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대국(大局) (2)
한빈이 잡은 백색 돌에 푸른 기운이 일렁이자 황보만청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여기에서 그냥 두자는 말인가?”
“네, 맞습니다. 천중을 떠나면 영원히 못 돌아올 것 같으니 여기서 두겠습니다.”
이것은 한빈의 진심이었다.
한빈은 이것이 기관진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관진식은 태풍과 같다.
전생에 한빈의 친우가 해 줬던 말이 있다.
태풍이 불어온다면 가장 안전한 곳은 과연 어디일까?
태풍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면 좋겠지만, 가까이 있다면 가장 안전한 곳은 바로 가장 가운데일 것이다.
즉, 태풍의 눈을 말하는 것이다.
이곳 바둑판 위에서는 바로 천중이고 말이다.
전생에 왔을 때는 이미 망가진 후였지만, 지금은 기관이 살아 있는 상태였다.
한빈의 표정을 본 황보만청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허허, 자네가 겁을 낸다고?”
이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황보만청이 보기에 누구보다 치밀하고 누구보다 자신을 철저히 감추는 것이 한빈이었다.
그런데 겁이 난다 그러니 이해가 안 되었다.
그 웃음에 한빈이 넉살 좋게 웃으며 답했다.
“네, 저 원래 겁이 많습니다. 가주님.”
“믿어지지 않는군.”
“원래 겁이 많은 사람이 오래 사는 법입니다.”
“그렇다고 치고, 그런데 정말 하얀 돌로 괜찮겠는가?”
“괜찮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한빈이 손가락 하나를 펴자 황보만청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문제인가?”
“제가 바둑의 규칙을 모릅니다. 그냥 제 규칙대로 둬도 되겠습니까?”
“모르면 내가 가르쳐 주지. 바둑에서 승부가 중요한 건 아니니 말이네.”
“네,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두시지요.”
“그럼 두겠네.”
고개를 끄덕인 황보만청이 손을 뻗었다.
휙!
검은 돌이 우측 아래 화점에 정확히 꽂혔다.
마치 자석이 끌어당기듯 바닥이 검은 돌을 빨아들이는 모양새였다.
팅!
쇳덩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커다란 종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힐끔 고개를 돌려 황보만청을 바라보니 그도 신기하다는 듯 동굴 내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이 백색 돌을 던졌다.
획!
팅!
다시 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한빈의 바로 앞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한빈은 바로 앞에 돌을 던진 것이다.
그 모습에 황보만청이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귀퉁이에 있는 화점에 돌을 놓은 것은 상대를 배려해서였다.
하수를 가지고 놀 방법은 많았지만, 어린 후기지수를 놀릴 생각이 없었기에 최대한 정석대로 둔 것이었다.
그런데, 한빈은 돌을 천중 근처에 둔 것이었다.
뭐지?
황보만청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한빈이 말했다.
“어서 두시지요.”
“알겠네.”
황보만청이 다시 돌을 던졌다.
좌측 아래 화점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다시 돌을 앞에 던졌다.
황보만청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장난을 하자는 건지 바둑을 두자고 하는 건지 몰랐기 때문이다.
한빈의 기괴한 행동은 계속 이어졌다.
팅, 팅.
한빈이 네 번째 놓은 돌을 본 황보만청이 물었다.
“지금 뭐 하자는 것인가?”
“제가 바둑판 위에서 하는 놀이는 오목밖에 몰라서요.”
“오목이라…….”
황보만청은 한빈이 놓은 돌을 바라봤다.
네 개가 나란히 바둑판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한빈이 말했다.
“같은 바둑판 위라도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면 이런 이상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긴 겁니까?”
“흠.”
황보만청은 자신의 주위를 둘러봤다.
분명 바둑판 위가 맞았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협상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바둑판은 황보세가이고 이 돌은 자네와 나라는 것인가?”
“뭐, 비슷합니다. 저희는 하나의 원칙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의 원칙이라…….”
“네, 저는 가주님과 제게 공통으로 적용될 원칙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한빈의 말에 황보만청은 웃었다.
흔히 인생을 바둑판과 같다 한다.
바둑은 인생이면서 전쟁이었다. 저 어린 후기지수는 인생과 전쟁의 원칙이 서로에게 공평하게 적용되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화경의 고수인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라?
