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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53화 (153/621)

153화. 대국(大局) (3)

“끄응…….”

바로 앞에서 다시 들려오는 기척에 한빈은 발길을 멈췄다.

한빈은 석벽에 몸을 바짝 대고 조심스럽게 방을 바라봤다.

순간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눈앞에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주변에는 핏물이 얼룩져 있었다.

그 핏자국을 따라 고개를 돌려 보니 한빈이 있는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상처를 입은 곳은 다른 장소.

그곳에서 이 방까지 몸을 끌며 피신을 했다는 말이었다.

누군가에게 쫓겨 이 방까지 왔다라?

상태를 보면 치명상을 입은 것 같았다.

한빈은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적인지 아군인지 아직은 구분이 안 되었던 것이다.

한빈이 눈매를 좁히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은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빈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발소리의 주인공은 분명히 황보만청이었다.

한빈이 중간중간 남긴 흔적을 보고 찾아온 것이다.

황보만청이 한빈의 곁으로 다가오자 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쪽에 사람이 있습니다. 복장으로 봐서는 황보세가의 사람입니다.”

“고맙네.”

짧게 답한 황보만청이 안쪽을 살피기 시작했다.

스윽.

고개를 내민 순간 황보만청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뒷모습이 마치 둘째와…….”

황보만청은 말을 맺지 못하고 석실 바닥에 쓰러진 자를 향해 다급히 달려들었다.

타다닥.

한빈은 재빨리 손을 내밀어 그를 말렸다.

“어르신,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탁.

그는 한빈이 내미는 손을 뿌리치고 쓰러진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아마 이것은 아비로서의 정일 것이다.

황보만청은 사내를 상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황보만청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쓰러져 있는 사내는 자신의 둘째 아들인 황보영우였다.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그였다.

그런데 피떡이 되어서 이런 곳에 쓰러져 있다니?

놀람도 잠시 황보만청은 그의 혈도를 찍었다.

픽! 픽!

피를 쏟고 있는 황보영우의 상처를 지혈하기 위함이었다.

황보만청은 벌어진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그를 일으켜 세웠다.

뒤쪽에서 바라보던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외모는 황보영우가 맞았다.

한빈은 조용히 가서 황보만청에게 급창약을 건넸다.

“어르신, 이걸로 처치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맙네.”

황보만청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한빈에게 급창약을 받았다.

그는 뚜껑을 연 후 끈적이는 급창약을 황보영우의 상처에 펴 바르기 시작했다.

급창약이 벌어진 상처를 메우자 흘러나오는 피가 멈췄다.

응급처치를 끝낸 황보만청은 품에서 단약 하나를 꺼내 황보영우의 입속에 밀어 넣었다.

쓰윽.

그러고는 황보영우를 자리에 앉혔다.

아직 말은 못 하지만, 지금의 처치 덕분에 황보영우는 겨우 앉아 있을 수는 있었다.

황보만청은 지체 없이 그의 등에 손바닥을 대었다.

아무래도 지금 털어 넣은 단약은 황보세가의 영단인 것 같았다.

황보만청은 황보영우가 영단을 흡수하는 것을 도우려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황보만청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호법을 부탁하네! 내 이 은혜는 잊지 않을테니.”

“알겠습니다. 이건 나중에 셈하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월아를 왼손으로 잡고 석실 입구에 섰다.

언제라도 발검하겠다는 듯 월아를 쓰다듬는 한빈은 다시 초식을 운용했다.

‘전광석화.’

적이 나타나면 바로 베어 버리겠다는 것이었다.

* * *

한빈이 호법을 서기 시작한 지 한 시진.

주변을 경계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밀 통로에는 쥐조차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한빈은 현 상황에 대한 추리를 이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결론은?

기관의 형태로 보면, 아마 이곳으로 향하는 통로도 여러 개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누군가와 싸우고 이곳으로 도망쳤다는 것이 맞았다.

그렇다면 이 공자 황보영우와 싸운 것은 누구일까?

그것은 차차 밝혀내야 할 일이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휴우…….”

고개를 돌려 보니 황보만청이 황보영우의 등에서 손바닥을 떼고 있었다.

