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대국(大局) (4)
한빈의 말에 복면인이 눈매를 좁혔다.
그것도 잠시 그의 복면 안쪽이 달싹였다.
“입만 살았군.”
웃음 섞인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한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칭찬이군. 고맙네, 친구.”
한빈은 독수리가 먹이를 쪼려는 듯 상체를 기울이며 월아로 상대를 압박했다.
상대는 아무렇지 않게 힘으로 맞서며 답했다.
“난 네 친구가 아니야.”
“원래 처맞다 보면 다 친구가 되는 법이지.”
한빈이 월아에 내공을 실었다.
월아에 푸른 기운이 살짝 피어났다.
동시에 복면인의 검에서 붉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 모습에 한빈이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격장지계가 통한 것 같았다.
압도적인 무위로 누르기에는 상대의 경지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즉, 동수 내지는 한빈의 위라는 이야기.
상대의 밑천을 보고 대항하는 게 이치에 맞았다.
상대의 붉은 검기에 맞춰 한빈의 푸른 검기도 더욱 짙어졌다.
동시에 둘 사이에 진동은 점점 커져 갔다.
드르륵, 드르륵.
두 검이 울부짖는 듯 똑같이 검명을 토해 냈다.
한빈이 슬쩍 상대를 밀쳤다.
툭!
상이한 힘이 충돌하기 때문일까?
그 힘이 몇 배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파바박!
한빈도 뒤로 밀렸고 검은 복면인도 뒤로 한참을 물러났다.
쾌검난마의 초식이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까?
뒤로 밀려 난 복면인의 입가에 선혈이 슬쩍 비쳤다.
한빈도 내공이 진탕되는 것을 느꼈다.
한빈은 입가에 고인 핏물을 다시 삼켰다.
상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법이었다.
피식 웃은 한빈이 재빨리 용린검법의 다른 초식을 추가했다.
‘일촉즉발.’
전광석화의 묘용에 쾌검난마의 초식이 기본이 된 상태에서 한빈의 몸이 튕겨 나갔다.
슝!
월아와 하나가 된 한빈이 검은 복면인을 향해 날아갔다.
복면인은 입가에 피를 여유 닦아 내며 검을 바로 받았다.
순간 그의 검에서 붉은 기운이 일렁인다.
그 모습에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숨겨 둔 실력을 펼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의 붉은 검기와 한빈은 푸른 검기가 막 부딪히려는 순간 한빈이 초식을 바꿨다.
‘성동격서.’
상대방을 한 번의 공격에 한해 무력하게 만드는 초식.
문제는 상대의 경지가 한빈보다 높을 때였다.
이때에는 이 할의 확률로 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즉, 경지만 같다면 완벽하게 상대를 현혹시킬 수 있는 기술이었다.
방패처럼 펼친 검막의 옆으로 한빈의 검이 휘어져 들어갔다.
마치 풀 사이를 지나가는 뱀과도 같은 형태.
변화를 알아챈 복면인이 뒤로 물러났다.
파박.
하지만, 한빈의 검이 더 빨랐다.
슝!
한빈의 검이 복면인의 안면을 가격했다.
순간 복면인이 몸을 뒤쪽으로 눕히며 한빈의 검을 겨우 피했다.
하지만 한빈의 검에 복면이 걸렸다.
획!
검 끝에 걸린 복면에서는 살짝 피가 묻어 나왔다.
복면인은 어느새 뒤쪽으로 다섯 걸음 이상 물러나 있었다.
상대의 경지가 한빈보다 높아 공격이 성공했을까?
지금의 검을 피한 것으로 봐서는 절대적인 경지는 한빈의 위였다.
즉, 운이 좋았다는 이야기였다.
한빈은 상대를 더 흔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빈이 검을 털어 냈다.
동시에 검 끝에 매달린 복면이 바닥에 떨어졌다.
툭.
한빈이 복면인에게 걸어가며 말했다.
“금선탈각이라? 네 전생은 매미였나?”
“후…….”
복면인이 고개를 숙이며 깊은숨을 쉬었다.
순간 복면인이 일어났다.
횃불에 꿈틀대는 그의 표정과 얼굴 윤곽이 드러났다.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이 공자?”
한빈이 말한 이 공자는 다름 아닌 황보영우였다.
하지만, 황보영우는 가주 황보만청과 함께 있었다.
그렇다면 저자는 누구일까?
한빈의 표정을 본 사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들켰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상대는 한빈에게 혼란을 주려는 것 같았다.
정체불명의 적을 바라보던 한빈이 웃었다.
