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하북제일 (4)
진세미의 말에 설경추가 미간을 좁혔다.
익절선생 마휘의 이름이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것이다.
설경추는 아들 설무익과 함께 하북을 비우고 장기간 하남에서 활동했었다.
이곳에 온 것은 불과 며칠.
하남에서 백사문주의 눈에 들기 위해 얼마나 굴렀던가?
하북의 사업에서 잠시 손을 떼고 하남에서 백사문의 오른팔 노릇을 한 것은 모두 흑사문의 미래를 위한 포석이었다.
그런데 백사문주보다 한 끗 더 높은 마휘의 이름이 나오니 가슴이 떨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가끔 백사문을 방문하는 마휘를 보기 위해 주변을 어슬렁거렸지만,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얼굴 한 번 보기 힘들다는 마휘의 지시라니!
설경추는 재빨리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쉬십시오, 아가씨.”
“문주님,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언제쯤 오는 거죠?”
“아마도 산동으로 떠났다고 하니 금방 오지는 못할 겁니다. 제가 하북팽가 주변에 아이들을 풀어놨으니 도착하는 대로 기별이 올 겁니다.”
설경추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하지만, 설경추는 자신의 실수를 모르고 있었다.
그 실수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말만 듣고 하북팽가만 감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북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는 그는 이곳 정보에 대해 너무 몰랐다.
하북팽가 사 공자인 한빈의 변화도.
한빈이 천수장을 새로운 거처로 삼고 있다는 점도.
설경추가 모르는 사실이 너무 많았다.
“네, 그럼 부탁드려요.”
진세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뭔가 생각난 듯 말을 덧붙였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에게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정중해야 함을 잊지 마시고요.”
“네, 잊지 않고 있습니다. 아가씨.”
“그럼 가 볼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진세미는 자리를 떠났다.
설경추는 진세미의 뒷모습을 보며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약자한테는 철저히 강하게.
강자한테는 철저히 고개를 숙이며 살아온 설경추에게 진세미의 방문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것도 잠시 설경추는 혼잣말을 뱉었다.
“마휘의 지시라…….”
말끝을 흐린 그의 눈은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그의 눈빛은 마치 자신의 미래를 그리고 있는 듯 보였다.
* * *
철노는 설무익과 작당한 포졸을 떼어 내고는 천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당하게 걷던 철노는 옆을 힐끔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도망치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장수정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철노가 말했다.
“피해 있으라니까. 왜 왔어?”
“오라버니 혼자 어떻게 보내요?”
“동생, 나 못 믿어?”
“믿기야 믿지요. 그런데…….”
장수정은 힐끔 뒤쪽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설무익이 살기등등하게 따라오고 있었다.
장수정이 철노를 믿는다고 한 것은 사실 반만 진심이었다.
그녀가 믿고 있는 것은 철노의 음식 솜씨지 무공이 아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손맛과 비슷한 그의 음식에 비해 장수정이 보기에는 철노가 약해 보였다.
게다가 뒤에서는 설무익이 검집을 틀어쥐고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장수정은 도저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하든지 철노의 목숨은 구하고 싶었다.
장수정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물며 몸을 떨었다.
도망치고 싶지만, 철노를 놔두고는 여기를 떠날 수 없었다.
그때 철노가 그녀의 소매를 살짝 잡아끌었다.
“동생, 떨지 마.”
“아, 안 떨어요.”
“그래, 떨지 마. 공자님이 계시니까. 우린 걱정할 필요 없어.”
“알았어요, 철노 오라버니.”
장수정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겁먹은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갑자기 철노가 모시는 공자님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사실 지금까지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장수정에게는 중요한 것은 철노의 음식 솜씨밖에는 없었다.
다른 건 그녀의 관심 밖이었다.
철노가 어느 가문에서 일하는지 그의 공자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그 모든 것이 관계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궁금했다.
