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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63화 (163/621)
  • 163화. 하북제일 (6)

    꿈에 부푼 듯이 입가를 씰룩이는 설무익은 자신이 서명한 문서를 한빈에게 내밀었다.

    설무익은 붓을 잡은 한빈의 손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저기에 서명만 한다면 재산이 넝쿨째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때 한빈의 붓이 종이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획.

    눈 깜짝할 사이에 서명을 한 한빈이 종이 두 장 중 하나를 설무익에게 건넸다.

    설무익은 서명도 확인하지 않고 품속에 문서를 집어넣었다.

    “성의는 잘 받겠소.”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우리 애들은 괴롭히지 말고 돌아가시지요.”

    한빈이 어색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공자의 배포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오.”

    설무익은 한빈에게 포권한 뒤 물러났다.

    이제는 더는 볼일이 없다는 듯 설무익은 품에 든 문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는 휘파람을 불며 문을 나섰다.

    휘파람 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던 철노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 냈다.

    철노의 소매가 쓸고 지나간 얼굴에서는 뜻 모를 미소가 피어났다.

    아직도 먹을 쥐고 있는 장수정은 철노의 미소가 이해되지 않았다.

    장수정이 먹을 쥔 손을 떨며 철노에게 물었다.

    “철노 오라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그녀는 지필묵이 든 보따리를 들고 들어오며 철노에게 절대 당황하지 말란 말만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철노가 말한 공자라는 사람의 재산이 몽땅 날아가는 상황을 본 것이다.

    장수정은 무림이란 눈 뜨고도 코 베이는 곳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런데 설무익이 사라지자 철노의 표정이 대번 변한 것이었다.

    철노는 바로 장수정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한빈을 바라봤다.

    시선을 받은 한빈은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 철노의 친구분이신 것 같은데 맞죠?”

    “네, 그건 맞지만…….”

    “철노는 제가 시킨 대로 한 거니 걱정하지 마시죠. 이제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철노를 바라보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기분 좋은 한빈의 표정에 철노가 활짝 웃었다.

    “공자님, 저 잘했죠?”

    “그래, 방금 우는 모습은 나도 깜빡 속아 넘어갈 것 같더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공자님.”

    “아니야. 이번에는 정말 잘했어. 그 정도 눈물을 흘려야 놈들도 속아 넘어가지 않겠어?”

    “별말씀을요.”

    “내가 보기에는 황궁에서 공연해도 되겠어, 철노.”

    한빈은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렸다.

    철노의 거짓 울음은 어떻게 된 것일까?

    철노가 서재에서 만난 검은 그림자의 정체는 한빈이었다.

    한빈은 철노에게 사정을 듣고 흑사문 패거리를 옭아 넣을 계획을 짠 것이었다.

    철노는 거기에 따라 장단을 맞춰 준 것뿐이었다.

    한빈은 시선을 돌려 장수정을 바라봤다.

    잠시 그녀를 보던 한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장수정을 보며 대충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하지만, 한빈의 자세한 설명에도 장수정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손해 보신 건 대체 어떻게 하시려고요?”

    “손해라니요?”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장수정이 탁자 위의 문서를 가리켰다.

    “저기 돈을 다 주겠다는 서약서가…….”

    그녀는 문서를 보고는 말을 잊지 못했다.

    남에게 폐를 끼쳤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철노도 고개를 갸웃하며 한빈을 바라봤다.

    “저 문서는 저도 이해가 안 되는데요? 대체 왜 저렇게 큰 금액을 주기로 약조한 거예요? 공자님.”

    걱정 어린 눈빛을 한 철노를 보며 한빈은 씩 웃었다.

    한빈의 웃음 덕분인지 철노와 장수정은 한빈의 다음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들의 시선을 모은 한빈은 탁자 위의 문서를 조용히 잡았다.

    그러고는 철노에게 문서를 보여 줬다.

    “여기 누가 누구에게 주기로 했다는 표시가 있냐?”

    “네?”

    철노는 문서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손바닥만 한 문서 위에는 금액과 서명만이 있었다.

    철노가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럼 저 금액을 공자님이 받을 거라고 우기시려고요?”

    “그건 아니지. 잘 생각해 봐. 누가 줄지 받을지도 모르는 문서가 효력이 있을 것 같아?”

    “하긴 그렇죠. 그러면 그 문서는 무용지물이란 건가요? 공자님.”

    “그건 아니지.”

