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기호지세 (2)
한빈은 기지개를 켜며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기호지세라?”
한빈은 재미있다는 듯 혼잣말을 하며 복도의 방문을 바라봤다.
기호지세라는 말은 강호를 살아가는 무인들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말이었다.
강호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그들은 호랑이 등에 탄 어린아이가 되며 아차 하는 순간 무림의 사건과 사고에 밥이 되기 마련이다.
잠시 상념에 잠겼던 한빈은 복도를 지나며 적혈맹호대원들의 기척을 느꼈다.
“아직도 잠을 안 자고 있군.”
한빈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은 어렵게 올라선 일류의 경지를 가다듬고자 모두 가부좌를 틀고 있는 상태.
한빈은 그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이제 설화와 이무명의 방이 남았다.
설화의 방에서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고 이무명의 방에서는 끙끙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빈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요즘 이무명에게 파혼검을 가르치며 느낀 점이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정체 모를 무언가가 이무명의 발전을 막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무명은 마치 작은 항아리 속에 들어 있는 송아지와도 같았다.
작은 항아리 속에 송아지를 넣는다면 어떻게 될까?
항아리가 단단하다면 소가 되지 못한 채 평생 송아지로 남을 것이었다.
뼈가 부서지고 살이 터져도 항아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터.
하지만, 항아리가 약하다면?
뭐,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항아리가 약하다고 생각될 만큼 자신을 키우면 되었다.
한빈은 그것을 이무명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강한 체력과 정신력.
그리고 이무명이 하남정가에서 배운 심법을 극도로 끌어올려야 했다.
정(精), 기(氣), 신(身)이 하나가 되어 성장한다면 이무명을 옥죄고 있던 항아리도 깨질 것이었다.
한빈은 이런저런 상념을 머릿속에 띄운 채 방으로 들어섰다.
한빈은 설화의 방에서 기척이 안 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설화는 탁자 위에 엎드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아마도 정리를 하다가 잠이 든 듯.
한빈은 조용히 심미호에게 받은 물건을 꺼냈다.
* * *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한빈의 앞에 황보견우의 오른팔 송경운이 나타났다.
“팽 공자님, 잠시 시간이 되실는지요?”
그의 말에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답했다.
“말씀하시지요, 송 무사님.”
“다름이 아니오라…….”
말끝을 흐린 송경운은 적혈맹호대를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공자님이 세가끼리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셔서요.”
“관계라?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원하는 겁니까?”
“예를 들어 공자님의 수하와 저희 대공자님의 수하 간의 친선 비무 같은 겁니다.”
“예를 들지 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정확히 비무입니다.”
“비무라……. 좋은 생각이군요.”
“그럼 승낙하셨다고…….”
“잠시만 기다리시죠, 송 무사.”
“네?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다름이 아니라 제 수하들은 친선 비무는 안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친선 말고 실전만 합니다.”
“네? 실전이라니 그게…….”
“우리 애들은 공짜로는 안 하고 일당 받고 비무를 합니다.”
“네?”
“일당 안 주면 절대 비무 안 합니다.”
한빈이 손을 내저으며 돌아섰다.
그 모습에 당황한 송경운은 자신도 모르게 한빈의 소매를 잡았다.
“공자님!”
순간 한빈이 눈매를 좁히며 송경운을 쏘아봤다.
그 기세가 심상치 않자 송경운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송경운은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음을 직감했다.
대공자에게 지시받은 사항 중 첫 번째 일부터 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비무를 제안하면 무가(武家)의 특성상 호기롭게 승낙해야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돈을 달라니.
이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한 송경운이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을 쏘아보는 한빈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마치 독수리 앞에 참새가 된 기분이었다.
한참을 보던 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송 무사. 내가 일당을 언급했으면 송 무사는 얼마인지 물어보는 것이 상도가 아니겠습니까?”
“아, 그것이…….”
