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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55화 (155/621)

155화. 대국(大局) (5)

허장성세라면 이전에 잔혈마도에게도 먹혔던 수법.

이 초식으로 잠시의 틈만 만들어 내면 되었다.

허장성세를 운용하자 용린의 기운이 성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기운을 모은 한빈이 외쳤다.

“그만!”

짧지만 강렬한 의미가 상대를 옥죄었다.

순간 상대의 눈이 커졌다.

동시에 한빈이 검을 틀었다.

전력을 다한 한빈의 검이 상대의 방어를 뚫었다.

서걱!

한빈의 검이 적의 왼팔에 적중했다.

순간 갑자기 먼지가 일어났다.

파스슥.

한빈이 경계를 하며 앞을 보고 있을 때 자욱한 먼지가 살짝 걷혔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적은 그곳에 없었다.

자세히 보니 기관 장치를 발동시키는 줄에 그의 왼팔이 매달려 있었다.

순간 한빈의 시야에 글귀가 나타났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용린검법의 응용편 중 귀(歸)를 획득하셨습니다.]

한빈이 입꼬리를 살짝 올릴 때였다.

잘린 팔의 무게 때문인지 줄이 아래로 내려왔다.

쓰윽.

그때 뒤쪽에서 황보만청이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물러나게!”

그 외침에 한빈이 위쪽을 바라봤다.

위쪽에서 천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바닥도 흔들린다.

휘청이는 바닥으로 천장이 떨어져 내렸다.

쾅!

한빈이 다급하게 뒤로 물러났다.

타다닥.

천장은 차례대로 떨어져 내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 놓은 마작 패가 순서대로 쓰러지듯 천장은 차례대로 계속 가라앉았다.

쿵! 쿵!

한빈의 뒤쪽에서 무쇠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힐끔 뒤를 보니 천장에서 떨어진 물건은 진짜 무쇠였다.

저 무쇠에 깔리면 기사회생으로도 다시 살아날 수 없었다.

한빈이 달려오자 자신의 아들을 업은 황보만청도 뛰기 시작했다.

타다닥.

쿵. 쿵.

그들의 발길에 맞춰 무쇠 떨어지는 소리도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눈앞에 두 개의 길이 나오자 황보만청이 걸음을 멈췄다.

탁!

급히 걸음을 멈추고 고민에 빠진 황보만청의 소매를 한빈이 끌었다.

“이쪽입니다.”

“알겠네.”

황보만청은 한빈에게 이끌려 미로처럼 펼쳐진 통로를 누볐다.

쿵. 쿵.

아직도 들려오는 무쇠 떨어지는 소리.

황보만청은 뒤쪽을 힐끔 보고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전대 가주였던 아버지에게도 이런 기관 장치가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자신이 들은 것이라고는 대국의 수수께끼를 푸는 자가 황보세가의 힘을 얻으리라는 것이 전부였다.

황보만청은 이 말이 가문의 경영을 바둑에 비유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대한 바둑판처럼 생긴 연공실에서 진짜 바둑을 둘 생각을 해 본 가주가 있었을까?

아마 황보만청을 제외하고는 없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황보만청도 모르는 비밀 통로에 먼저 들어온 자가 있었다니!

사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하북팽가 막내의 무공이었다.

분명 상대는 화경의 고수였다.

자신이 온전한 몸으로 상대한다면 제압 가능한 상대라지만, 후기지수 중에 저자를 상대할 자가 있던가?

황보만청은 강남과 강북을 통틀어 그런 후기지수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거기에 상대의 신경을 긁어 가며 검을 쓰는 모습은 마치 강호에서 몇십 년은 굴러먹은 노고수 같았다.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지금의 모습이었다.

마치 대국을 복기하듯 길을 찾아가는 모습은 황보만청도 흉내 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흥분하지 않은 상태라면 바둑을 두듯 통로의 갈림길을 기억해 놨겠지만, 지금처럼 황당한 상황에 맞닥뜨리고 통로를 기억할 수 있을까?

하북팽가의 막내는 그것을 해내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빈이 멈췄다.

탁.

한빈이 멈춘 곳은 바둑판 모양의 연공실이었다.

맨 처음 출발한 곳에 도착한 것이다.

한빈이 빙긋 웃으며 황보만청을 바라볼 때였다.

쿵!

