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대국(大局) (6)
한빈이 펼친 종이에 황보만청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지에는 미리 조그마한 글씨가 쓰여 있었지만, 황보만청은 굳이 그것을 보지 않았다.
그 글자들이 자신과 관계있으리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생각은 한빈의 다음 말로 바뀔 수밖에 없었다.
“읽어 보시고 결정하시죠.”
“서명이라니?”
“이건 제가 간단히 준비한 계약서입니다. 아까 구두로 얘기한 내용과 별반 차이 없습니다.”
“허허.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계약서라…….”
황보만청은 말끝을 흐렸다.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속단하자니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지금의 상황은 화경의 무위로도 헤쳐 나가지 못할 재난에 가까웠다.
그런데 왜 마음이 놓인다는 말인가?
이것은 이성적인 판단이라기보다는 어찌 보면 무인 특유의 감각에 가까웠다.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감각에 황보만청이 의문을 품고 있을 때 한빈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별거 없습니다. 대국을 통해 얻은 것을 나누자는 말입니다.”
황보만청은 고개를 들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랬지. 하지만 얻은 것이 없지 않은가?”
“저희는 이 공자를 얻었죠. 그리고 숨은 적을 발견함으로써 황보세가의 미래를 얻었고요. 그게 작다고 보십니까?”
“험.”
황보만청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헛기침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호의로 가득 차 있었다.
“싫으시면 저도 그냥 여기에 누우렵니다.”
농담처럼 말을 건넨 한빈이 장난치듯 바닥을 가리키자 황보만청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험, 일단 읽어 보겠네.”
황보만청은 계약서와 한빈을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계약서를 읽던 그의 입은 서서히 벌어졌다.
처음에는 상호 간의 협력과 같은 추상적인 계약 내용이 적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계약의 내용은 생각보다 세밀했다.
상행에서부터 재난 발생 시 협력 사항까지 모든 사항이 조그만 종이 위에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을 미리 써 뒀다는 데 있었다.
이 사건이 발생했든 아니든 간에 한빈은 이 계약서를 내밀었을 것이었다.
만약에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분명히 계약서에 서명을 할 상황을 만들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빈을 다시 보게 되었다.
만약 적이라면?
그런 가정도 잠시 황보만청은 한빈이 탐난다는 듯 흐뭇한 눈길로 한빈을 바라봤다.
계약서와 한빈을 번갈아 보던 황보만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자네, 혼처는 정해졌는가?”
“정해진 혼처도 지웠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는지요?”
“아닐세.”
황보만청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잠시 후.
황보만청은 붓을 들었다.
한지 위에 서명을 하려던 황보만청은 슬쩍 붓을 놓고 한빈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내 자네의 얼굴을 한번 만져 봐도 되겠는가?”
심각하게 묻는 황보만청의 모습에 한빈이 웃었다.
“얼마든지요.”
“그럼 실례하겠네.”
황보만청이 재빨리 손을 뻗었다.
한빈은 저항하지 않고 어이가 없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황보만청은 마치 아기의 얼굴을 주무르듯 조심스럽게 한빈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만족하십니까?”
“내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었군.”
“아버지가 아들조차 못 알아볼 정도의 인피면구였는데 저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빈이 씩 웃자 황보만청이 조용히 붓을 놀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서명하시라니까 계약서는 왜 고치시는 거죠?”
“험, 들켰나?”
황보만청이 멋쩍게 웃었다.
그의 붓이 마지막으로 멈춘 곳에는 조금은 황당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와 황보세가 간의 혼약으로……
한빈은 황보만청을 보고 혀를 찼다.
위기의 상황에서 이런 발상을 한다는 자체가 황당했다.
잠시의 실랑이가 오갔고 황보만청은 추가하려던 문장을 삭제할 수밖에 없었다.
서명을 마친 황보만청이 물었다.
“아까 자네는 적이 미생이라고 하지 않았나?”
“네, 맞습니다.”
“그럼 자네는 황보세가를 능멸한 놈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말해 줄 수 있는가?”
“불가능합니다. 그건 특급 비밀입니다. 장사 밑천을 시작부터 다 드러낼 수는 없는 법이지요.”