당돌하게 느껴지면서도 왠지 기분이 좋았다.
황보만청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강의 뒤 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내는 게 당연하다고 했는가…….”
황보만청은 말끝을 흐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가주님은 아직 앞 물결이 아니십니다. 이렇게 정정하시니 앞 물결을 밀어낼 뒤 물결이 맞지요.”
“하하. 사람 기죽이는 기술만 있는 줄 알았더니 상대방의 기분을 맞춰 주는 재주도 있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야기 전에 원칙부터 정하시지요.”
“자네가 먼저 말해 보게.”
“같이 얻은 것은 같이 나눴으면 좋겠습니다.”
“하북팽가와는 강북 오대세가로서 늘 같이해 왔지. 그런데 자네가 하는 말은 그 원칙을 지키자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다시 약속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
“하북팽가가 아니라 저와의 관계를 말씀드린 겁니다.”
“가문 대 가문이 아니라 자네와 약속해 달라?”
“네, 그렇습니다”
“오호. 자신감이 넘쳐서 보기 좋군.”
“젊으니까요. 그럼 이 대국으로 얻은 것은 나누는 겁니다. 가주님.”
“약속하지. 나도 황보세가가 아니라 내 개인의 입장에서 자네와 약속하겠네.”
“감사합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대국을 시작하겠나?”
“네.”
“자네도 느꼈겠지.”
“네, 느꼈습니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황보만청이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한빈도 마주 웃었다.
이 동굴 자체가 거대한 기관의 일부인 것 같았다.
중요한 것은 바둑판 위의 위치에 따라 나는 소리가 다르다는 점이었다.
한빈과 황보만청은 그 소리에 따라 이 기관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했다.
한빈과 황보만청은 조심스럽게 바닥 위에 돌을 놓기 시작했다.
팅, 팅.
돌 놓는 소리가 마치 악기 소리처럼 귓가를 간지럽혔다.
얼마나 지났을까.
황보만청이 말했다.
“알겠는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빈이 고개를 저었다. 이것은 반 정도는 사실이었다.
황보만청보다 바둑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었고 기관진식에 있어서도 깊이 아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전생에 기억 덕분에 이렇게 보조를 맞출 수 있는 것이었다.
지금 한빈이 의지할 것은 경험과 숙련된 감각이었다.
그 감각이 지금 황보만청의 방법이 맞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당황하지 않고 보조를 맞추는 한빈의 모습에 황보만청이 빙긋 웃었다.
“자네는 내가 말하는 곳에 동시에 돌을 놓으면 되네.”
“알겠습니다.”
황보만청이 돌을 던지며 외쳤다.
획.
“삼, 삼.”
한빈이 재빨리 황보만청이 말한 바닥에 돌을 놓았다.
팅.
한빈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황보만청이 돌을 놓은 곳과 한빈이 돌을 놓은 곳의 소리가 똑같았다.
순간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드드득!
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황보만청이 말했다.
“계속하지. 칠, 십.”
“네, 어르신.”
휙.
팅.
“정확하군. 그 암기술은 대체 누구에게 배웠는가?”
“말해도 믿지 못하실 겁니다.”
“그래도 말해 보게.”
“독학했습니다.”
“허.”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말해도 믿지 못하실 거라고 말입니다.”
한빈이 어색하게 웃었다.
한빈의 말은 진심이었다.
허공에 뜬 용린검법이 사부였으니까.
황보만청은 아직도 포기 못 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독학은 못 믿겠고 사천당가에서 배웠다고 하면 어느 정도 이해는 되겠군. 그런데 하북팽가에 사천당가가 기술을 전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어르신이 보기에도 사천당가의 암기술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게 보이는군.”
“계속하시죠, 어르신.”
“이제부터는 네 곳을 동시에 찍어야 하네. 내가 두 곳, 자네가 두 곳. 할 수 있겠나?”
“네, 해 보겠습니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발백중 덕분에 손에 잡히는 것만큼은 정확한 곳에 꽂을 수 있는 한빈이었다.
두 개가 아닌 네 개를 한 번에 맞히라고 해도 관계없었다.
팅. 팅.