    말을 마친 한빈은 손바닥만 한 문서를 검지로 쳤다.

    툭.

    순간 문서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틈에 손가락을 넣어 문서를 펼쳤다.

    그 모습을 보던 철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손바닥만 한 쪽지로 알았던 문서가 잘 접힌 커다란 종이였다는 것은 철노도 예상 못 했던 것이었다.

    한빈이 종이를 완전히 펼치자 문서의 정상적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어지러운 조항들이 문서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 펼친 문서의 가장 아래 오른쪽에는 한빈과 설무익의 서명이 남아 있었다.

    위쪽에 조항들이 주르륵 있고 아래에는 당사자의 서명이라?

    이렇게 보니 완벽한 계약서였다.

    어찌 보면 완벽한 계약서를 접어 놓은 것뿐이었다.

    철노가 나지막이 말했다.

    “설마 노예 계약서는 아니겠죠?”

    “철노가 많이 늘었네. 그 설마가 맞아. 이제는 딱 보고 알아채네.”

    “아, 노예 계약서 맞구나. 그럼 저 밑에 금액은요?”

    “위약금은 별도로 정한다고 여기 적혀 있잖아.”

    한빈이 문서의 한 부분을 톡톡 치며 말했다.

    “그럼 우리한테 해는 없는 거라는 거죠, 공자님?”

    “그건 당연하고.”

    “저는 제가 괜히 사고 친 줄 알고 얼마나 마음 졸였는데요.”

    “사고는 무슨. 철노가 간만에 괜찮은 건수 물어 온 거지. 고생했으니까 며칠 쉬어.”

    한빈은 철노의 어깨를 다시 토닥이고는 의자에 몸을 맡겼다.

    한빈이 자리로 돌아가자 철노는 씩 웃으며 장수정에게 고개를 돌렸다.

    “거봐. 동생. 우리 공자님이 하북제일이라고 했잖아.”

    “하북제일이라…….”

    장수정은 하북제일 뒤에 이어질 말이 언뜻 떠오르지 않았다.

    문제는 해결된 것 같은데 무엇이 하북제일이란 것인가?

    그때였다.

    장수정과 철노의 옆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사삭.

    사람의 발소리라고 하기보다는 걸레질 소리에 가까운 은밀한 소리.

    장수정이 고개를 돌려 보니 하얀 무복의 여자아이가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여자아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장수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 아니 낚시꾼이요.”

    지금 말한 여자아이는 물론 설화였다.

    “뭐라고 했니? 얘야?”

    “하북제일 뒤에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잖아요, 언니.”

    너무도 친근한 태도에 장수정은 전에 알던 사이인지를 고민하며 말없이 설화를 바라봤다.

    “…….”

    “그 뒤에 나올 말이 사기꾼 아니었어요? 하북제일의 낚시꾼. 이 정도로 사람을 잘 낚는 낚시꾼도 없을 거예요. 태공망이 그랬잖아요. 사람을 낚는 낚시꾼이 진정한 낚시꾼이라고요.”

    설화는 배시시 웃었다.

    사실 사기꾼이라고 하려다가 말을 바꾼 것이었다.

    설화의 말에 한빈이 말했다.

    “같은 낚시꾼은 맞지만, 태공망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

    “에이, 공자님, 오늘 같은 날은 그냥 넘어가 주세요.”

    말을 마친 설화는 어디서 났는지 당과를 꺼내 베어 물었다.

    옆에 있던 철노가 설화를 보며 웃었다.

    “설화야. 내가 사다 놓은 것도 있으니 마음 놓고 먹어라.”

    “철노 아저씨, 고마워요.”

    설화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수정은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이 사람들의 정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참다못한 장수정은 용기를 내어 한빈에게 다가갔다.

    “공자님.”

    “왜 그러시죠? 철노 친구분께서 제게 할 말이라도 있으신가요?”

    “공자님은 대체 뭐 하는 분이시죠?”

    “저는 하북팽가 사 공자인데요. 철노도 하북팽가 사람이고요.”

    “하, 하북팽가요?”

    장수정의 눈이 커졌다.

    그러고는 뭔가를 떠올렸다.

    그것은 하북팽가 사 공자에 대한 소문이었다.

    분명 하북제일의 겁쟁이라고 했었다.

    그녀의 오해는 당연했다.

    수정반점이 있는 곳은 하북성에서 살짝 외곽으로 벗어나 있는 장운현.

