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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51화 (151/621)

151화. 대국(大局) (1)

데구루루.

탁자 위에서 흔들리는 물체를 본 황보만청이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바둑알이 아닌가?”

“네, 맞습니다.”

한빈의 대답에 황보만청이 눈을 빛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바둑알 하나를 잡았다.

순간 느껴지는 한기.

황보만청의 눈이 커졌다.

하루도 바둑알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지만,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마치 검신을 만지는 듯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흘러들어 왔다.

바둑알을 손끝에서 놀리던 황보만청이 물었다.

“그런데 대체 무엇으로 만든 것인가?”

조금 전 일어났던 사건을 잊은 듯 황보만청의 목소리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한빈이 검은 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검은빛이 도는 흑철에 무쇠보다 단단한 물질을 섞었습니다.”

“혹시…….”

“네, 그 혹시가 맞습니다. 흔히 묵철이라 부르는 놈이죠.”

“묵철이라……. 그러면 이 흰색 돌은 묵철에 은을 섞은 것인가?”

“네, 맞습니다. 확실히 안목이 높으시군요.”

“험, 묵철로 만든 바둑알은 처음 보는군.”

“저도 처음 만들어 봤습니다.”

“허허. 묵철이라면 다루기 힘들 텐데 누구에게 부탁을 했는가? 그런 장인이라면 나도 탐이 나는군.”

“그건 제 영업 비밀입니다, 가주님.”

“오호라. 거래처도 자네의 숨겨 둔 한 수 중 하나라는 건가?”

“대충 그렇습니다.”

한빈이 어색하게 웃자 황보만청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이것을 내게 보여 주는 이유가 뭔가?”

“아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어르신과 대국을 하며 얘기를 마저 끝내고 싶습니다.”

“그럼 바둑판을 내오라 하겠네.”

“저는 이 바둑알에 맞는 바둑판을 원합니다.”

한빈이 묵철로 만든 바둑알을 가리켰다.

“흠.”

황보만청이 수염을 쓸어내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그는 고민에 빠진 듯 잠시 머뭇거렸다.

마땅히 생각나는 바둑판이 없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한빈이 바둑알을 쓸어 담았다.

쓱.

황보만청이 놀란 듯 물었다.

“바둑알은 왜 다시 쓸어 담는 것인가?”

“아무래도 대국을 할 마음이 없으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험, 알았네. 알았어.”

“마땅한 바둑판이 있습니까?”

“아니, 있네. 정확히는 바둑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황보만청이 살짝 말끝을 흐리자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답했다.

“이 바둑알과 어울리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습니다.”

“그럼 내 식사 후 준비하겠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런데 말이네.”

황보만청이 힐끔 한빈의 뒤쪽을 바라봤다.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 아이는 자네의 시녀인가?”

“네, 맞습니다. 왜 그러시죠? 가주님.”

“내 잠깐 몇 가지 물어봐도 되겠는가?”

“마음대로 하시죠.”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슬쩍 옆으로 비켜섰다.

순간 황보만청과 설화가 마주 보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황보만청이 활짝 웃으며 설화를 바라봤다.

“가만 보니 일을 잘하더구나. 아이야.”

“…….”

설화는 무슨 말인 듯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이 더 마음에 든다는 듯 황보만청이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달에 은자 열 냥 어떠하냐?”

“…….”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자 황보만청이 마치 마음씨 좋은 동네 할아버지처럼 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달에 은자 열 냥이면 내 밑에서 일해 보겠는가? 가만 보자니 하북팽가에 얽매인 것 같지는 않고.”

황보만청의 말에 옆에 서 있던 한빈은 쓴웃음을 삼켰다.

아무래도 설화의 움직임까지 지켜본 모양이었다.

설화는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검을 바꿔 치기 하고 모두를 미행하며 동선을 파악했다.

그 모든 것을 지켜봤다면 설화의 실력을 탐내는 것은 당연할지도 몰랐다.

황보만청이 기대에 부푼 얼굴로 답을 기다리자 설화가 말했다.

“싫은데요.”

설화가 고개를 저었다.

황보만청이 눈썹을 꿈틀했다.

그것도 잠시 황보만청이 환하게 웃으며 다시 말했다.