지금까지와는 몇 배는 큰 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한빈은 힐끔 뒤를 돌아보고는 입을 살짝 벌렸다.

한빈이 빠져나온 문에 집채만 한 무쇠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저 정도 크기의 무쇠라면 무공의 경지와는 관계없었다.

강호에서는 화경의 고수를 태산을 가를 듯한 기세와 비견하고는 한다.

하지만 그것은 비유일 뿐, 태산 아래 깔린다면 살아날 무인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일단 숨을 돌린 한빈은 황보만청을 바라봤다.

황보만청도 같은 기분인지 멍하니 떨어진 쇳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슬쩍 옆으로 간 한빈이 말했다.

“어르신, 이 공자부터 내려놓으시지요.”

“나도 모르게 정신을 놓고 있었군.”

황보만청은 자신의 아들을 바닥에 눕혔다.

아들을 눕히고 상세를 확인하는 황보만청은 연신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이 공자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내 수혈을 눌렀으니 별일이 없으면 이대로 잠을 잘 것이네. 호흡도 안정적이고 말이야. 모두 자네 덕분이네. 고맙네.”

“다행입니다.”

“그건 그렇고 일단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게 우선인 것 같군.”

“그렇다면…….”

말끝을 흐린 한빈이 바닥에 놓인 묵철 바둑알을 힐끔 바라봤다.

황보만청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네.”

둘은 조용히 바둑알을 잡았다.

휙. 휙.

그들은 놨던 순서와는 반대로 바둑알을 낚아채기 시작했다.

바둑판 모양의 연공실 위는 어느새 깨끗해졌다.

한빈과 황보만청은 바둑알을 가죽 주머니에 담고 변화를 기다렸다.

그때 그들의 예상대로 기관이 움직였다.

드드득, 드드득.

기관 장치가 비명을 지르자 바닥이 서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바닥이 멈췄다.

툭.

그 모습에 한빈이 천천히 들어왔던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 멈춘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철문이 있어야 할 곳에 대신 철벽이 있었다.

“이건 대체…….”

“아무래도 출구가 막힌 것 같네그려.”

“그럼 일단 숨 좀 돌리면서 생각해 보죠.”

한빈은 품속에서 대롱 하나를 꺼냈다.

얇디얇은 대롱은 마치 독침을 쏘는 대롱과도 같이 생겼다.

황보만청이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조그만 대롱을 내밀었다.

“한잔하시죠?”

“이게 뭔가?”

“화주입니다.”

“바둑만 잘 두는 줄 알았더니 술꾼이군.”

“술꾼은 아닙니다.”

“술꾼도 아닌데, 화주를 넣어 다니나?”

“뭐, 가끔 필요할 때가 있어서 가지고 다닙니다. 어르신.”

“필요할 때라…….”

황보만청이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대롱 하나를 더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러고는 바로 자신의 팔목에 부었다.

주륵.

그 모습에 황보만청이 먹던 화주를 뿜었다.

“푸흡.”

“왜 그러십니까?”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묻자 황보만청이 물었다.

“이거 말일세. 먹는 술이 확실한가?”

황보만청이 대롱에 든 술을 가리키며 물었다.

“전쟁터에서 먹는 술과 소독용 술의 구분이 어디 있습니까? 어르신.”

한빈이 턱짓으로 주변을 가리키자 황보만청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빈의 말대로 여긴 전쟁터가 맞았다.

황보만청 자신도 그렇고 한빈도 그렇고 자기 아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이 패잔병 신세였다.

지금 널브러져 있는 모습은 바둑판 위의 죽은 돌이나 마찬가지였다.

황보만청이 말했다.

“대국에서 졌군.”

“졌다니요? 바둑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끝나지 않았다라? 그럼 살았다는 것인가?”

“미생(未生)입니다.”

“미생이라, 그럼 우리가 살아날 기회가 있다는 거군.”

“저는 우리 얘기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럼 누구 얘기란 말인가?”

“마치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듯 한쪽 팔을 남겨 놓고 빠져나간 놈을 말하는 겁니다.”

“허, 그놈 걱정을 할 때는 아닌 것 같은데, 우리는 살아날 것 같나?”

“원래 대마불사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대마불사라……. 그럼 우리가 대마(大馬)라는 말인가?”

