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하북제일 (5)
그들의 대화에 설무익이 한숨을 쉬며 끼어들었다.
“휴……. 내가 너희 같은 놈들은 데리고 일을 하다니! 진짜 한숨 나온다. 이놈들아, 개방도면 허리에 매듭 하나쯤은 달고 있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놈 허리에 매듭이 있더냐?”
“잘 모르겠는데요.”
“그것도 확인 안 하고 헛소리를 씨불여. 허리 어디에도 매듭 비슷한 건 없었다.”
“아.”
“그놈은 그냥 거지다. 거지 중에서도 상거지야. 아니지, 행색을 보니 땅거지가 분명하다.”
“그사이에 매듭까지 확인하셨습니까? 설 공자님.”
“아무래도 너희는 교육 좀 다시 받아야겠다. 이놈들이 거지를 구대문파의 무인으로 착각할 놈들이네.”
수하들을 훈계한 설무익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앞서 걸으며 설무익 일행의 대화를 듣던 철노는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을 뱉었다.
“화산파면 구대문파 맞는데…….”
“구대문파가 왜요?”
장수정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철노가 손을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동생.”
“네, 철노 오라버니가 무림인이 아니어서 다행이에요.”
“내가 무림인이 아니라고? 저들한테 내가 무림인이라 밝히는 거 봤잖아.”
“그거야 저를 구하기 위해 그러신 거잖아요. 솔직히 저는 무림인이 진짜 싫어요. 철노 오라버니.”
“그런데, 무림인이 왜?”
“외할아버지가 무림인이었거든요. 뭐,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요.”
“…….”
“외할아버지가 숙수였던 아버지와의 혼인을 반대하는 바람에 어머니는 외가에서 몰래 도망쳤대요.”
“아, 그랬구나.”
철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호에 사연 없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철노가 듣기에 장수정의 사연은 흔하디흔한 사연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철노가 막 상념에서 깨어났을 때였다.
뒤쪽에서 설무익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까지 걸어야 하느냐? 노닥거리지 말고 빨리 안내하거라.”
“네, 거의 다 왔습니다.”
말을 마친 철노는 걸음을 재촉했다.
철노가 안내한 곳은 새로 지은 것처럼 깨끗했다. 거기에 규모도 제법 큰 전각이었다.
전각 앞에 선 철노가 말했다.
“여기에서 쉬고 계세요. 공자님 오면 제가 알려 드릴게요.”
“너희 도망치는 건 아니지?”
“자기 집 두고 도망치는 멍청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하긴……. 그런데 여기 너희 공자의 집은 확실한 거지?”
“아까 오시면서 마을 사람들이 저한테 공자님의 안부를 묻는 것을 보셨잖아요.”
“아, 그러고 보니…….”
설무익은 말끝을 흐리며 자신이 지나온 길을 다시 바라봤다.
그 모습에 철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우리 공자님이 오시면 다 해결해 드릴 거예요.”
“만약 약속을 어기면 너희 공자와 너, 둘 다 죽을 줄 알아라.”
“네, 알았어요.”
철노가 고개를 끄덕이자 설무익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참, 입이 심심하구나. 일단 먹을 거나 좀 내와 보아라.”
“일단 만두나 갖다드릴게요.”
말을 마친 철노는 장수정과 함께 사라졌다.
그날 밤.
설무익과 수하들은 묘한 소리에 눈을 떴다.
흐. 흐. 흥.
마치 귀신이 우는 듯한 소리가 그들의 귀를 간지럽혔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설무익 일행은 서로를 바라봤다.
수하 중 하나가 뭔가 생각난 듯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혹시 여기 말입니다, 설 공자님.”
“여기가 뭐? 빨리 말해 봐.”
“전에 귀곡장이라고 불리던 곳 아닌가요? 아까 올 때 길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너는 입 닥치고 그냥 자. 여기가 귀곡장이면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진을 치고 있겠어?”
“하긴 그렇겠죠, 공자님.”
“헛소리하지 말고, 이곳 기둥뿌리까지 뽑아 갈 준비하고 있어.”
“네, 공자님.”
* * *
일주일 후.
설무익 일행은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철노가 내 오는 음식을 먹으면서 천수장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일주일째 아무 소식이 없자 그냥 떠나야 하나를 고민 중이었다.
하지만, 한 번 찍은 목표를 놓친 적이 없는 설무익이었다.
자신이 이런 식으로 남의 재산을 가로챈 적이 한두 번이던가?
여기에서 그냥 물러난다는 것은 오점을 남기는 일이었다.