흑사문의 손아귀에서 자신과 철노를 구해 줄 사람은 철노가 입이 닳도록 말하던 공자라는 사람밖에 없었으니까.
장수정은 힐끔 설무익과 그의 수하를 바라봤다.
그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그녀가 장사를 하던 거리는 평화롭기만 했다.
그들이 다시 온 이상 더는 거리의 평화는 없었다.
속으로 한숨을 쉬려는데 철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타다닥.
다급하게 뛰어가는 철노를 본 설무익이 외쳤다.
“이게 어딜 도망치려고 그래, 멈춰!”
“여기서부터는 빨리 가야 해요. 다들 서두르세요.”
철노가 뒤를 보며 손짓하자 설무익이 눈을 크게 떴다.
도망치는 줄 알았는데, 도리어 손짓을 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설무익은 잠시 후 철노가 왜 서둘렀는지를 알 수 있었다.
갑자기 철노에게 마을 사람들이 달려들었다.
“와아, 저기다!”
“에고. 이제 오시네.”
허름한 복장의 마을 사람들이 철노를 향해 달려왔다.
뒤쪽에서 바라보던 설무익은 자신도 모르게 검집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긴장을 풀고 고개를 갸웃해야 했다.
달려오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적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묘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게 뭘까?’
설무익은 사람들의 태도를 살폈다.
잠시 마을 사람들을 살핀 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철노를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저런 눈빛을 보인다는 것인가?
추리를 이어 나가던 설무익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저런 간절한 눈빛이 뜻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바로 절실한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바라는 도움이란 무엇일까?
설무익은 그것이 당연히 돈이라 생각했다.
설무익의 눈에는 저잣거리에서 손을 벌리는 거지나 철노에게 달려드는 마을 사람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다면?
철노가 말한 공자라는 놈은 부자임이 틀림없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마을 사람들이 부담 없이 기댈 정도의 호구였다.
한마디로 돈 많은 호구!
결론을 낸 설무익은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철노와 마을 사람들의 대화는 설무익의 예상대로였다.
다리를 저는 노인이 철노에게 물었다.
“공자님은 언제 오는 건가? 철노.”
“잘 모르겠습니다. 때가 되면 오시겠죠.”
철노가 대답을 마치고 급히 가려는데 아이를 등에 업은 여인이 철노의 소매를 잡았다.
“공자님이 오시려면 아직 멀었나요?”
“아마 며칠은 걸릴 거예요.”
철노가 마지못해 답했다.
철노는 개방을 통해 어제 한빈의 소식을 들었다.
계산대로라면 나흘에서 열흘 사이에 도착할 것이었다.
철노의 옆에서 걷던 장수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철노가 말한 공자라는 사람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장수정은 철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금도 철노는 마을 사람에게 자신의 공자가 언제 돌아오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장수정은 왜 철노가 뛰자고 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철노에게 공자의 안부를 묻는 이들의 표정은 절실했다.
게다가 모두가 아픈 사람들뿐이었다.
다리를 절고 기침을 하고 힘이 없어 수레에 누워 있는 사람 등.
그들의 상태는 천차만별이었다.
장수정이 조심스럽게 철노에게 물었다.
“공자님이라는 분이 혹시 의원이세요?”
“뭐, 약간의 오해가 있긴 하지만 비슷해.”
철노가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철노도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정확히 아는 바는 없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모인 것은 한빈이 하남으로 떠날 때쯤이었다.
하남에서 돌아왔을 때 말해 줄까 하다가 산동으로 바로 떠나는 바람에 천수장의 사정을 전하지 못했었다.
대충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어 보면 한빈이 앉은뱅이 거지 소녀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 소문이 송화산 주변에 파다하게 퍼졌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한빈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 날이 밝으면 이렇게 천수장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이었다.
철노는 마을 사람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운다는 말인가?
어릴 적부터 봐 왔지만, 한빈에게 그런 의술은 없었다.
