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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50화 (150/621)

150화. 팔이 너무 안으로 굽으면? (3)

한빈의 눈동자에 황보견우의 표정이 비쳤다.

마치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는다는 듯 슬쩍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것은 마지막까지 한빈을 옭아 넣을 수 있다는 자만임이 분명했다.

한빈은 승부를 받아들이겠다는 듯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상대를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전생 귀검대 대주로서의 기억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당할 상황이었다.

여기서 무력으로 적을 제압한다고 해도 무림 공적으로 낙인찍히기 마련이었다.

사실 지금 이 위협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전생에 한빈도 이런 식으로 상대를 옭아 넣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상대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작정만 한다면 방법은 수천, 아니 수만 가지가 넘었다.

이렇게 대비할 수 있었던 것에는 운도 따랐다.

송경운이 숙소를 안내하며 깃발의 색을 말하지 않았다면 해결 방법은 다소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색약증이라는 것을 안 뒤 대처 방법이 수월해진 것이다.

한빈의 무표정한 모습이 눈에 거슬렸는지 황보견우는 다소 흥분한 듯 걸어왔다.

씩씩대며 다가온 그는 한빈의 곁을 지나며 말했다.

“뭐든 걸지.”

“나는 그걸 정하자는 이야기야. 대공자는 무엇을 걸 것인가?”

“네가 원하는 건 다 걸지!”

“그럼 일단 서명부터 하고…….”

황보견우가 한빈의 말을 잘랐다.

“그건 생략하지. 이 정도의 증인이면 계약서는 필요 없을 듯하군.”

말을 마친 황보견우가 콧김을 뿜으며 시녀의 시체가 있는 정자 쪽으로 걸어갔다.

한빈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증거, 저도 보고 싶군요. 확인하고 싶은 분은 모두 저를 따르시죠.”

한빈이 천천히 황보견우의 뒤를 쫓자 모두가 정자를 향해 걸었다.

그때였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뒤쪽에서 태산과 같은 기세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집중해 보면 태산이 아니라 해일과도 같은 기세였다.

모두가 그 기세에 몸을 움찔할 때였다.

기세의 주인이 사자후를 외쳤다.

“그만하거라!”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그 목소리는 자신이 허장성세를 사용해 지르는 사자후에 버금갔기 때문이다.

뭐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사자후의 주인공은 한빈을 지나쳐 정자 앞까지 다다랐다.

그러고는 황보견우를 막아섰다.

동시에 황보세가 식솔 모두가 외쳤다.

“가주님을 뵈옵니다!”

그 외침에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황보만청이라?

그는 한빈의 전생 기억에 있는 황보세가의 가주였다.

황보만청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황보견우를 바라봤다.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냐?”

“저는…….”

황보견우가 움찔하며 말끝을 흐리자 황보만청은 눈썹을 꿈틀댔다.

“대공자가 어린아이가 하는 장난이나 하라고 앉혀 놓은 자리더냐?”

“아, 아버님.”

황보견우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너는 가주의 자리가 놀고먹는 자리라 생각했느냐?”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버님.”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디에서부터 보았다는 것인지?

무엇을 보았다는 것인지?

모두가 호기심에 눈을 빛내고 있을 때 말을 마친 황보견우가 천천히 정자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웠다.

그 모습에 황보견우가 외쳤다.

“아버님, 그것은 증거…….”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가주 황보만청은 단검을 손으로 슥 문질렸다.

동시에 단검에 묻은 피가 송글송글 황보만청의 손끝에 모였다.

단검을 훑고 지나간 황보만청의 손가락의 끝에 피가 회전하며 동그랗게 모였다.

핏빛 구슬이 손가락 끝에서 휘도는 모습에 모두가 침을 삼키고 있을 때.

황보만청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툭.

핏빛 구슬이 된 핏덩이가 저 멀리 연못 속으로 떨어졌다.

팡!

순간 연못에는 거대한 물줄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마치 연못 위에 난을 그려 놓은 듯한 형상이 잠시 이어졌다.

그 모습에 모두가 입을 벌렸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위.

하지만, 한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턱을 어루만졌다.

그가 보여 준 경지는 분명 화경, 그중에서도 이 경 혹은 삼 경이었다.

