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팔이 너무 안으로 굽으면? (2)
설화의 등장에 황보견우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한빈이 마련한 반박의 근거가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자신의 시녀를 통해 결백을 주장할 것이 분명했다.
한빈의 반박으로 황보세가, 즉 자신 쪽 시녀의 주장은 묵살된 상황.
난데없이 나타난 한빈 측 시녀의 주장을 받아 줄 필요가 없었다. 황보견우는 어떤 이유를 대서든 새로 등장한 시녀의 증언을 묵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황보견우는 꽃향기를 맡은 꿀벌처럼 한빈의 반격을 기다렸다.
물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녀 하나를 데리고 송경운의 주장을 어떻게 뒤집어엎을지 감도 안 오는 상황.
황보서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의 수하들의 모습이 너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주인의 팔이 떨어지기 일보 직전인데 그들의 눈빛에는 한 점 불안감도 찾아볼 수 없었다.
황보서현은 자신도 모르게 적혈맹호대 대원 하나하나를 살폈다.
‘저건 뭐지?’
한참을 바라보던 황보서현은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불안감을 못 느끼는 것을 넘어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것은 주종 관계를 넘어선 무한한 신뢰였다.
모두가 제각각의 관점으로 한빈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한빈이 쓱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바로 송경운의 앞.
눈 깜짝할 사이에 송경운의 앞에 선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송 무사, 이제 붉은색 무복을 입은 자가 나 하나만은 아닐 텐데?”
한빈이 턱짓으로 설화를 가리켰다.
모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붉은색이 있긴 했지만, 전체가 붉은색인 한빈의 무복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다고 못 알아볼 색동옷이 아니었다.
그러나 송경운의 대답은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같은 붉은색은 맞죠. 하지만, 덩치가 다르지 않습니까? 사 공자의 덩치와 시녀의 덩치가 어떻게 같을 수가 있습니까? 멀리서 봐도 티가 납니다.”
“그렇지? 같은 붉은색이지만, 덩치가 다르지.”
“네, 맞습니다.”
“그 말은 덩치로 구분한 것이고, 설화와 내 옷의 색이 같다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왜 당연한 걸 자꾸 묻습니까?”
송경운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은 씩 웃으며 뒤로 돌아섰다.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집법당주님.”
“…….”
집법당주 황보서현은 눈만 껌뻑거렸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몰라도 황당할 뿐이었다.
설화가 입은 색동 경장과 한빈이 입은 붉은 무복이 같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송경운은 색이 같다는 한빈의 말에 계속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물론 해석은 하나였다.
그때 한빈이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딱!
비록 작은 소리지만, 한빈이 내는 소리는 묘하게 사람들을 긴장시켰다.
모두는 이번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소리에 맞춰 적혈맹호대 사이에 숨어 있던 장자명이 나왔다.
등짐을 진 채 조심스럽게 걸어온 장자명은 한빈과 황보서현 사이에 멈췄다.
장자명은 한빈의 지시를 기다리는 듯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한빈이 황보서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집법당주님, 이쪽은 하북 제일의 신의라 불리는 장자명 의원님입니다.”
한빈이 턱짓하자 장자명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의술로 밥 먹고 사는 장자명이라고 합니다. 사 공자가 소개했던 신의는 제게는 과분한 호칭이지요.”
“네, 안녕하세요. 장 의원.”
의원이라는 소개에 황보서현이 살짝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장자명도 다소 안심한 듯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부터 말씀드릴 것은 저를 포함한 일부 의원만 아는 병입니다.”
이것은 반 정도는 거짓이었다.
한빈이 말해 주기 전까지는 장자명도 알지 못하는 증세였다.
“병이라고요?”
살짝 놀란 듯 황보서현이 장자명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때 장자명이 손을 흔들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전염병은 절대 아닙니다.”
“그 병과 지금 상황과 무슨 관계지요?”
“제가 말씀드릴 병은 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병입니다.”
“색을 구별하지 못한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 말 그대로입니다. 특히 적색과 녹색을 구별하지 못하는 증상이 많습니다.”
