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하북팽가 검술천재-145화 (145/621)

145화. 기호지세 (1)

한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건 아직 확신할 수 없습니다.”

“확신할 수 없다라? 그건 무슨 뜻이지?”

“아군이라면 동업자 맞죠?”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

“동업은 원래 힘이 동등할 때만 이루어지는 법이죠. 저희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시간이라? 그게 무슨 뜻이지?”

“황보세가가 저를 살필 시간, 그리고 제가 황보세가를 살필 시간이죠.”

말을 마친 한빈이 황보서현의 눈을 바라봤다.

사실 지금 한 말은 진심이 아니었다.

한빈이 확인하고 싶은 것은 힘이 아니라 황보세가의 진심이었다.

한빈의 눈빛을 받은 황보서현은 헛웃음을 흘렸다.

“허, 무공보다 입이 무서운 친구네.”

말을 마친 황보서현은 활짝 웃은 뒤 휑하니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작은 소리지만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시선이 모이자 한빈이 말했다.

“자, 이제 들어간다.”

한빈이 황보세가의 대문을 가리키자 소대섭이 급히 말했다.

“일단 정리부터 하고 들어가겠습니다.”

몸을 돌리려는 소대섭을 한빈이 불렀다.

“소 대주.”

“네, 주군.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소대섭이 고개를 기울이자 한빈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하지 마!”

“네, 뭘 하지 말란 건지…….”

“소 대주, 자기가 싼 똥은 자기가 치우는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주군.”

뜻밖의 말에 소대섭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한빈이 말을 이었다.

“이 판을 정리할 건 우리가 아니라는 이야기지. 이 판을 벌이게 만든 사람이 알아서 치워 줄 거야.”

한빈은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황보견우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한빈의 지시에 난장판이 된 주변을 정리하려던 적혈맹호대 모두가 손을 멈췄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황보견우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이런 제기랄. 저 새끼는 내가 반드시…….’

그의 생각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 * *

아무렇지도 않게 발길을 옮기던 황보서현은 다급하게 어디론가 달려갔다.

그녀가 향한 곳은 가주전이었다.

그녀의 오라버니인 가주 황보만청은 요즘 식음을 전폐하고 무공 연구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 이유로 아직 가주전에 남아 있던 것이었다.

잠시 후, 그녀는 가주 황보만청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과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그게 전부인가? 오대세가에 명물이 나타났군.”

“가주 오라버니, 그렇게 웃을 일이 아니에요!”

“웃을 일이 아니라면 심각한 상황이란 말인가?”

말을 마친 황보만청이 바둑판 위에 돌을 올려놨다.

딱!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맴돌았다.

그것도 잠시 돌을 올려놓은 황보서현이 말을 이었다.

“그건 아니지만요. 그 빚을 갈음하기 위해서는 하북팽가의 부탁 없이 오행 패에 서명해 줘야 할지도…….”

“그럼 또 어떤가? 오대세가끼리 빚 하나 지는 게 대수겠는가?”

황보만청은 해탈한 고승처럼 웃었다.

사실 오대세가의 상징인 오행 패에 서명을 받는 일은 간단하면서도 힘들었다.

원칙은 간단했다.

첫째, 소가주 후보가 들고 온 오행 패에 서명을 하는 것은 그에게 부탁 하나를 들어주기로 약속하는 것이었다.

둘째, 상대 가문의 가주가 요청을 해야만, 오행 패에 서명을 한다.

상대 가문의 가주는 요청을 하며 몰래 오행 패 하나를 건넨다.

즉, 오행 패를 주고받아야 성립되는 거래였다.

위 두 가지 조항을 조합하면 결국은 빚 하나씩을 가문끼리 교환하는 모양새였다.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하기 위해서 선행될 것은 하나였다.

혼자 힘으로는 강북 오대세가 중 어느 곳에서도 지지를 받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빨리 알아채는 것이다.

이것은 가문끼리의 결속을 다지면서도 소가주가 될 사람의 정치적인 자질을 시험하는 문제였다.

가주의 표정을 본 황보서현도 마주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도 할 말 없죠.”

말을 마친 황보서현이 차를 들이켰다.

그 모습에 황보만청이 말했다.

“애들 싸움은 애들끼리 붙여 놔야 재미있는 법이지.”

“뭐, 기둥뿌리가 뽑혀도 상관없다고 하면 오라버니 뜻대로 하고요.”

“뽑혀도 운명이지. 그리고 설마 그 조그만 놈에게 기둥뿌리가 뽑히겠나?”

“저는 모릅니다. 저는 감정 없이 가칙대로만 할 거예요.”

“집법당주는 그래야지.”

고개를 끄덕이던 황보만청이 바둑알을 잡았다.

바둑판을 바라보며 잠시 입맛을 다시는 황보만청.

그의 손길이 묘하게 움직였다.

휙!

바둑알을 잡은 손이 바둑판 위를 향한 것이 아니라 열린 창문 밖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 모습에 황보서현이 물었다.

“가주 오라버니, 왜 바둑알을 던지고 그래요?”

“낮말을 듣는 새는 없는데, 밤말을 듣는 쥐는 있는 것 같군.”

“쥐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쫓아내 버렸으니 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황보만청은 다시 돌을 잡았다.

그 모습에 황보서현이 씩 웃었다.

“가주 오라버니, 방금 돌을 던지셨잖아요.”

황보서현이 창밖을 가리키자 황보만청이 허탈하게 웃었다.