전에 맞섰던 잔혈마도보다 고수이며 지금 막 화경에 들어선 하북팽가의 가주, 팽강위보다 한 수 위라는 이야기였다.

저 정도의 무위를 숨기고 있었다고?

이것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모두가 깜짝 놀랄 때 황보만청이 날이 선 목소리로 말했다.

“이 단검을 증거라 하려 했느냐?”

“그러니까…….”

황보만청의 날 선 목소리 때문인지 황보견우의 목소리가 햇볕을 본 두더지처럼 기어들어 갔다.

그 모습에 황보만청은 기세를 피웠다.

“정확하게 말을 해 보거라.”

“네, 맞습니다. 분명 증거가 맞습니다.”

황보견우가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답했다.

그 모습에 황보만청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단검이 누구의 것인지 잘 보거라.”

황보만청은 황보견우의 눈앞에 핏자국이 지워진 단검을 내밀었다.

황보견우가 당당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야 당연히 하북팽가의…….”

하지만, 단검에 새겨진 글자를 읽는 순간 황보견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황보견우의 시선은 단검에 새겨진 한 글자에 멈췄다.

-황(黃).

파르르 떨리는 황보견우의 눈동자.

그것도 잠시 황보견우의 시선은 답을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하지만, 정답을 찾기에는 그의 지혜가 미치지 못했다.

이 단검은 분명 한빈의 숙소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황보세가의 것일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계속 보고를 받았기에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수하 중 첩자가 있단 말인가?

혹시 동생 황보영우가 배신자?

한없이 흔들리던 황보견우의 눈동자는 단검이 부러지는 소리에 멈췄다.

탕!

경쾌한 소리가 정자 주변에 울려 퍼졌다.

황보만청은 부러진 단검을 황보견우의 앞에 던졌다.

팅!

단검은 청강석에 박혔다.

부르르 떠는 단검의 진동이 멈출 때쯤 황보만청이 말을 이었다.

“남의 칼을 뺏으려고 마음먹었다면 자기 칼이 빼앗길 수 있다는 것도 예상을 했어야 하지 않겠느냐?”

말을 마친 황보만청이 힐끔 한빈 쪽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한빈은 이전에 황보만청이 모두 봤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황보견우의 행동뿐 아니라 한빈의 행동도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문제는 한빈도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이제껏 감시만 했지 당해 본 적이 없는 한빈이었다.

갑자기 하룻강아지가 된 기분에 한빈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본 황보만청이 말했다.

“이 정도에서 멈출 수 없겠는가?”

“…….”

한빈이 아무 말 없이 황보만청을 바라봤다.

자신을 힘으로 누를 수 있는 자였다.

그런 고수가 지금 양해를 구하고 있다.

한빈은 뭔가 생각난 듯 힐끔 쓰러진 시녀의 시체를 바라봤다.

모두가 한빈의 시선을 따라 시녀의 시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한빈이 말했다.

“제 누명은 이쯤 해서 벗겨진 것 같지만,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생명은 어떻게 합니까? 저는 그 범인을 밝혀내야 할 것 같습니다.”

“흠.”

황보만청은 헛기침하며 시녀의 시체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한빈을 다시 한번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 정도의 무위를 보여 줬으면 분명 물러설 만도 했다.

그런데 한빈은 사냥개처럼 물고 놓지를 않는 것이었다.

얄미우면서도 한편은 하북팽가의 가주가 부럽다는 생각을 하는 그였다.

“마지막까지 벗기겠다는 것이군. 고얀 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한빈이 딴청을 부리듯 고개를 흔들었다.

“됐다!”

황보만청은 슬쩍 손을 저으며 시녀의 시체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가만 보니 그의 손에서 검은색 바둑알이 튕겨져 나갔다.

획!

검은색 바둑알은 시녀의 턱을 찍었다.

소리에 비해 타격음은 부드러웠다.

탁!

순간 시녀의 얼굴이 살짝 벗겨졌다.

그 벗겨진 틈으로 황보만청은 시녀의 피부를 뜯었다.

쫘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황보만청이 벗겨 낸 피부를 들어 보두에게 보여 줬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황보만청이 들고 있는 것은 누가 봐도 사람이 만든 물건이었다.