한빈은 씩 웃으며 자신의 소매를 찢어 만든 천으로 월아에 묻은 혈흔을 닦아 내며 코를 씰룩였다.
과연 놈을 잡을 수 있을까?
반 정도는 진실이었다.
전생에서 가지고 온 감각 중 하나인 한빈의 후각은 일반 무인보다 몇십 배는 탁월했다.
굳이 말하면 동물과 비견할 수 있을 것이었다.
늑대가 피 냄새에 민감하듯 한빈은 일정 향에 민감했다.
한빈은 월아의 검신에 적이 지울 수 없는 향을 묻혔다.
강호에서 천리추종향(千里追從香)이라고 부르는 지독한 향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천 리라는 것은 영물이나 가능한 일이고 한빈은 그놈이 백 보 안에 온다면 어떤 상황에서든지 감지할 수 있었다.
즉, 다시 마주치면 잡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미로처럼 복잡한 통로를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이 추종향 덕분이었다.
통로의 중간중간 묻혀 둔 것이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상념을 끝낸 한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돌과 무쇠가 섞인 벽을 손으로 치며 용린검법의 기본편을 바라봤다.
[기본편]
……
[심(心) : 십(十)]
진룡파혼검을 펼칠 수 있는 최소 속성이 열 개로 늘어난 것이다.
심의 속성이 열 개로 늘어난 것은 한 시진 전이었다.
이것은 심미호가 파혼검의 일 성에 들어섰다는 이야기였다.
파혼검에 첫발을 들였다는 것은 통로를 무사히 개척하고 있다는 말도 되었다.
언제쯤일까?
심미호가 연공실 근처에 도착한다면 아마 뚫을 수 없는 무쇠로 된 벽 혹은 단단한 석벽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 벽은 심미호가 아니라 한빈이 제거해야 했다.
한빈은 이제 신호만 기다리면 되었다.
한빈은 벽을 확인하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한빈의 미소를 보던 황보만청이 천천히 걸어왔다.
갑자기 떠오른 의문이 있기 때문이었다.
한빈도 다가오는 황보만청의 기척에 힐끔 뒤를 돌아봤다.
“자네, 혹시 화경의 경지에 들어선 것인가?”
“아닙니다. 제가 어찌 화경의 경지를 넘볼 수 있겠습니까?”
“그럼, 마지막에 보여 줬던 그 기세는 대체 무엇인가?”
“그냥, 하북팽가의 가전 무공이라고 해 두죠.”
“허허.”
황보만청은 더는 묻지 않겠다는 듯 허허롭게 웃었다.
한빈이 마주 웃으며 말했다.
“여기에서 나가면 상의할 일이 많습니다. 그때 궁금증을 한 번에 풀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네.”
황보만청이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려 할 때였다.
연공실 벽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꽝! 꽝!
그 소리에 한빈이 재빨리 그곳으로 뛰어가 벽에 귀를 갖다 대었다.
소리를 확인한 한빈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이 기다리던 심미호가 확실했다.
한빈은 월아의 손잡이로 벽을 때리기 시작했다.
꽝, 꽝……. 꽝.
한빈이 벽을 때리는 것은 심미호에게 뜻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한빈은 지금 심미호에게 백 보 밖으로 물러서라 말하고 있었다.
꽝……. 꽝.
반대편에서 소리가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심미호가 한빈의 신호를 확인했다는 뜻이었다.
서로 신호를 확인한 한빈은 황보만청에게 외쳤다.
“어르신, 이 공자를 데리고 반대쪽에 계십시오!”
“허, 무슨 일인가?”
“지원군이 왔습니다.”
“알겠네.”
말을 마친 황보만청은 둘째를 부축해서 반대쪽으로 갔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한빈은 월아를 검집에서 뽑았다.
스르릉.
기수식을 취한 한빈은 용린검법 중 새로 얻은 초식을 떠올렸다.
[반박귀진(返璞歸眞) - 자신의 힘을 철저히 감추는 수법입니다. 근력으로 내공을 감추는 수법으로 강호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인 수법입니다. 반박귀진을 시전하면 주위 모든 사람은 시전자의 경지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지속 시간 한 시진. 필요 속성 력(力) 한 개.]