장자명은 자신의 짐 속에서 족자 몇 개를 꺼냈다.
족자를 바닥에 늘어놓은 장자명은 그중 하나를 잡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쉽게 읽을 수 있는 글자를 색약증에 걸린 이들은 구별을 못 한답니다. 참, 색약증은 제가 임시로 붙인 이름입니다.”
“색약증이라…….”
황보서현이 말끝을 흐리자 장자명은 송경운을 향해 족자를 펼쳤다.
촤르륵.
족자를 펼친 장자명이 차분한 음성으로 물었다.
“송 무사님, 지금 이 족자에 쓰여 있는 글자를 말씀해 보시지요.”
장자명의 질문에 모두의 시선이 송경운에게 모였다.
송경운의 앞에는 묘한 모양의 족자가 펼쳐져 있었다.
그 족자에는 온통 붉은색과 녹색으로 점이 찍혀 있었다.
보기만 해도 어지럽지만, 못 알아볼 수준은 아니었다.
적색과 녹색이 엄연하게 구분되어 하나의 글자를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누구도 족자 속 글자를 말하는 이는 없었다.
집법당주 황보서현의 눈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송경운은 지금 미칠 지경이었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제야 감이 잡힌 것이다.
문제는 그 기본적인 판단 자체를 할 수 없던 자신이었다.
대체 자신이 붉은색과 녹색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을 한빈은 어떻게 알 수 있었단 말인가?
이것은 그의 주인, 황보견우도 모르는 것이었다.
송경운은 단지 지시에 따를 뿐 한빈의 무복이 붉은색인지 녹색인지 구별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붉은 무복을 입은 것이 한빈밖에 없으니 그것을 근거로 한빈은 지목하면 된다는 것이 주인의 계획이었다.
그 근거가 순식간에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전음이 들려왔다.
-하늘 천!
송경운이 고개를 갸웃하자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나다, 황보영우.
송경운은 슬쩍 주위를 둘러봤지만, 둘째 공자, 황보영우는 없었다.
전음이라 진위가 가물가물한 상황이지만, 진짜 황보영우라면 믿어야 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반전 속에 이 전음을 믿어야 하나가 의심되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만약 전음까지 위조할 수 있다면?
생각해 보니 황보영우의 무위가 전음을 보낼 정도로 높았던가?
달싹이던 송경운의 입술이 멈췄다.
여기서 잘못 말하면 자신의 주인인 황보견우의 팔이 달아날 것만 같았다.
그의 팔이 달아난다면?
그다음은 자신의 목이 달아날 차례였다.
송경운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다.
땀이 턱선을 타고 풀잎 위로 떨어졌다.
톡. 톡.
송경운은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는 고개를 갸웃하며 송경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한 말이 사실이었어?”
“그런 병이 있다는 건 태어나서 처음 들어 보는데…….”
“강호에 기인이사(奇人異士)가 한둘이던가? 그깟 병이 뭔 대수라고.”
“그건 건너 건너 듣는 얘기고, 막상 눈앞에 이런 병을 가진 자가 있다니 신기하네.”
모두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송경운을 자극했다.
이젠 등까지 축축해질 정도로 땀이 나오고 있었다.
그때 송경운의 시야에 황보견우가 들어왔다.
그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심한 송경운이 외쳤다.
“하늘 천입니다!”
순간 장내가 술렁였다.
황보세가 사람들이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맞았어!”
“그래, 맞췄어!”
“그럼 하북팽가 사 공자의 팔이 달아나는 건가?”
마치 송경운이 과거에 장원이라도 한 것처럼 장내는 술렁였다.
황보견우는 이제 칼자루는 자신이 잡았다는 듯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한빈이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모두의 술렁임이 멈췄다.
다시 반전이 일으킬 인물이 등장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두리번거릴 때 한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막을 펼쳐 주시죠, 집법당주님.”
한빈은 자신과 장자명 그리고 송경운의 주변을 가리켰다.
“…….”