“그럼 은자 스무 냥은 어떠냐?”

“싫은데요, 할아버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설화가 답하자 황보만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 한숨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설화가 옆을 보며 말했다.

“배고파요, 공자님.”

설화가 뒤쪽으로 슬며시 빠지자 한빈이 다시 황보만청의 앞에 섰다.

“설화가 배고프다고 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허허, 그리하게.”

“그러면 식사 후 뵙겠습니다.”

“내 자네에게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네.”

“말씀하시지요, 가주님.”

“저 아이의 이름이 설화라고 했지. 대체 얼마나 주고 고용한 아이인가?”

“일주일에 당과 세 개입니다.”

“…….”

황보만청은 아무 말 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은 마지막으로 포권한 뒤 황보만청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한빈이 완전히 사라지자 황보만청이 옆을 힐끔 바라봤다.

그곳에는 황보서현이 있었다.

“동생, 지금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지?”

“정확히 들으신 게 맞아요, 가주 오라버니.”

“어이가 없군, 내 은자 스무 냥이 당과 세 개에 씹히다니!”

“씹히는 게 뭡니까? 체면을 지키시죠. 그리고 정확히는 당과 세 개가 아니죠.”

“지금 세 개라 하지 않았나?”

“일주일에 세 개니 달로 치면 열두 개가 넘어요. 계산은 정확히 하셔야죠.”

“역시 집법당주다워. 대단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오라버니.”

“계산이 정확하다는 이야기야.”

“칭찬으로 듣죠.”

“그럼 나도 계산 하나 마무리 짓겠네.”

“무슨 계산이요?”

“오늘 일에 내가 나서게 만들었으니 집법당의 예산을 올려 주겠다는 약속도 없던 걸로 하지.”

“아, 가주 오라버니! 남아일언 중천금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무슨 가주가 변덕이 죽 끓듯 말을 바꿔요?

“나는 남자이기 전에 가주일세. 가주에 남녀가 무슨 상관인가? 가문의 이익만 남으면 되지.”

“너무하시네요.”

“나는 여기 남아서 생각 좀 할 테니 동생은 나머지 일을 마무리 짓게. 하는 거 봐서 올려 주도록 하지.”

“무슨 생각을 하시게요?”

“가장 중요한 것은 아들놈 팔을 지키는 것일세. 그러고 나서 다음 일을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나?”

“그럼 차라리 팽가의 넷째를 제압해서 약속을 받아 내시지…….”

황보서현은 말끝을 흐렸다.

막상 말은 했지만,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황보서현도 심상치 않은 한빈의 첫인상 때문인지 그가 자신의 친동생 같았다.

갈피를 못 잡는 황보서현의 표정을 본 황보만청이 웃었다.

“동생은 놈을 너무 만만히 봤군.”

“만만히 보다니요? 전 그런 적 없는데요.”

“놈을 이길 수는 있어도 잡을 수는 없어. 죽일 수는 있어도 굴복시킬 수는 없고.”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나도 비밀일세.”

황보만청은 한빈이 사라진 자리를 그윽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가 한 말은 진심이었다.

숨겨 둔 수가 제법 있어 보이지만, 자신의 경지를 뛰어넘을 수는 없는 법.

무력으로는 자신의 경지를 뛰어넘기에 한참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한빈의 경공이 문제였다.

도망치기로 마음먹는다면 강북에서 한빈을 잡을 자는 아무도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이 한빈을 지켜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잠시 상념에 잠긴 황보만청을 황보서현의 목소리가 깨웠다.

“제가 보기에는 초절정 정도로 보이던데 오라버니가 감탄할 만큼 그렇게 대단한 건가요? 물론 내공을 다루는 솜씨는 남달랐지만요.”

황보서현이 고개를 갸웃하자 황보만청이 웃었다.

“하하, 진짜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은 놈의 발과 입이지.”

“발과 입이요?”

황보서현이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둘 사이에는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이 어색해질 때쯤 황보만청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짝!

그 소리에 놀란 황보서현이 물었다.

“오라버니, 갑자기 손뼉은 왜 치세요?”

“우리 가문에 저놈과 어울릴 만한 아이가 있던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니다. 내가 직접 알아봐야겠군.”