    그곳에는 아직 한빈의 예전 소문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한빈과 철노를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을 때 설화가 말했다.

    “거지 할아버지랑, 화산파 아저씨가 안 보이네요. 그리고 다른 아저씨들도 올 시간이 됐잖아요.”

    “뭐, 알아서 오겠지.”

    한빈은 탁자 위에 있는 만두를 베어 물고는 창밖을 바라봤다.

    * * *

    한빈이 바라보는 방향은 천수장의 정문 쪽.

    설무익 일행이 정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그들의 앞에서 거지 하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터벅터벅.

    거지가 걸어오자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설무익 일행은 잽싸게 옆으로 물러났다.

    거지는 휘적휘적 그들을 지나쳐 어디론가 걸어갔다.

    그 뒤로 대문 앞에서 봤던 다른 거지가 나타났다.

    물론 그 거지는 서재오였다.

    서재오는 누군가를 다급하게 쫓아가고 있었다.

    “홍칠개 어르신!”

    “왜 자꾸 불러?”

    앞에 가던 홍칠개가 발길을 멈췄다.

    “자꾸 저한테 일을 시키시면 어떻게 합니까? 저 사 공자가 오길 기다렸다가 물건 찾아서 돌아가야 한다니까요.”

    서재오는 억울하다는 듯 양손을 내밀며 하소연했다.

    사실 서재오는 지금 미칠 지경이었다.

    정의맹 하남지부에 홍칠개와 같이 방문한 후 자꾸 일거리가 늘고 있었다.

    서재오는 한빈에게 매화 패와 자신의 검 매화삼경을 받아 이곳을 떠나야 하는 입장.

    그런데 홍칠개가 정의맹의 일거리를 자꾸 갖다주자 하소연을 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에 홍칠개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자네, 애처럼 왜 그래? 화산파에 뭔 꿀이라도 숨겨 놓은 거 있어? 빨리 가서 뭐 하게? 어차피 강호행 중이잖아. 내가 알기로 한 이 년 남은 걸로 아는데…….”

    “어르신, 저 화산파의 매화검수입니다. 자꾸 어린애 취급하시면 섭섭합니다.”

    “그러니까. 이번 일만 끝내라니까.”

    “아, 어르신.”

    서재오가 다급하게 홍칠개를 뒤따라갔다.

    그렇게 서재오와 홍칠개는 설무익 일행을 스쳐 지나갔다.

    그 모습에 수하 하나가 말했다.

    “서, 설마 무제자 홍칠개는 아니겠죠?”

    “방금 화산파의 매화검수라고 한 것 같은데요?”

    다른 수하도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들의 말에 설무익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수하들을 바라봤다.

    “호들갑 좀 떨지 말라고. 너희는 저게 매화검수의 몰골로 보이냐?”

    “그건 아니지만요…….”

    수하가 고개를 흔들자 설무익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홍칠개가 여기에서 왜 나와?”

    “그건 그렇죠. 그런데, 조금 이상하긴 합니다. 그놈이 자기 공자가 무림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나한테 벗어나려는 수작이고, 지금 매화검수니 홍칠개니 하는 것도 그놈이 자기 주인 보호하려고 거지한테 부탁한 거겠지.”

    “역시 공자님이십니다.”

    “너희들, 그 공자란 놈한테 무인의 기척이 느껴졌어?”

    “아니요.”

    “그래. 아무리 기척을 감춰도 살짝은 흘리고 다니는 게 무인의 기척이잖아,”

    “혹시 경지가 저희보다 높아서…….”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경지가 높아도 좁쌀만 한 기척이라도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놈들아. 그놈한테는 이류나 삼류에게서 느껴지는 기척도 없었어. 반박귀진의 경지가 아니고서야 그럴 수는 없지.”

    “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그러니까. 그놈은 그냥 우리가 생각한 대로 평범한 호구라는 말이지. 너희들은 아까 그 철노란 놈이 우는 거 못 봤어?”

    “크크. 맞습니다, 설 공자님.”

    그들이 노닥거리며 천수장 정문을 나서려 할 때였다.

    약초꾼 복장의 사람들이 천수장 정문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들은 바닥에 약초 꾸러미로 보이는 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초주검이 된 듯한 표정으로 땀을 닦아 내고 있었다.

    그때 그들 옆을 지나던 설무익의 수하 하나가 힐끔 누군가를 바라봤다.

    약초꾼 중에서도 피부가 까무잡잡한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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