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하북제일 (1)
한빈이 가리킨 곳에는 사람의 팔 하나가 삐져나와 있었다.
한빈은 그 앞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코를 씰룩였다.
그러고는 옆으로 튀어나와 있는 소매를 확인하고 황보만청을 바라봤다.
“이자는 이 공자로 변장을 했던 정체불명의 적이 분명합니다.”
한빈이 본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가 천리추종향의 흔적이었고 둘째가 복장이었다.
마지막은 손바닥에 남은 흔적.
그 손바닥은 분명히 검술을 익힌 자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손바닥의 잔주름과 굳은살을 자세히 보면 검법까지도 유추할 수 있기 마련이었다.
검을 맞댄 한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황보만청도 고개를 끄덕인다.
“복장을 보면 확실하군.”
“동일인일 확률이 구 할 정도 됩니다.”
“구 할이라?”
“네, 이 정도 시간이면 타인에게 옷을 입히고 여기에 대신 밀어 넣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 일 할의 예외가 좀 찜찜하군. 왜 일 할의 찜찜함을 남겨 두는 것인가?”
“그야 하늘이 정한 예외지요. 모든 일에 일 할의 예외는 두고 방비하는 게 강호의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얼굴 한번 확인해도 되겠나?”
“얼굴은 어제 만져 보시지 않았습니까?”
“자네를 보니 강호에서 몇십 년은 구른 것 같아서 하는 말일세.”
“하하, 무가(武家)라면 기본적으로 받는 교육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흠.”
황보만청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이 모든 게 무가의 기본 소양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검을 손에 쥐고 나왔다는 말과도 같았다.
세상에 그런 자가 어디 있을까?
그렇다고 한빈의 말을 부정하기엔 황보세가의 얼굴이 깎이는 것 같아 마지못해 수긍했던 것이다.
한빈은 황보만청의 떨떠름한 표정을 보고는 말을 이었다.
“가주님께서는 마음 편히 다음 일을 진행하면 될 것 같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아무래도 이쯤 해서 대국의 계가는 끝내야 할 듯싶습니다.”
“고생했네. 그리고 고맙네.”
“중요한 건 지금부터입니다.”
“자네 생각을 솔직히 말해 주게.”
황보만청은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한빈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일단 제안드릴 것이 있습니다.”
“가능한 한 들어주겠네.”
“가장 중요한 것은 황보세가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해야 하는 점입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을 하란 말인가? 적이 심어 놓은 첩자가 있다면 솎아 내야 할 것이 아닌가?”
황보만청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적을 찾아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하다는 말인가?”
“적의 꼬리를 밟는 것입니다.”
“꼬리라…….”
“언젠가는 이 공자에게 접근하는 자가 있을 겁니다. 식솔이 될 수도 있고, 외부인이 될 수도 있겠죠.”
“함정을 파 놓자는 이야기군.”
“네, 그렇습니다. 좋아하시는 바둑을 예로 들면 축이 나올 수 있는 판을 만들자는 말입니다.”
“축이라……. 자네 말에 동의하네.”
황보만청의 주름이 보기 좋게 꿈틀댔다.
누가 봐도 기분 좋은 표정.
한빈이 말한 축이란 갈지자로 도망쳐도 계속 단수가 되어 끝까지 몰리게 되면 죽을 수밖에 없는 바둑의 수법을 말한다.
황보만청의 호의 가득한 모습에 한빈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에 대한 호의도 보이시면 안 됩니다.”
“자네와의 관계까지 숨기라는 말인가?”
“네, 부탁드립니다. 저는 황보세가에 상처를 남긴 적이 마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까지는 나도 동의하는 바이네. 그 후 계획은 있는가?”
“제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럼 나도 한마디 하지.”
“네, 말씀하시지요.”
“내놓게.”
“내놓다니 뭘 말씀하시는지요?”
“오행 패 말일세.”
“아, 오행 패라…….”
“하북팽가의 확실한 아군이라면 황보세가밖에 더 있겠나?”