“우리가 아니라 가주님이 대마죠. 황보세가에서 가주님이 대마가 아니라면 누굴 대마라 하겠습니까? 이곳이 황보세가인 만큼 대마가 죽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안심시키려 하는 말치고는 일리가 있군.”

황보만청이 웃자 한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그냥 한 말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죠, 어르신.”

말을 마친 한빈은 자신의 무복을 쭉 찢어 남은 상처를 동여맸다.

한빈이 이렇게 급히 치료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회복의 구결이 몸을 돌려놓고 있기 때문이었다.

벌써 상처가 근질거리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갈라진 상처가 아물 것이 분명했다.

이걸 옆에서 목격한다면 황보만청은 과연 뭐라고 할까?

한빈은 괜한 오해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한편 황보만청은 놀란 듯 한빈을 바라봤다.

상처를 소독하고 지혈하는 모습이 너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저것은 아수라장을 헤쳐 온 낭인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북팽가의 막내가?

그것도 저 나이에?

황보만청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상처를 처치한 한빈은 다시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러고는 황보만청에게 건넸다.

“일단 이거라도 드십시오.”

“이건 또 뭔가?”

“육포입니다.”

“허허, 자네 품속에는 대체 얼마나 많은 물건이 들어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진심이었다.

한빈의 품은 마치 화수분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많은 물건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궁금하십니까?”

씩 웃은 한빈은 다시 품속을 뒤지기 시작하더니 바로 가죽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이건 또 뭔가?”

“보시면 압니다.”

한빈은 바닥에 가죽 두루마리를 펼쳤다.

촤르륵.

황보만청은 이상한 광경에 고개를 갸웃했다.

가죽 두루마리를 펼치자 한지와 붓이 있었다.

* * *

같은 시각, 황보세가가 보이는 가람산 기슭.

산짐승 소리만 들리는 산자락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의 정수리에서는 희미하게 현기가 감돌고 있었다.

현기가 정수리의 천중혈에서 빠져나가고 들어가고를 반복하다가 어느샌가 사라졌다.

정순한 현기는 여인의 몸속에 갈무리되었다.

잠시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숨을 고르던 여인이 눈을 떴다.

그 눈빛은 고요했으며, 그녀의 피부는 까무잡잡했다.

사실 가장 두드러지는 그녀의 특징은 그녀의 몰골이었다.

흙투성이의 옷은 마치 광부를 생각나게 했다.

거기에 더해 그렇지 않아도 까무잡잡한 피부는 덕지덕지 붙은 흙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았으면 사람이라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자연 속에 동화되어 있었다.

산속 다람쥐조차 그녀를 자연의 일부로 느끼는 듯 앞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심미호였다.

가부좌를 푼 심미호는 옆에 있는 곡괭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휴우…….”

심미호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한빈이 그녀에게 내린 지시는 크게 보면 한 가지였다.

그것은 가람산에서부터 황보세가로 이어진 통로를 확인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혼자서 하기에는 버거운 임무였다.

하지만, 이 임무에는 거부하지 못할 당근이 따랐다.

그것은 한빈이 심미호에게 전수한 파혼검이었다.

그런데 상승의 검법인 파혼검을 곡괭이질을 하며 깨달을 줄은 진정 몰랐었다.

한 초식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칼을 만 번 휘두르면 된다는 강호 속담이 있다.

심미호는 곡괭이질 천 번으로 파혼검의 일 성에 들어섰다.

게다가 지금 경지를 상승시킬 작은 깨달음까지 얻었다.

심미호는 다시 곡괭이를 들었다.

“이제부터는 칼도 검도 아닌 곡괭이를 들어야 할 운명인가?”

혼잣말을 뱉은 심미호는 옆을 힐끔 봤다.

그곳에는 제법 큰 무덤이 있었다.

심미호는 그 무덤의 뒤쪽으로 갔다.

뒤쪽으로는 마치 도굴꾼이 파 놓은 것 같은 구덩이가 있었다.

심미호는 망설임 없이 그 구덩이로 뛰어들었다.

얼마나 걸어갔을까?

심미호는 흙으로 막힌 통로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뱉었다.

“이 정도면 거의 온 것 같은데…….”

그녀는 한빈이 준 지도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곡괭이를 들었다.

순간 곡괭이에 희미한 기가 일렁였다.

심미호는 바로 곡괭이로 막힌 통로를 내려쳤다.

팡!

순식간에 통로를 막은 흙더미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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