“푸웁!”
“왜 웃지?”
“그냥 미안해서 그러지.”
“…….”
정체불명의 적이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월아를 사내에게 겨눴다.
“그거참 비싼 인피면구 같은데 내가 망가뜨린 것 같아서. 이왕 이렇게 된 거 내가 물어 주지.”
한빈의 말에 적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말대로 그의 얼굴에는 살갗이 벗겨진 인피면구의 일부분이 너덜거리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적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한빈은 주위를 살피며 그에게 다가섰다.
하지만, 한빈은 서두르지 않았다.
한빈은 그에게 바로 다가가지 않고 갈지(之)자로 걷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정체불명의 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외쳤다.
“빈틈이 없군!”
“빈틈이 없다기보다는 네가 허술한 거지. 누가 이런 어린애 장난 같은 짓에 당할까?”
한빈이 월아로 아래를 가리켰다.
바닥에는 드문드문 철질려(鐵蒺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철질려란 송곳 네 개가 뭉쳐 놓은 듯한 형태의 암기였다. 철질려를 바닥에 뿌려 놓으면 어느 하나는 하늘을 향하게 마련이었다.
상대는 자신이 싸움에서 밀릴 것을 대비해서 독을 바른 철질려를 미리 뿌려 놓는 치밀함을 보였던 것이다.
한빈은 철질려를 피해 정체불명의 적에게 다가갔다.
터벅터벅.
적과의 거리는 불과 세 걸음.
그때였다.
정체불명의 적이 검에 붉은 기운을 더욱 짙게 실었다.
투드득.
마치 종이가 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한빈은 월아를 두 손으로 잡았다.
상대의 경지가 예측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화경이 분명했다.
아마도 전에 맞섰던 잔혈마도와 비슷한 경지의 고수일 것이었다.
그런 고수가 철질려를 쓰는 치밀함까지 보인다라?
한마디로 난적이었다.
정체불명의 적이 붉은 검기를 피워 내며 한빈에게 달려들었다.
한빈에 대한 파악이 끝났다는 듯 정체불명의 적은 미소를 피워 냈다.
그때였다.
한빈이 입맛을 다셨다.
달려오는 그에게 일렁이는 점을 봤기 때문이었다.
한빈도 월아에 푸른 검기를 피워 내며 달려들었다.
‘일촉즉발.’
검이 마주하는 순간 한빈이 초식을 바꿨다.
‘성동격서.’
다시 검이 신묘하게 움직인다.
하지만, 그 검은 상대에게 막혔다.
챙!
성동격서란 확률에 의존하는 초식이었다.
하지만, 방법은 있었다.
이 할의 확률이라고 해도 열 번 찍으면 반드시 두 번은 성공한다는 말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초식 하나를 더 사용했다.
‘자승자박.’
쾌검난마, 자승자박, 성동격서를 이용해서 적을 상대하고 있는 한빈.
한빈의 공격을 받은 적은 눈을 크게 떴다.
분명 기세는 있으나 자신의 윗줄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검술을 보니 자신과 맞먹는 것만 같았다.
한빈의 검이 상상할 수도 없이 빨랐다.
여기서 더 큰 문제는 한빈이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검을 놀린다는 것이었다.
보통 요혈을 향해 검을 날리면 백이면 백 방어를 우선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저런 애송이일 경우는 더욱 자신의 몸을 중시하기 마련이고 말이다.
하지만, 한빈은 달랐다.
날아오는 요혈을 그대로 허용하는 대신 그의 다른 급소를 노리고 있었다.
여기서 두 번째 문제가 발생했다.
분명 한빈의 살을 베었는데 이상하게 그의 팔이 저릿해져 왔다.
마치 자신이 급소를 가격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정체불명의 적이 외쳤다.
“이화접목!”
한빈이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정체불명의 적이 살짝 동요했다.
한빈은 성동격서의 초식을 다시 사용했다.
이제 남은 공력은 십오 년.
더 이상 사용하면 승부를 장담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한빈은 속으로 외쳤다.
‘먹혀라!’
한빈의 진심이 통했을까?
손끝에 상쾌한 감각이 전해졌다.
푸슉!
동시에 한빈의 시야에 글귀가 떴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용린검법의 응용편 중 박(璞)을 획득하셨습니다.]
[반(返), 진(眞), 박(璞)]
한빈은 쓱 정체불명의 적을 바라봤다.
아직 남은 점이 한 개가 더 있었다.
점이 있는 곳은 그의 왼팔.