씩 웃으며 손을 내미는 황보만청.
한빈은 그 모습에 속으로 혀를 찼다.
잠시도 방심할 수 없었다.
강호를 종횡하다 보면 태산을 가를 듯한 무공보다 사람을 옭아 넣는 심계가 더 무서울 때가 있다.
한빈은 문득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이 집념이 섞인 호의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빈의 표정을 본 황보만청이 말했다.
“조만간 하북팽가에 들르겠네.”
황보만청이 사람 좋은 얼굴로 바라보자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이 부담감은 과연 무엇일까?’
* * *
한빈이 황보세가를 떠난 것은 정확히 이틀 뒤였다.
황보세가에서는 가주의 축객령으로 한빈이 떠났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황보세가 내부에서는 그럼 그렇지 하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그중 가장 흥분한 것은 황보견우였다.
소식을 들은 황보견우는 씩씩대며 집법당주 황보서현을 찾았다.
“집법당주님, 왜 하북팽가의 사 공자를 그냥 보내셨습니까?”
“그럼 그냥 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황보서현이 황보견우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가주와 한빈 간의 밀약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황보견우가 가문을 물려받을 소가주이긴 하지만 비밀을 알리기에는 시기상조라는 것이 가주와 황보서현의 판단이었다.
황보견우는 자신이 동생이 며칠 동안 바뀌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황보견우를 이렇게 놔둘 수는 없는 법이었다.
황보서현은 극약 처방을 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그녀의 속을 모르는 황보견우는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남의 가문에 쳐들어와서 마음대로 휘저은 다음에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사실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친 것은 아니다.”
“그럼 뭡니까?”
“조용히 내보낸 거지. 먼저 이걸 봐야겠구나.”
황보서현이 잘 접힌 서찰 하나를 황보견우에게 던졌다.
획.
황보견우는 반사적으로 서찰을 받아 펼쳤다.
서찰을 확인하던 황보견우의 눈이 보름달처럼 커졌다.
서찰을 든 황보견우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게 대체 뭡니까?”
“거기 나와 있는 대로다. 네 팔을 보전하는 대신 지급할 돈과 네가 가주가 되기 위해 넘어야 할 마지막 관문. 너는 같은 오대세가의 직계를 모함해 놓고 그냥 넘어갈 줄 알았느냐?”
“그건 아니지만…….”
“황보세가는 네 행동 하나에 상상도 못 할 대가를 치렀다.”
“그럼 제가 하북팽가의 사 공자에게 인정을 받아야 가주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게 가주님의 뜻이야. 어떻게 할래?”
“…….”
황보견우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찰을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버님이 축객령을 내렸다는 소문은 또 뭡니까?”
“그럼 황보세가가 털렸다고 소문나면 좋겠어?”
“그거야…….”
“이게 정치라는 거야. 너도 황보세가의 대공자로서 지금부터는 정치를 좀 배워야겠다.”
“무슨 정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하북팽가의 사 공자를 어떻게든 네 편으로 만들어라. 이게 가주님의 지시이자, 내 명령이다.”
“제, 제 편이라고요……?”
황보견우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마구 떨렸다.
서찰과 황보서현의 말을 종합하면 이제 하북팽가 사 공자, 팽한빈의 밑에 엎드려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이건 황보견우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잠시 후, 집법당에서 나온 황보견우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속으로 같은 이름을 몇 번이나 외쳤다.
‘팽한빈, 팽한빈! 이 사기꾼 같은 놈!’
그 후 황보견우는 눈만 뜨면 같은 이름을 외치며 이를 갈아야 했다.
* * *
열흘 후 이른 아침 가람산 중턱.
한빈은 귀를 후비며 고개를 갸웃했다.
“누가 자꾸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은데, 내가 천리지청술이라도 깨달은 건가?”
“공자님, 저는 아무것도 안 들려요.”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자 옆에 있던 이무명이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사부.”
그 모습에 한빈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목소리 들어 보니 이제 기운이 나나 보네.”