반박귀진은 한빈이 원하는 수법이었다.
초식의 설명대로 강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력을 감추는 편이 유리했다.
여기저기 기세를 흘리고 다닌다면 더 강한 적, 더 교활한 적이 꼬이기 마련이니까.
거기에 공(功)이 아닌 력(力)의 속성을 사용하기 때문에 내공의 운용에도 무리가 가지 않았다.
지금 반박귀진을 운용한 것은 자신의 기세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심력을 사용하여 상대방의 영혼까지 날려 버리는 용린검법 상승의 초식인 진룡파혼검은 한빈도 처음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이 검법이 주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알 수 없었다.
한빈은 조용히 초식을 떠올렸다.
‘진룡파혼검.’
비급 기본편에 있던 심(心)의 속성 열 개와 남아 있던 삼 년의 공력이 사라졌다.
동시에 몸 곳곳에서 묘한 기운이 양손으로 모였다.
더는 기운이 모이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그 기운은 월아의 손잡이로 흘러들어 가기 시작했다.
한빈은 월아와 마치 하나가 된 듯한 묘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월아의 손잡이에서 검신으로 흘러들어 가는 기운이 검 끝에 모였다.
검 끝에는 투명한 구슬이 생겨났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투명한 구슬은 마치 여의주 같았다.
월아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이 되었다.
순간 한빈의 마음에 따라 검이 움직였다.
실제 움직인 것은 정확히 한 뼘.
흔히 발하는 촌경(寸勁)의 수법과도 같았다.
동시에 월아 끝에 모인 여의주가 벽에 닿았다.
팡!
그리 크지 않은 타격음이 연공실을 울렸다.
타격음의 끝에 한빈의 앞에는 검은 먼지가 휘날렸다.
먼지가 조금씩 가라앉자 한빈은 저 너머의 공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빈은 뚫린 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에 맞춰 상대도 반대쪽에서도 다가왔다.
상대는 아직 남아 흩날리는 먼지를 뚫고 다가와서 한빈에게 포권했다.
“주군, 저 왔어요.”
“고생했어. 심 부대주.”
한빈이 씩 웃자 심미호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주군, 이게 뭔가요? 혹시 진천뢰라도 터뜨리신 건가요? 아님 혼원벽력탄이라도?”
“비밀이야. 궁금하면…….”
한빈이 놀리듯 말하자 심미호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하세요. 주군. 저 산 뚫고 나왔어요. 그런데 비밀이라니!”
“그럼 이번만 말해 줄게. 심 부대주가 익힌 파혼검의 마지막 단계야. 지금은 일 성이지만, 나중에는 이렇게 되겠지.”
한빈은 살짝 거짓을 보탰다.
하지만, 이것은 그녀에게 동기부여가 될 것이었다.
어찌 보면 선의의 거짓.
“헉!”
심미호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것도 잠시 심미호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그런데 제가 파혼검의 일 성에 성공한 걸 어떻게 아셨어요? 주군.”
“원래 부하와 가족의 마음은 만 리가 떨어져 있어도 느껴지게 마련이잖아. 그렇다고 너무 감동하지는 말고. 심 부대주.”
“아, 어떻게 감동을 안 해요. 주군. 무쇠도 가루로 만드는 검법을 주셨는데요.”
흙투성이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쇠라고?”
“네, 무쇠요. 분명히 저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무쇠였어요. 그것도 새까만 무쇠요.”
한빈은 바닥에 떨어진 먼지를 손으로 쓸었다.
그러고는 맛을 봤다.
그 모습에 심미호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주군! 아무리 배가 고파도 왜 먼지를 먹고 그래요. 제가 육포라도 드릴까요?”
“괜찮아, 심 부대주. 나는 운이 정말 좋은가 봐.”
한빈이 씩 웃었다.
황보만청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해 준 황보세가의 전설은 사실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황보만청이 아들을 등에 업고 다가왔다.
그러고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한빈과 심미호를 바라봤다.
번갈아 둘을 보던 황보만청의 시선이 심미호에게 고정됐다.
“대, 대체 누구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