진기를 인도하며 영단의 효용을 녹이는 데 성공한 듯싶었다.

한빈이 막 그에게 가려 할 때였다.

황보만청이 한빈에게 손바닥을 보이며 작게 외쳤다.

“오지 말게!”

“어르신 무슨 일이…….”

한빈은 말을 잇지 못했다.

황보만청의 낯빛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일렁이는 횃불에 비친 그의 얼굴은 붉었다.

그런데 지금은 창백하기만 했다.

황보만청이 어깨를 움찔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피를 토했다.

울컥.

바닥에 쏟아진 피는 군데군데 검은색 핏덩이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독이 분명했다.

순간 한빈은 머릿속에 앞으로 벌어질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한빈은 매섭게 눈을 뜨며 주변을 살폈다.

이 함정은 황보세가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한빈과 하북팽가까지 옭아 넣을 함정이었다.

한빈 혼자 이곳에서 탈출한다고 할지라도 황보만청은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장담컨대 이 사건을 계획한 적은 황보세가에 남아 한빈을 원흉으로 몰아넣을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생각 못 한 것이 있었다.

이곳에 다른 누구도 아닌 실력의 구 할을 숨기고 있는 한빈이 있다는 점이었다.

단순한 아군을 넘어서 혈맹을 만들 기회를 줬으니 상대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굳이 정답을 말하라면?

한빈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린 한빈은 조심스럽게 황보만청에게 다가갔다.

황보만청이 다시 외쳤다.

“오지 말고 거기 있게! 우리 가문의 첫째를 부탁하네.”

아무래도 자신과 둘째의 목숨은 포기한 듯한 황보만청이었다.

무슨 독일까?

생각해 보면 정답을 찾아내기 힘든 것도 아니었다.

지금 그의 증세는 하남정가 가주인 정무룡과 별반 차이가 없었으니까.

경지가 높을수록 독은 더욱 격렬하게 반응하기 마련이었다. 황보영우의 진기를 이끌다가 독기가 빨려 들어왔음이 분명했다.

지금 자신의 생명을 포기할 만큼 독 기운이 거센 것은 황보만청의 경지가 정무룡보다 높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품속에서 단약 두 개를 꺼냈다.

하남정가의 사건 이후 장자명에게 부탁해서 만든 특제 해독단이었다.

이 해독단은 하남정가의 가주 정무룡을 치료했던 것보다 몇 배의 효과를 지닌 해독약이었다.

한빈이 조용히 다가가다 황보만청이 다시 소리를 질렀다.

“오지……!”

하지만, 그는 말을 맺지 못했다.

한빈이 그의 입에 해독단을 넣었기 때문이다.

툭.

한빈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르신, 대주천을 돌리십시오. 미리 말하지만, 공짜는 아닙니다.”

“…….”

황보만청이 아무 말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잠시 그의 시선은 황보영우를 향했다.

하지만, 한빈은 벌써 황보영우의 옆에 가 있었다.

황보만청이 운기를 하며 한빈을 바라봤다.

그가 보기에 한빈의 움직임은 역시 강북 제일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황보영우의 입에 단약을 털어 넣고 등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그 모습에 황보만청의 입술이 달싹였다.

하지만, 입을 열지는 못했다.

해독단의 힘을 빌어 독을 내모는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입을 연다면 한빈이 준 해독단도 무용지물이 될 터였다.

황보만청은 아무 말 없이 한빈이 자기 아들을 치료하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과연 해낼 수 있을까?

자신도 이 꼴이 되었는데 하북의 사 공자가 아들의 독기를 치료한다라?

그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꼴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황보만청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에서 살아 나간다면?

한빈에게 어떤 방법으로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게 된다.

그는 자신과 아들을 구해 준 한빈에게 어떤 대가라도 치르리라 결심했다.

순간 황보만청의 눈이 커졌다.

서서히 독 기운이 옅어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마주 본 황보영우의 혈색도 돌아오고 있었다.

‘혹시 화타의 환생?’

황보만청은 눈을 크게 뜨고 한빈을 바라봤다.

그의 착각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한빈이 아니었다면 황보영우를 단시간에 치료할 사람은 없었다.

한빈은 지금 황보만청이 봤다면 까무러칠 치료법을 쓰고 있었다.