한빈은 재빨리 그에게 짓쳐 들었다.
하지만, 적은 재빨리 뒤로 빠졌다.
한빈과 승부를 하며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한빈도 그런 그의 모습에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이제 용린검법의 초식을 쓸 내공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많아야 두 번 정도 쓰면 힘을 다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던 정체불명의 적이 벽에 막혔다.
그는 위를 힐끔 올려다보더니 외쳤다.
“더 이상 오면 이곳의 통로를 무너뜨리겠다!”
그는 천장에서부터 내려온 끈을 잡았다.
한빈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가 잡고 있는 끈을 바라봤다.
지금의 말이 맞다면 그가 잡고 있는 끈이 이곳을 무너뜨리는 장치인 것 같았다.
물론 허세일 수도 있었다.
여기서 모험을 걸어야 할까?
한빈은 그의 왼팔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고민하던 한빈이 말했다.
“해 보시든가. 내 특기가 뭔지 알아?”
“알고 싶지 않군.”
“알고 싶지 않다니 말해 주지. 내 특기는 동귀어진.”
“허세하고는!”
“한번 확인해 볼까?”
한빈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가자 사내는 끈을 더욱 꽉 쥐었다.
“…….”
한빈은 더는 다가가지 않고 상대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성동격서에 당했으니 한빈을 자신보다 위라 보는 것 같았다.
물론 마기를 지닌 자에 한해서는 유리한 면이 있었다.
쾌검난마라는 마기에 특화된 초식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공력이 얼마 안 남은 한빈이었다.
이 좁은 곳에서 싸운다면 승패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넌 대체 누구냐?”
“나? 하북팽가의 사 공자.”
“내가 황보세가의 이 공자인 것처럼 너도 하북팽가의 사 공자란 거지? 그런데 우리 본단에서는 너 같은 고수를 보낸 적이 없는데!”
“본단이라?”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본교가 아니라 본단이라는 것은 마교 이외에 단체가 있다는 것을 뜻했다.
한빈은 여기서 한가지 가정을 해야 했다.
정, 사, 마를 제외한 다른 단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이런 단체가 있다는 것은 전생에서도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한빈은 상대에게 더욱 집중했다.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미안, 실수했군.”
“어차피 같이 죽을 사이인데, 툭 터놓고 말해 보자고.”
“네 정체부터 말하면 나도 말하지.”
“한번 맞춰 봐.”
“마교에서 보냈나?”
“뭐, 반은 맞췄군.”
한빈이 슬쩍 거짓을 섞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진행한다면 놈의 정체도 알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일단 놈은 마교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반은 맞췄다라? 그럼 우리가 여기에서 싸울 필요가 있을까?”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교는 아니지만, 마교와 적대적이지 않은 단체라?
한빈이 적의 정체에 대해 유추하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빈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뭐 확인할 필요도 없이 황보만청일 것이었다.
한빈은 손을 뒤쪽으로 해서 수신호를 펼쳤다.
정의맹의 일원이라면 알 수 있는 수신호였다.
다가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한빈의 손짓을 본 황보만청이 발길을 멈췄다.
그러고는 멀리 떨어져 적을 바라봤다.
“저건!”
황보만청이 놀라 소리를 질렀다.
자신의 아들과 똑같이 생긴 자가 한빈과 마주하고 있으니 화경의 고수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황보만청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에 업힌 아들을 바라봤다.
그때 한빈의 목소리가 울렸다.
“저자는 이 공자를 본뜬 인피면구를 쓰고 있으니 흔들리지 마시죠.”
한빈에 목소리에 황보만청은 그제야 너덜거리는 인피면구를 볼 수 있었다.
황보만청이 둘의 대결에 끼어들어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줄을 잡은 사내의 왼손이 기관 장치를 발동시키려는 듯 꿈틀했다.
한빈이 재빨리 몸을 날렸다.
‘전광석화’
‘일촉즉발’
‘구걸십팔보’
한빈은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사내에게 짓쳐 들어갔다.
하지만,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오른손에 잡은 검으로 한빈의 공격을 받았다.
끼긱!
검끼리 긁히는 소리가 기분 나쁘게 통로에 울려 퍼졌다.
순간 상대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밑천이 드러났군? 네놈의 정체는 나중에 다시 와서 밝히도록 하지.”
한빈이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상대는 끝까지 자신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아니라고 믿는 것 같았다.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그건 네 마음대로 하고 지금부터 내 밑천을 보여 줄게. 기대해!”
순간 한빈이 용린검법의 초식을 추가했다.
‘허장성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