“그냥 딱 잘라 말하겠네. 한 판에 은전 두 냥씩.”
이제는 자연스럽게 나오는 하대.
하지만, 송경운은 너무 자연스러워 눈치채지 못했다.
“음, 그러니까. 일단 말씀드리고 오겠습니다.”
“내가 딱 반 시진 줄 테니, 빨리 오라고.”
“네. 알겠습니다, 공자님.”
송경운은 몸을 돌려 발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뛰어갔다.
그 모습에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이제 그들의 계획이 시작된 것 같았다.
옆에서 한빈의 표정을 본 설화가 물었다.
“공자님, 기분이 좋으신 것 같은데요?”
“뭐, 일단은 장단에 춤은 춰 줘야 하니까.”
그때 옆에서 이무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끼어들었다.
“상대의 장단에 춤을 추면 불리한 것 아닌가요?”
“장단에 맞춰 춤만 추면 안 되지.”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무명의 물음에 어느샌가 모인 적혈맹호대 대원들도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빛냈다.
그들의 호기심이 어느 정도 달아오른 것 같아 보이자 한빈이 말했다.
“춤을 췄으면 관람료를 받아야지.”
“왠지 춤을 추는 사람과 돈을 받는 사람이 다른 것 같은데요. 안 그렇습니까? 사부.”
그때 뒤쪽에서 조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당연하죠. 원래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군이 가져가는 거죠.”
조호의 말에 적혈맹호대 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막내 조호의 말이 백번 맞아.”
그 모습에 이무명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재주 부리는 곰이 돈을 탐내지 않는 걸 너무 당연해하는 거 아니냐? 조호야.”
“주군이 재주를 가르쳐 줬는데, 돈까지 탐내면 그건 반칙이죠.”
조호의 말에 옆에 있는 장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소, 이 호위.”
아직도 장삼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무명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이무명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무명도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도 적혈맹호대 대원들의 심정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을.
무릇 사람이란 가장 알기 힘든 것이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들의 모습에 한빈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송경운이 나타난 것은 딱 반 시진이 되기 전이였다.
그는 헐레벌떡 뛰어와서 대공자가 승낙했다는 말과 함께 준비되는 대로 황보세가의 제일 연무장으로 오라는 말을 남겼다.
물론 안내해 줄 하인은 덤이었다.
한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화에게 귓속말로 뭔가를 속삭였다.
한빈의 지시를 받은 설화는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다른 이들은 설화가 당과를 사러 나가나 보다 하며 웃을 뿐이었다.
한빈은 나머지 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처소에 너희들의 무기를 하나도 남겨 둬서는 안 된다. 비무는 실전과 같이. 비무를 위해 완벽하게 무장한다.”
한빈의 명령에 적혈맹호대 모두가 외쳤다.
“명 받들겠습니다, 주군!”
* * *
한빈 일행이 황보세가의 제일 연무장으로 간 것은 정확히 반 시진 뒤였다.
한빈의 뒤를 따르는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모두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들은 실전에 목말라 있었다.
대원들끼리 비무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는 세가 밖의 무사들과 비무가 절실했다.
게다가 상대는 같은 강북의 오대세가 중 하나인 황보세가.
그중에서도 대공자의 수하들이었다.
다음 세대의 황보세가를 이끌 무사들이 모인 집단이라는 말이었다.
조호가 낮게 외쳤다.
“몸이 근질거려요, 장삼 아저씨!”
“그래, 나도 몸을 풀고 싶구나.”
장삼도 손가락을 딱딱 꺾으며 의지를 불태웠다.
모두가 의지를 불태우고 있을 때 한빈은 조용히 황보견우에게 다가갔다.
“혹시 은자는 준비됐습니까?”
한빈이 은밀한 목소리로 묻자 황보견우가 다급히 답했다.
“허, 이거 참. 내가 그 돈 떼먹겠소? 팽 공자.”
“벌써 떼먹기 직전이지 않습니까?”