황보만청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이것은 인피면구다.”

황보만청의 목소리가 정자에 울렸다.

그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시녀가 죽은 줄 알았던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인피면구라고?”

“시녀가 죽은 게 아니었어?”

“저건 대체 뭐지?”

고개를 갸웃하던 이들의 시선이 모두 황보견우를 향했다.

“설마…….”

“그 설마가 맞는 것 같은데.”

“그럼 우리 대공자님이 모함을…….”

“그런데 저 시체는 뭐지?”

여기저기서 추측이 흘러나올 때 한빈이 말했다.

“얼굴을 보니 죽은 지 이틀은 되어 보이는군요. 냄새는 향낭과 약물으로 교묘하게 가렸고요.”

“이제 만족하는가?”

“어디선가 사 온 시체군요. 시녀의 살인에 대해서 더 추궁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자 가주 황보만청이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오늘 살인은 없었다!”

“…….”

모두는 아무 말 없이 황보만청을 바라봤다.

그가 다시 외쳤다.

“이 일은 불문에 부치고 지금부터 하북팽가의 사 공자와 독대할 테니 모두 밖으로 물러나거라!”

황보만청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모두의 귀에 송곳처럼 박혔다.

그들은 조용히 포권하며 물러났다.

이제 남은 것은 적혈맹호대와 설화 그리고 집법당주 황보서현이었다.

한빈이 말했다.

“제 사람도 물릴까요? 가주님.”

“그건 자네 마음이지.”

황보만청의 말에 한빈이 턱짓했다.

신호를 받은 소대섭이 적혈맹호대에 작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모두가 빠져나가자 설화도 낮은 목소리로 한빈에게 말했다.

“저도 나가 볼게요, 공자님.”

한빈이 막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황보만청이 설화를 보며 눈을 빛냈다.

“너는 남아도 좋다.”

“저는 괜찮다고요?”

설화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묻자 황보만청이 마치 기특하다는 듯 답했다.

“그래, 너는 남아도……. 아니 남아 있거라. 나도 집법당주를 이 협상의 증인으로 세울 테니, 너는 하북팽가 측의 증인이 되어라.”

황보만청의 말에 한빈이 설화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한빈의 오른쪽에 섰다.

한빈은 황보만청의 눈을 바라봤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본 그의 눈빛에 하늘의 구름이 비친다.

그 구름의 수만큼이나 많은 계산이 그의 머릿속에서 떠도는 것을 한빈은 알고 있었다.

가문에 대한 명예.

자식을 지키고 싶은 마음.

그리고 외부인인 하북팽가를 견제하는 마음마저 말이다.

한빈은 지금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야 함을 알고 있었다.

“원래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죠.”

“이해해 주니 고맙네.”

“그런데, 너무 안으로 굽으면 부러지게 마련입니다.”

“험. 이 일을 무마하는 조건으로 무엇을 원하는가?”

“저는 아무 욕심 없습니다.”

“거짓말이군.”

“어떻게 아셨습니까?”

“평생 상대의 수를 파악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던 나네. 절대 내 눈은 못 속이지.”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바둑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럼 제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요.”

“내놓게.”

“뭘 말입니까?”

“오행 패에 당장 서명해 주겠네.”

“그건 필요 없습니다.”

“필요 없다라…….”

“저는 가주님이 진심으로 저를 지지해 줄 것을 원합니다.”

“너무 추상적인 거 아닌가? 듣던 것과는 딴판이군.”

“물질적인 손해는 본인에게 청구할 예정입니다.”

“본인이라면?”

“왜 모른 척하십니까? 가주님.”

“알았네. 그건 알아서 하고. 내가 지지해 준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해 주면 되겠나?”

“뭐, 바둑 한 판 하시면서 얘기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바둑이라…….”

“바둑알은 제가 준비했으니 바둑판만 준비하면 될 것 같습니다.”

한빈은 품 안에서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것은 심미호에게 건네받은 물건이었다.

한빈이 정자 위에 탁자에 가죽 주머니를 내려놓자 묘한 소리가 났다.

철그렁.

그 소리에 황보만청이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손을 넣어 가죽 주머니 속 물건 몇 개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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