황보만청이 환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짱을 낀 황보만청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하늘 위에 선을 그려 봤다.

황보만청은 그렇게 그린 가상의 바둑판 위에 돌을 하나씩 얹어 봤다.

그중에는 흰색과 검은색 돌뿐 아니라 붉은색 돌도 있었다.

물론 그 돌은 한빈이었다.

* * *

한빈과 황보만청이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두 시진 후였다.

황보만청이 안내한 곳은 황보세가의 전각과 뒷산을 잇는 동굴이었다.

동굴 입구의 천장에는 종유석이 고드름처럼 매달려 있었으며 내부에는 한기가 맴돌았다.

한빈이 동굴 입구를 쓱 훑어보고는 말했다.

“제가 찾던 바둑판과는 거리가 좀 먼 것 같습니다, 가주님.”

“보고 나면 실망하지 않을 터이니 마음 놓게.”

“꼭 인질로 끌려가는 느낌인데, 제 착각이겠죠?”

“표정을 보니 두려움은커녕 호기심만 가득한데 내가 잘못 본 것인가?”

“잘 보셨습니다.”

“말투가 내가 이리로 데려올 것을 알았다는 것 같군.”

“가주님을 속이지는 못하겠습니다. 황보세가에서 가장 신기하다는 곳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럼 잘됐군. 직접 확인해 보게.”

황보만청이 앞쪽의 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철문이 동굴을 가로막고 있었다.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두께조차 가늠이 안 되는 철문이었다.

아마 저 너머에 한빈이 찾는 곳이 있을 것이다.

한빈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보기만 해도 힘이 빠지네요. 저는 가주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시게나.”

황보만청은 철문의 앞으로 다가가 철문에 패인 홈을 잡았다.

황보만청은 아무렇지도 않게 철문을 옆으로 밀었다.

그 모습에 한빈은 입맛을 다셨다.

아무렇지 않게 여는 것처럼 보여도 황보만청의 발은 바닥을 한 뼘 이상 파고들어 갔기 때문이다.

열린 문틈으로는 커다란 공간이 보였다.

마치 연무장 하나를 옮겨 놓은 듯한 공간이었다.

황보만청이 그 공간을 가리키며 웃었다.

“하하, 이 정도면 되겠나?”

“…….”

한빈은 아무 말 없이 철문 뒤 공간을 바라봤다.

바닥에는 선이 그어져 있었다.

정확히 바둑판처럼 가로 열아홉 줄, 세로 열아홉 줄의 선이었다.

한빈의 표정을 본 황보만청이 천천히 선이 그려진 바닥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터벅터벅.

동굴이라서 그런지 묘한 울림이 전해졌다.

같이 중앙에 선 한빈이 말했다.

“천원에 섰군요.”

“맞네, 여기가 천원이지.”

황보만청이 살짝 발을 굴렀다.

퉁!

황보만청이 가리킨 곳에는 굵은 점이 찍혀 있었다.

바둑판으로 치면 여기가 정중앙인 천원이었다.

한빈은 주위를 둘러봤다.

천원을 중심으로 일정한 간격으로 여덟 개의 화점이 찍혀 있었다.

바둑판이 맞았다.

전생에 한빈은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물론 마교의 습격 이후 조사하기 위해서 왔었다.

하지만, 그때 이곳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강호의 곳곳에 흔적을 남겨 놓았고 누군가는 그것을 훼손했다면?

일단 미리 취하는 것이 맞았다.

적이 훼손할 정도로 신경 쓰이는 물건이라면 한빈에게는 이득이 분명하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한빈은 이곳에 오려 했다.

원래는 황보견우의 실수를 빌미로 이곳에 들어오려 했지만, 황보만청의 등장으로 더 편하게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이곳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이제부터 알아봐야 했다.

한빈은 품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여기 있습니다, 가주님.”

한빈이 전한 주머니 속에는 흑빛이 감도는 돌이 있었다.

“고맙네. 돌을 나눠 놨군. 그런데 나보고 흑돌을 잡으라는 이야기인가?”

황보만청이 어이없다는 듯 웃자 한빈이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네, 평생 하얀 돌만 잡아 보셨으니 이제는 검은 돌도 한번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을 마친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을 떠올렸다.

‘백발백중.’

‘일촉즉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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