황보서현은 아무 말 없이 한빈을 바라봤다.
집요해도 너무 집요했다.
마치 상대의 초식을 미리 알고 파훼법을 만든 것처럼 계책을 미리 알고 대비한 것만 같았다.
팽가의 후기지수가 어떻게 저런 계책을?
게다가 자신이 모함받을 것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황보서현은 이제 선택을 해야 했다.
강호의 정의를 구현하느냐?
아니면 가문을 구하느냐?
황보서현은 그 타협점을 찾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조용히 진기를 뿜어냈다.
그러고는 자신과 한빈, 송경운의 주변을 감쌌다.
하지만, 슬쩍 틈을 만들어 놨다.
외부에서 도움을 주는 자가 있다면 글자를 알려 줄 것이었다.
그러고는 칼자루를 쥔 상태에서 한빈과 타협점을 찾으면 되었다.
황보견우를 벌하는 일은 그 뒤 문제였다.
황보서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막을 펼쳤으니 계속해도 좋다.”
“네, 감사합니다. 집법당주님.”
한빈이 살짝 고개를 숙인 후 장자명에게 눈짓했다.
장자명이 족자를 펼치는 동시에 한빈이 자리를 옮겼다.
그 모습에 황보서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겨우 기막에 틈을 만들어 놨는데, 그곳으로 한빈이 자리를 옮긴 것이다.
기막을 탄탄히 펼치는 것과 틈을 만드는 것, 둘 중 어떤 것이 상승의 무공이냐 물어본다면 누구나 후자를 말할 수밖에 없다.
한 공간만 남기고 기막을 펼친다라?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집중력을 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살짝 틈을 만든 황보서현의 내부에서는 진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요기서 조금 더 무리를 한다면 내상을 입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장자명이 펼친 족자를 본 송경운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점으로 가득 찬 그림이 다시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눈에는 구분이 안 갔다.
송경운은 주위를 둘러보며 글자를 확인하려 안간힘을 썼다.
송경운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토해 냈다.
“후…….”
“괜찮으십니까? 송경운 무사.”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손짓하자 옆에 있던 설화가 그에게 수건을 건넸다.
수건을 받은 송경운은 땀을 닦아 내며 족자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온통 점으로 보일 뿐 그곳에서 글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이젠 기막을 거둬 주시지요.”
“알았네, 팽 공자.”
고개를 끄덕이는 황보서현의 목덜미에도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장자명에게 족자를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뒤돌아 족자를 모두에게 펼치며 말을 이었다.
“이 글자가 뭔지 아시는 분! 상금은 은전 한 냥입니다.”
한빈의 말에 여기저기서 손을 들었다.
한빈이 턱짓으로 그중 하나를 가리키자 그가 외쳤다.
“팔입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팔이 맞았다.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말했다.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한빈이 백발백중의 수법으로 은전을 날렸다.
슝!
맹렬히 날아가던 은전에 정답을 맞춘 무사의 품 안에 무사히 파고들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적색과 녹색을 구분 못 하는 자가 제 무복의 색을 보고 범인을 저라고 단정 지었습니다. 덩치가 저와 비슷한, 녹색 옷을 입은 누군가가 범인일 수 있는데 말입니다.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요?”
“…….”
황보서현을 비롯한 황보세가 식솔 모두는 한빈의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그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시녀도 저를 범인으로 몰기 위해 거짓을 고했습니다. 이건 또 왜일까요?”
“…….”
사방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때였다.
황보견우가 한빈에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라, 팽 공자.”
“또 뭐지?”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쏘아보자 황보견우가 외쳤다.
“나에게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그 말에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일단 한쪽 팔은 내 것이고 이젠 뭘 걸 거지? 남은 한쪽 팔? 아니면 한쪽 눈? 그것도 아니면 다리? 모두 못 걸겠다고 하면 혹시 황보세가의 기둥?”
한빈은 무표정하게 황보견우를 바라봤다.
하지만, 황보견우는 마지막 남은 한 수가 있다는 듯 비릿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