“팽 공자가 우리 가문을 떠나기 전에 주겠소. 내 반드시 지킬 것을 약조하겠소.”
그때였다.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이번에는 설화 대신 이무명이 달려왔다.
이무명이 다소 어설픈 동작으로 보따리를 펼쳤다.
그 모습에 황보견우가 물었다.
“이게 뭐 하는 겁니까? 팽 공자.”
“원래 사람의 세 치 혀보다는 종이 위의 먹물이 더 믿을 만한 법이지요.”
“헉!”
황보견우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무인을 대하는 게 아니라 마치 상인을 대하는 기분이었다.
황보견우는 계약서를 보고는 한 번 더 놀랐다.
종이 위에는 미리 약조한 금액이 적혀 있었다.
게다가 절호곡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조항들이 빽빽하게 차 있었다.
황보견우는 아무 생각 없이 붓을 들었다.
자신과 동생이 준비한 계획대로라면 이 계약서는 종이 쪼가리가 될 터였다.
‘두고 보자.’
겨우 화를 삭인 황보견우는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웃을 때였다.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는 바로 송경운이었다.
달려온 송경운은 황보견우를 지나 한빈의 앞에 멈췄다.
그는 한빈에게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얼굴을 한빈의 귀에 갖다 댔다.
“팽 공자님, 급히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은밀한 목소리에 한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황보세가의 가주님께서 나를 찾으신다고?”
“네, 맞습니다. 긴히 할 말이 있으시다고…….”
송경운이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한빈이 힐끔 황보견우를 바라봤다.
그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한빈이 헛기침하며 답했다.
“흠, 나만 가는 게 맞나?”
“네, 그렇습니다.”
그의 말에 한빈이 이무명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이무명이 한빈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말씀하십시오, 주군”
“이 비무를 나 대신 주관해 줘. 나는 잠시 자리 좀 비울 테니.”
“네, 알겠습니다.”
이무명이 답하자 한빈은 송경운에게 턱짓했다.
“어서 안내하게.”
“네, 알겠습니다. 팽 공자님.”
송경운이 앞장서자 한빈이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 * *
한빈이 안내받은 곳은 인적이 드문 정자였다.
정자를 연못이 감싸고 있으며 연못과 정자 사이에 놓인 네 개의 다리가 정자로 향하는 통로였다.
정자의 가운데에는 탁자가 놓여 있으며 한빈을 위해 미리 준비했는지 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시녀 둘이 아직도 준비하고 있었다.
정자의 앞까지 안내한 송경운이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팽 공자님.”
“고생했네.”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송경운의 어깨를 토닥였다.
송경운이 자리를 뜨자 한빈은 정자의 앞에서 황보세가의 가주를 기다렸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송경운이 다급하게 다시 달려왔다.
“팽 공자님, 큰일 났습니다. 비무를 하다가…….”
“무슨 일인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누가 다쳤는지는 알고?”
“팽 공자님 사람인지, 대공자님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우성만 듣고 막 달려왔습니다. 일단 그쪽으로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네.”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리를 건너갔다.
송경운의 시야에서 벗어난 한빈은 미간을 좁혔다.
한빈은 송경운의 말이 거짓이라 판단했다.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누군지도 알아보지 않는다?
그것은 한빈의 호기심을 최대한 끌어올리려는 수작이 분명했다.
그리고 송경운의 말투와 표정이 미묘하게 어긋났다.
마치 마음먹고 거짓말을 하려는 자 같았다.
한빈을 몰아넣으려는 그들의 계책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럼 놈들의 장단에 한번 맞춰 줄까?”
혼잣말을 뱉은 한빈은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빈은 눈 깜짝할 사이에 황보세가의 연무장 근처에 나타났다.
그곳에서는 함성이 들리고 있었다.
그 함성의 대부분을 적혈맹호대가 차지하고 있었다.
한빈은 천천히 연무장으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