물론, 여기에는 철노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 앉은뱅이 거지 소녀가 바로 설화라는 점이었다.
차라리 마을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한빈을 봤다면 오해가 풀렸겠지만, 그 후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한빈은 마을 사람들에게 신비인으로 비쳤다.
몇십 번을 같은 대답을 하고서야 철노는 천수장의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대문 앞에서 초췌한 모습으로 쪼그려 앉은 사람이 있었다.
철노가 보기에 분명 마을 사람이었다.
보통은 예의상 천수장의 입구까지는 오지 않는데 어지간히 급했던 것 같았다.
철노는 초췌한 사내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보슈.”
“끙.”
사내는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순간 철노가 깜짝 놀라 물었다.
“대협, 왜 여기에 이러고 있으세요?”
철노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쪼그려 앉아 있던 사내는 다름 아닌 화산파의 매화검수 서재오였다.
“아, 이제야 왔군, 철노. 하남에 있다가 내 물건을 찾으러 왔는데 문이 잠겨 있더라고.”
“에이, 그럼 그냥 안에서 기다리시지.”
“여기가 혼자 있을 데는 못 되잖아. 허락 없이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고 말이네.”
서재오는 손을 휘휘 저었다.
그 모습에 철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죠, 대협”
“그런데 뒤에 계신 분들은 누구신가?”
서재오가 철노의 뒤에 있는 설무익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철노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답했다.
“저 때문에 공자님을 만나러 온 분이에요.”
“그럼 어서 모셔야지.”
서재오는 설무익 무리를 가리키며 정중히 답했다.
한빈의 손님이라면 만만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매화검수로서의 자존심 따위는 벗어 버린 지 오래인 서재오였다.
천수장에서부터 하남정가까지.
그 긴 여정에서 만난 인물 중 자신보다 아래로 볼 인물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다못해 한빈의 시녀인 설화마저도 자신에 비하면 한 수 위였다.
서재오는 요즘 들어 화산파의 무공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서재오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자 철노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같이 들어가시죠, 대협.”
“아닐세. 나는 여기서 어르신을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가겠네.”
“아, 어르신이요.”
“그렇다네. 하남에서부터 같이 왔는데 갑자기 사라지셔서.”
“네, 그럼 저희부터 들어갈게요.”
철노는 천수장 문을 열었다.
며칠 동안 닫혔던 천수장의 대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끼익.
문턱을 넘은 철노는 설무익 일행이 묵을 처소를 안내하기 위해 휘적휘적 걸어갔다.
설무익의 수하 하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설 공자님, 아까 대협이라고 하는 거 보니 혹시 한 가닥 하는 사람 아닐까요?”
“헛소리하지 말고 정신 차려.”
“왜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생각해 봐. 지금 하남에서 왔다고 하잖아. 우리가 얼마 전까지 어디 있었어?”
“그야 하남이죠.”
“그래, 하남이지. 그런데 저런 얼굴 본 적 있어? 대협이라 부를 만한 놈이면 우리가 얼굴을 알고 있어야 정상이지. 그리고 대협이란 놈이 문 앞에 쪼그려 있겠어?”
“하긴 그러네요. 역시 설 공자님의 판단은 정확하십니다.”
“내 판단이 정확한 게 아니라 너희들이 머리를 안 쓰는 거지,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게 아니야. 머리는 쓰라고 있는 거다, 이놈들아.”
설무익의 호통에 수하는 뒤쪽을 바라보며 침을 뱉었다.
퉤!
침을 뱉고 난 수하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요즘은 개나 소나 다 대협이래. 괜히 나만 혼났네.”
그때 옆에서 다른 수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보니 복장이 허름하던데…….”
“복장이 왜?”
침을 뱉은 수하가 그게 무슨 문제냐는 듯 묻자 다른 수하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개방 사람이 아닐까 해서? 거지라도 개방도면 조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