맡겨 시험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를테면 하북팽가가 소유하고 있는 상권의 관리 같은 것이었다.
이 공자가 정화 부인과 함께 가문에서 쫓겨났으니 그 빈자리를 메꿔야 할 터.
지금 그 논의가 시작되는 중이었다.
그때 각주 하나가 손을 들었다.
“사 공자는 아직 맡은 일이 없지 않습니까? 가주님.”
“의견을 말해 보게.”
“응당히 조금 넓은 지역을 사 공자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넓은 지역이라? 구체적으로 말하게.”
“하북성 남쪽의 장운현의 상권을 사 공자에게 맡기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였다.
반대쪽에 있던 주작각주 가기군이 손을 들었다.
“가주님, 저는 반대입니다.”
“자네도 할 말이 있으면 말해 보게.”
“장운현은 사 공자가 맡기에 무리입니다. 그곳은 하북팽가와도 제법 거리가 있을뿐더러 사파의 구역과 겹치는 곳입니다. 어찌 보면 정치적으로 풀어 나가야 하는 구역입니다. 사 공자가 맡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가 각주, 무리가 있으니 능력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는 게 아닙니까?”
처음 의견을 제시했던 각주가 끼어들자 가기군이 고개를 흔들었다.
“정 각주. 그럼 정 각주가 그곳을 직접 맡아 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제가 입수한 소식에 의하면 강남의 백사문까지 장운현 부근을 탐색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파와 사파가 충돌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구역이 장운현입니다. 그곳을 맡기에는 사 공자의 나이가 아직 어립니다.”
“저도 한 말씀 할까 합니다.”
이번에는 머리가 희끗한 원로가 끼어들었다.
하북팽가의 회의는 그야말로 전쟁터가 되었다.
그들의 설전을 지켜보던 한빈은 계속 그들이 얼굴을 담았다.
물론 아군과 적군을 나눠서 말이다.
지금 말한 가기군의 경우 확실한 아군이었다.
그가 한 말은 얼핏 보면 한빈을 무시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장운현의 사정을 알고 있다면 진심으로 한빈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것이었다.
무림인들이 장운현을 부르는 다른 이름은 안개마을.
적과 아군이 확실치 않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안개마을이었다.
안개마을의 삼 분의 일은 사파가 상권을 틀어쥐고 있었다. 하북팽가를 비롯한 정파가 가지고 있는 지분은 삼 분의 일.
그렇다면 나머지 삼 분의 일은 누가 가지고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정사지간의 문파들이었다.
문제는 그곳 관원 대부분이 사파의 편이라는 것이었다.
한빈에게 장운현을 맡기자는 쪽은 한마디로 똥을 한 무더기 떠안으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빈이 아군과 적군을 머릿속으로 분리하고 있을 때 가기군이 외쳤다.
“절대 안 됩니다!”
“아닙니다. 장운현 상권의 관리는 사 공자가 맡아야 합니다!”
양쪽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며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팽강위가 거도를 바닥을 찍었다.
쿵!
그 소리에 원로와 각주들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팽강위는 옆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첫째 팽혁빈이 재미있다는 듯 원로와 각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팽혁빈이 흥미롭다는 듯 잠시 눈에 이채를 띤 팽강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생각은 어떠한지 말해 보아라.”
“저는 본인의 판단이 제일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럼 막내가 좋다고만 한다면 막내가 짊어질 위험부담은 관계없다는 것이냐?”
“아버님, 한 가지만 여쭤도 되겠습니까?”
“얘기해 보거라.”
“둘째가 장운현을 잘 관리했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더냐?”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장운현에 가 본 적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즉, 장운현의 관리는 뒷전으로 밀어 놨다는 겁니다.”
“그럼 막내도 그렇게 해도 된다는 말이더냐?”
“그건 막내에게 달린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임자가 개판을 쳐 놓은 일에 후임자가 성과를 내기를 바라는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팽혁빈의 말에 가주 팽강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보아라.”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후임자가 성과를 내었을 경우에 어떤 상을 줄지를 논의하는 게 정상이라고 봅니다.”
팽혁빈의 말에 가주전은 조용해졌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첫째 팽혁빈에게서 호의를 엿봤기 때문이었다.
가문의 형제 중에 이렇게 자신의 편이 있었던가?
의문도 잠시 한빈은 지금은 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해야 했다.
장후현을 맡는 것은 모두의 걱정과는 달리 한빈에게는 넝쿨째 굴러들어 온 호박.
딱.
손뼉을 한 번 친 한빈이 한 발 나섰다.
갑자기 나온 한빈의 모습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시선을 모으는 데 성공한 한빈이 말했다.
“저는 형님이 말씀하신 안건에 더해 한 가지가 더 논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뜻밖의 말에 모두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