“아, 아닙니다.”
“에이, 목소리에 활기가 넘치는데. 이제 다시 가 봐.”
“사, 사부.”
“내가 항상 말하잖아. 나약하게 굴지 말라고. 어서.”
한빈이 턱짓으로 옆을 가리켰다.
한빈이 가리키는 곳에는 무덤이 있었다.
그 무덤은 황보세가의 연공실과 연결된 통로였다.
무덤을 본 이무명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이무명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이무명과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하북으로 가져갈 흑철을 캐내는 중이었다.
사실 캐낸다는 의미는 적절하지 못했다.
원래 있던 흑철 덩어리를 옮길 수 있는 크기로 자르는 작업 중이었다.
문제는 흑철의 강도에 있었다.
칼질 몇 번 망치질 몇 번에 조각난다면 그것이 흑철이라 할 수 있을까?
흑철을 자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파혼검의 초식밖에 없었다.
한빈이 적혈맹호대 전원에게 파혼검의 초식을 가르쳐 주었지만, 지금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정확히 셋밖에 없었다.
그것은 설화와 이무명 그리고 심미호였다.
심미호는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마을과 가람산을 왕복 중이고 설화는 은밀하게 주변을 경계 중이었다.
그런 관계로 이무명 혼자 흑철을 조각내고 나머지는 흑철을 통로 밖으로 빼내고 있었다.
그 결과 이무명은 탈진 상태가 되었다.
몸이 회복되려면 적어도 두 시진은 쉬어야 할 텐데 한빈이 다시 통로로 들어가라고 하니 죽을 맛이었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낸 이무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던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사실 한빈이 내려가서 흑철을 조각내면 간단히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빈이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이무명이 절정에서 초절정으로 올라설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몸의 어딘가에 영약을 숨겨 놓고 한계에 다다를 때마다 조금씩 푸는 느낌이었다.
몸을 돌려 무덤으로 향하려던 이무명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설화에게 물었다.
“지금 제일 편한 게 누굴까?”
“저는 아니에요. 저도 나름대로 힘들어요, 무명 아저씨.”
설화가 손을 내젓자 이무명이 말했다.
“네 얘기 한 게 아니라 철노 얘기한 거야. 울 사부 주변에서 제일 편한 게 철노인 것 같아서. 부럽다.”
“저도 부러워요. 저잣거리 당과가 그리워요.”
“좀 도와주지 않을래? 도와주면 당과는 사 달라는 대로 다 사 줄게.”
그들의 대화에 한빈이 끼어들었다.
“절대 불가!”
한빈의 말에 이무명은 고개를 푹 숙였다.
* * *
같은 시각 하북의 어느 객잔 앞.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음식점의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머뭇거리다가 구석으로 가 벽에 기댄 채 음식점을 다시 바라봤다.
그때 음식점의 문이 살짝 열리더니 누군가가 목을 빼죽 내밀었다.
제법 예쁘장한 얼굴의 여인이었다.
이십 대 중반의 여인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두리번거렸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여인의 시선이 구석에 있던 사내에게 멈췄다.
순간 여인은 문을 열고 달려갔다.
덜컹.
그녀는 재빨리 사내 앞으로 다가가 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사내는 마지 못해 그녀에게 끌려갔다.
사내를 객잔으로 끌고 간 여인이 말했다.
“철노 오라버니, 왜 이렇게 늦었어요?”
사내의 정체는 바로 철노였다.
철노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내가 좀 바빠서.”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여인은 서운하다는 듯 입을 살짝 내밀었다.
그 모습에 철노가 미안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우리 공자님이 시킨 일이 산더미거든. 우리 공자님은 내가 없으면 밥숟가락도 못 드는 분이라서……. 뭐, 내가 떠먹여 준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 공자님은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거든.”
“아.”
“이번에는 산동으로 떠나시면서 일을 산더미처럼 맡겨 놓는 바람에…….”
철노는 활짝 웃으며 며칠간 자신이 한 일을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