바닥에서 계속 소리가 울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동굴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드드득.
바닥이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한빈은 황보만청의 눈을 바라봤다.
그도 이런 변화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황보만청이 말했다.
“이번부터는 네 개의 점을 찍어야 하니, 내가 미리 불러 주고 숫자를 세겠네.”
“알겠습니다.”
“숫자를 세면……. 사, 오를 찍게. 하나, 둘, 셋!”
휙!
팅.
……팅.
순간 바둑판 위에는 한빈과 황보만청이 놓은 돌로 가득 찼다.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소리가 바닥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드드득.
바닥이 천천히 돌아가다가 멈췄다.
툭.
한빈은 눈을 크게 떴다.
바닥이 돌다 멈추자 벽 한쪽에서 통로가 나타난 것이다.
한빈이 말했다.
“가시죠.”
“…….”
황보만청은 아무 말 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알았는가?”
“무엇을 말입니까? 가주님.”
“이곳에 비밀 공간이 있다는 것을 말이네.”
“그것을 제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바둑 두다가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뿐이죠.”
“자네 사부가 홍칠개 어르신이라고 하던데 맞는가?”
“네, 맞습니다.”
“혹시 자네, 구파일방의 숨겨 둔 고수가 아닌가?”
“아닙니다. 하북팽가의 막내가 맞습니다.”
“허허, 아무리 우연이라지만, 이렇게 맞아떨어지니 내가 당황스럽군.”
“일단 안쪽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군. 내가 앞장서겠네. 위험할지 모르니 자네는 뒤로 물러나 있게.”
“감사합니다, 어르신.”
황보만청이 앞장서며 허리에 찬 검집을 잡았다.
한빈도 마찬가지로 뒤쪽을 경계하며 월아를 잡았다.
좁은 통로를 지나자 제법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통로를 지나며 살짝 긴장했지만,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공간을 둘러본 한빈이 물었다.
“황보세가에 이런 공간이 있었습니까?”
“나도 처음 보는 곳이라네. 아마도 자네의 도움이 없었으면 발견 못 했을 테지.”
“설마요.”
“자네가 아니라면 사천당가의 늙은이를 데리고 왔어야 통과했겠지.”
황보만청은 한빈을 보며 씩 웃었다.
아마도 한빈의 백발백중 솜씨를 칭찬하는 것 같았다.
한빈도 알고 있었다.
황보만청이 문제를 푼 방식을 보아, 여러 명이 차례대로 돌을 정확히 던져 넣는다면 잠금 해제가 가능한 듯했다.
문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무게에서는 잠금이 풀리지 않는 방식이었다. 이 때문에 돌을 던지는 이는 여러 명이 될 수 없었다.
많아야 셋이 이 기관진식을 풀어야 하는데, 이런 정확하고 빠른 솜씨를 가진 것은 사천당가밖에 없으니 황보만청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앞에 널따란 공간은 또 다른 공간과 이어져 있었다.
모든 공간을 합친다면 커다란 미로에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한빈과 황보만청이 세 번째 방을 지날 때였다.
어디선가 신음이 들려왔다.
끄응.
묘한 소리에 한빈이 발소리를 죽였다.
한빈은 힐끔 옆을 보며 황보만청에게 신호를 보냈다.
자신이 앞장서겠다는 말이었다.
그가 화경의 고수일지는 몰라도 은밀함에 있어서는 한빈에게 비할 바가 안 되었다.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을 운용했다.
‘전광석화.’
‘구걸십팔보.’
한빈이 바닥 스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사사-삭.
그 모습에 황보만청이 혀를 찼다.
멀리서 지켜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그 움직임이 표홀하기 그지없었다.
황보만청은 자신이 낯선 공간에 있다는 것도 잊은 채 한빈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저놈에게 누굴 붙여 주는 것이 좋을까?’
* * *
미로처럼 된 공간에서 신음의 주인공을 찾기란 어려웠다.
다행인 것은 미로의 중간에 어떤 함정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다시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왔다.
“끄응…….”
한빈이 조심스럽게 미로를 가로질렀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한빈은 속도를 줄였다.
동시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한빈의 앞쪽에 황보세가와 강북 오대세가를 뒤집어 놓을 무엇이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