혈맥이 미약하게 뛰는 황보영우에게 해독단을 스스로 흡수하라고 하기에는 무리였다.

한빈도 황보만청과 마찬가지로 진기를 이끌고 있던 차였다.

문제는 그 독기가 한빈의 손바닥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는 것이었다.

점점 차오르는 독기에 회복의 효용이 저절로 발휘되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인급 초식 기사회생이었다.

한빈은 천산혈랑과의 혈투 마지막에 기사회생의 효용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당시를 더듬어 보면 천산혈랑의 상처도 아물었었다.

검으로 인한 상처와 독으로 인한 손상이 다를까?

같다면 같을 수도 있고 다르다면 다를 수도 있었다.

한빈은 그것을 시험해 보기로 한 것이다.

한빈은 황보영우의 등 쪽에 난 상처 깊숙이 오른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기사회생의 초식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황보영우의 얼굴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황보영우의 상태가 적당히 회복되자 한빈은 그의 등에서 손을 뗐다.

그때였다.

통로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끼익.

마치 바닥에 쇠를 긁는 듯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울렸다.

좌선한 상태로 운기 조식하던 황보만청이 눈썹을 꿈틀대자 한빈은 말했다.

“제가 살펴보겠습니다.”

“…….”

황보만청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빈이 옷깃 스치는 소리만 남기고 사라졌다.

사사-삭.

사라지는 한빈의 상태를 살핀 황보만청은 자신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후생가외(後生可畏)라 했던가?

무의 끝을 보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던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때로는 뒤도 돌아봐야 하는 법이었다.

한빈이 사라지고 차 한 잔 마실 때가 되자 그도 눈을 떴다.

황보만청은 평상시 무력의 오 할을 회복했다.

그때였다.

옆에 있던 황보영우가 쓰러졌다.

털썩.

쓰러지며 바닥에 핏덩이를 토해 냈다.

쿨럭.

그 모습에 황보만청은 안도의 숨을 삼켰다.

“휴우.”

황보영우의 혈색이 완전히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마지막 독을 몰아내고 탈진한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멀리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챙! 챙!

황보만청은 눈매를 좁혔다.

황보만청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아들을 등에 업었다.

여기에 놔두고 갈 수도 없는 일이고 한빈의 위기를 그냥 두고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선택은 아들을 업고 한빈이 있는 곳까지 가는 것이었다.

* * *

한빈은 흑의의 복면인과 검을 맞대고 있었다.

벌써 이십 합이 넘게 복면인과 겨루고 있는 중이었다.

문제는 구걸십팔보와 전광석화의 효용을 완벽하게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 한빈과 복면인이 대결을 펼치는 장소가 그만큼 비좁았기 때문이었다.

복면인이 말했다.

“꽤 하는군.”

복면 뒤에서 그의 입술이 비릿하게 꿈틀대는 것만 같았다.

한빈도 마주 웃으며 답했다.

“그건 내가 할 말이지. 언제까지 실력을 숨길 거지?”

“네가 실력을 드러낼 때까지.”

“오호, 좋은 생각이군. 누가 밑천을 먼저 드러낼지 한번 볼까?”

한빈은 복면 사이로 드러난 상대의 눈을 바라봤다.

시선에서도 마기가 느껴진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마기라는 것이 전에 대결했던 잔혈마도와는 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마교와는 다른 마기를 풍긴다라?

한빈은 복면인이 마교인은 아닐 것이라 추측하고 있었다.

과연 복면인의 정체는 무엇일까?

한빈은 바로 의문을 지웠다.

어차피 상대를 굴복시킨 후 물어보면 될 터였다.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을 운용했다.

‘쾌검난마!’

순간 복면인의 검과 맞닿은 한빈의 검이 부르르 떨렸다.

드르륵, 드르륵.

두 검 사이에 진동이 생기며 묘한 울림을 만들어 냈다.

한빈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검이 자꾸 칭얼대네.”

“네 검이 칭얼댄다고?”

복면 사이로 드러난 눈썹이 꿈틀대자 한빈이 슬쩍 시선을 월아에게 돌리며 말했다.

“이 승부가 지루하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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