그때 수하 하나가 넌지시 말했다.
“공자님, 백사문에서 내려온 일을 놔두고 여기 있어도 될까요?”
“그건 하북팽가 주변에 감시할 애들 충분히 풀어놨잖아.”
“하긴 그렇죠, 공자님.”
수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관자놀이를 툭툭 치며 머리를 굴리던 설무익이 눈을 빛내며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왜 그러세요? 설 공자님.”
“돈이 없다고 잡아떼면 가져갈 것이라도 미리 정해 둬야 하지 않겠냐?”
“아.”
“일단 재산 목록부터 추려야겠다.”
“역시 공자님이십니다.”
그들은 모두 일어나 천수장에서 돈이 될 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수장을 둘러보면 볼수록 그들에게는 의문이 쌓였다.
설무익을 뒤에서 따르던 수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공자님, 이곳 주인이라는 사람이 진짜 부자 맞을까요?”
“오면서 마을 사람들 못 봤어? 다들 손 벌리고 있잖아.”
“아무리 그래도 부자면 살림살이가 표시가 나지 않습니까? 아무리 봐도 값나가 보이는 게 없습니다, 공자님.”
“제발 머리 좀 쓰라니까? 이놈아.”
“왜 그러십니까?”
“생각해 봐. 마을 사람들한테 다 퍼 줄 만큼 선량한 호구가 평소에 사치를 부리겠어?”
“…….”
“퍼 주느라고 제 것은 못 챙긴 거지. 어차피 나갈 돈 우리가 좀 떼 가자는 거야.”
“그래도 좀 이상합니다.”
“진짜 호구가 맞는 거지. 아마 마을 사람들에게 퍼 주는 것을 보면 돈 나올 데는 있을 게 분명하다.”
“그래도 괜히 헛수고 같네요. 그냥 수정반점만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게…….”
“내가 찍어서 실패한 게 있더냐?”
“당연히 없죠, 공자님.”
“그래, 없지. 일단 문서로 약조라도 받아 놔야겠다.”
“문서보다는 뭐라도 건져 가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여기 건져 갈 게 있더냐? 아무래도 이곳의 주인이란 놈은 모든 돈을 전장에 맡겨 놓은 것이 분명해. 약조라도 받아 놓고 천천히 쪽쪽 뽑아 먹어야지.”
“탁월하십니다, 공자님.”
수하는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 * *
잠시 후.
설무익은 철노와 마주 앉았다.
설무익은 자신의 요구를 철노에게 전달한 상태였다.
철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공자님 오실 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안 되나요?”
“너는 내가 한가한 놈으로 보이느냐? 어서 약조할 문서를 내오너라.”
“이건 원래 우리 공자님이 잘하시는 건데.”
“또 공자님 타령이냐?”
“제가 문서에는 약해서요.”
“오호라, 네가 나를 물로 보는구나.”
말을 마친 설무익은 비릿한 웃음을 짓고는 왼손으로 허리에 찬 검집을 톡톡 쳤다.
누가 봐도 명백한 위협.
철노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니에요. 그럼 공자님이 미리 써 놓은 거라도 드릴게요.”
철노의 말에 설무익이 탐욕에 찬 눈빛을 드러냈다.
설무익이 생각하기에 철노가 말하는 공자는 남한테 끝없이 퍼 주는 자.
문서 또한 호구같이 작성해 놨으리라.
설무익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그래, 내와 보거라.”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말을 마친 철노는 잽싸게 한빈이 서류를 모아 놓은 곳으로 달려갔다.
철노는 두루마리가 꽂혀 있는 책장을 살피다가 한 곳에 멈췄다.
그곳에는 정갈한 필체가 자리 잡고 있었다.
-기본 계약서.
철노는 망설임 없이 두루마리 중 하나를 꺼냈다.
철노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었다.
한빈이 자신이 자리를 비울 경우에는 이 서재에 있는 기본 계약서를 쓰라고 당부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철노는 이 계약서의 내용을 잘 모른다.
까막눈은 아니지만, 이 계약서를 보면 마치 미궁에 빠진 듯 눈이 어지러웠다.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불이익을 보는지조차 헷갈리는 계약서였다.
그런데 이게 기본 계약서라니!
철노는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자신이 벌인 일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한빈의 말을 따르는 게 맞다고 확신했다.
철노가 계약서를 보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그림자 하나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나자 설무익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철노가 도망친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때 철노가 계약서를 들고 장수정과 함께 나타났다.
철노는 설무익의 앞에 계약서를 펼쳤다.
촤르륵.
철노는 옆에 있는 장수정에게 턱짓했다.
신호를 받은 장수정이 들고 온 보따리를 풀었다.
그곳에는 붓과 먹, 그리고 벼루가 나왔다.
장수정이 벼루에 먹을 갈기 시작하자 설무익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철노도 기분 좋게 웃었다.
한빈의 흉내를 내니 왠지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서로 웃음이 오가는 가운데 설무익은 곁눈질로 문서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완전히 고개를 돌려 문서에 얼굴을 바싹 갖다 댔다.
글은 글인데 이상하게 문맥이 이해가 안 되었다.
“뭐지?”
설무익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감이 안 잡혔다.
그때 철노가 말했다.
“여기에 받을 금액만 적으시고 서명하시면 돼요.”
철노가 가느다란 붓을 설무익에게 건넸다.
붓을 받은 설무익이 고개를 갸웃했다.
“문장이 왜 이리 복잡하지?”
“저도 잘 몰라요. 그냥 서명하세요.”
철노가 먹이 찰랑거리는 벼루를 설무익 쪽으로 밀었다.
쓱.
설무익은 반사적으로 붓을 벼루에 담갔다가 꺼냈다.
살짝 흔들리는 설무익의 손.
그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모르는 문서에 서명하는 것은 왠지 모르게 찝찝해서였다.
그렇게 고개를 젓고 있는데 옆쪽에 붉은 무복의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부터 들어왔는지도 모를 사내를 본 설무익은 눈을 가늘게 떴다.
호리호리하게 생긴 데다가 얼굴은 하얀 것이 제법 부티 나게 생긴 자였다.
흔히 볼 수 있는 부잣집 도련님에 가까운 외모.
특징이 있다면 붉은 무복이 조금 거슬렸을 뿐이었다.
설무익이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너는 누구지?”
“안녕하세요, 저는 천수장의 주인입니다.”
“오호, 드디어 나타났군.”
설무익이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 기척도 없이 옆에서 한빈이 나타난 장면에서 설무익은 놀라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천수장의 기둥뿌리를 뽑아 가야 하나를 고민하는 그에게 한빈의 등장은 그저 반갑기만 했다.
한빈을 본 철노는 눈물을 글썽였다.
“고, 공자님. 죄송해요.”
“괜찮다. 대충 밖에서 들어 보니 내가 보상만 해 주면 되는 것 같구나. 그렇지?”
“그게 그러니까…….”
철노는 이제까지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한번 털어놨다.
다 듣고 난 한빈은 놀란 기색 없이 설무익에게 고개를 돌렸다.
“수하의 잘못은 곧 나의 잘못. 이딴 문서가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제가 다 보상하지요.”
“역시 듣던 대로 배포가 크군. 그런데 이 문서는 좀 복잡한 것 같은데. 간단히 좀 써 주지.”
“네, 말씀대로 하죠.”
말을 마친 한빈은 품에서 쪽지 두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탁!
쪽지를 본 설무익이 고래를 갸웃했다.
“이게 뭐지?”
“거기에 원하는 액수를 적으시죠. 그리고 서명하시면 됩니다. 물론 제 서명도 들어가야겠지요.”
“흠.”
설무익은 헛기침하며 붓을 쪽지 위에 갖다 댔다.
이전 문서와는 다르게 아무것도 없는 백지였다.
이건 소위 말하는 백지 어음과도 같았다.
여기에 적는 숫자만큼 자신이 상대에게 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막상 이렇게 백지를 내밀자 얼마를 적어야 할지 설무익의 머릿속은 막막했다.
망설임도 잠시, 욕심이란 끝이 없는 법.
설무익은 쪽지 위에 숫자를 가득 채웠다.
한빈과 설무익이 서명할 공간만 빼고 말이다.
그가 적은 금액은 셀 수도 없었다. 어떤 가문이라도 기둥뿌리가 뽑힐 상황.
그 모습에 철노가 비명을 질렀다.
“고, 공자님, 저자가 쓴 액수가……!”
“괜찮다, 철노.”
“저 때문에 공자님이 저런 막대한 손해를…….”
“괜찮대도. 난 네 안전이 더 중요해.”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하자 철노가 눈물을 왈칵 쏟았다.
“역시 공자님의 마음씨는 하북제일이에요.”
“아니다. 나는 내 수하의 안전이 제일이란다.”
그들의 모습을 보던 설무익은 남은 공간에 서명을 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북제일이라고 해서 뭔가 했더니? 하북제일의 호구였어, 호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