“허허, 이것 참. 내가 돌을 던진 것이 되나?”

“돌 던진 것 맞죠. 그러니 다음 달부터 집법당 예산은 좀 신경 써 줘야 돼요. 올해 들어서 처음 이겼네요.”

황보서현이 바둑판을 보며 웃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황보만청은 검과 바둑에 미쳤다고 소문이 나 있는 사람이었다.

황보만청이 각 당주에게 내건 조건이 바로 자신에게 바둑을 이기면 조직의 예산을 올려 주겠다는 것이었다.

돌은 던진 것은 사실.

황보만청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하하. 이거 참, 쥐 때문에 네가 이득을 봤구나.”

“뭐, 이득만 보면 그 쥐가 되었든 새가 되었든 그게 문제인가요?”

황보서현이 탁자 위에 바둑알을 쓱 쓸어 담았다.

* * *

가주전의 창문에서 백 보는 족히 떨어진 곳에서 그림자 하나가 스르륵 사라졌다.

사라진 그림자가 나타난 것은 한빈 일행이 묵을 처소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 그림자는 멀리서 황보견우와 함께 걸어오는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터벅터벅.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그림자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황보견우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형님,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십니까? 이분은 누구시고요?”

그림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황보영우.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척 눈알을 굴리며 한빈을 살폈다.

그 모습에 황보견우가 마지못해 답했다.

“이쪽은 하북팽가의 사 공자네, 동생.”

황보영우는 재빨리 몸을 돌려 한빈을 향해 포권했다.

“아, 하북팽가의 사 공자시군요. 저는 황보세가의 둘째 황보영우라 합니다.”

“저는 하북팽가의 넷째 팽한빈이라고 합니다.”

한빈도 마주 포권했다.

허리를 숙였지만, 한빈은 고개를 든 채 상대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로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것은 황보영우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둘은 그렇게 포권한 자세로 상대의 눈빛을 살폈다.

잠시 시답지 않은 이야기가 오가고 황보견우가 옆을 보며 말했다.

“손님은 자네가 모시게.”

그곳에는 그의 오른팔인 무사 송경운이 진지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송경운이 재빨리 포권하며 한빈 일행이 묵을 전각으로 안내했다.

묵묵히 앞장서던 송경운이 커다란 전각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전각을 바라보던 적혈맹호대는 웅성대기 시작했다.

“와, 숙소 좋네.”

“하북팽가의 숙소보다 좋네.”

그들의 말에 전각 앞에 선 송경운이 피식 웃으며 한빈을 바라봤다.

“이곳이 공자님께서 머물 곳입니다.”

“고맙네.”

송경운이 전각을 가리키며 말했다.

“공자님은 저쪽 녹색 깃발이 꽂힌 방에서 머무르시면 됩니다.”

“녹색 깃발이라면…….”

“저기 말입니다.”

송경운은 전각의 가장 위쪽 창문에 꽂혀 있는 깃발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다시 설명을 이었다.

“나머지 무사님들은 적색 깃발이 꽂힌 방에서 머무르시면 됩니다.”

설명을 마친 송경운은 한빈에게 포권한 뒤 물러났다.

한빈은 송경운의 뒷모습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묘한 웃음을 흘렸다.

* * *

잠시 후, 작은 전각 하나를 다 차지한 한빈 일행은 짐을 풀기 시작했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은 한빈은 달빛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찾은 것 같네.”

방에 한빈의 짐을 풀던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공자님, 뭘 찾아요?.”

“흥미가 당기는 사냥감 말이야.”

“누구요? 황보견우 공자요?”

“아니.”

“그럼 황보영우 공자 말씀하시는 거겠네요.”

“설화도 알아봤구나.”

“잘은 모르겠지만, 동종 업계 무사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아, 동종 업계.”

한빈이 황당하다는 듯 설화를 바라봤다.

요즘 들어서는 자신의 전직을 언급하지 않는 설화였다.

설화가 동종 업계라고 하면 물론 살수를 말함이었다.

한빈이 보기에 반은 맞았다.

황보영우에게는 살수의 기세 말고 다른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기(魔氣)가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마기라?

정파의 직계가 살수의 냄새를 풍기는 것도 모자라 마기까지 풍기고 있다라?

이것은 분명 황보세가의 몰락과 관계있었다.

전생 기억으로는 하남정가만큼 빨리 몰락하는 것이 바로 황보세가였다.

사실 한빈이 이곳에 제일 처음으로 온 이유 중 하나가 전생에 못 풀었던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원인의 일부를 발견한 것이었다.

아마 한빈과 설화가 아닌 다른 이들이었다면 살수 특유의 특징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었다.

설화가 마기를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대충 정리를 끝낸 한빈은 설화에게 말했다.

“나는 잠시 바람 좀 쐬고 올게. 마무리 좀 부탁한다, 설화야.”

“네, 공자님. 그런데 바람 쐬시는데 꼭 야행복을 입으셔야 해요?”

“적색은 너무 눈에 띄잖아. 저 깃발처럼.”

한빈은 창가에 꽂혀 있는 깃발을 가리켰다.

설화가 빙긋 미소 짓자 한빈은 재빨리 초식 두 개를 운용했다.

‘전광석화.’

’구걸십팔보.’

동시에 한빈은 옷깃 스치는 소리만 내며 창밖으로 사라졌다.

사사-삭.

* * *

한편, 황보견우의 처소에서는 한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휴…….”

“잘 참으셨습니다, 형님.”

“동생, 이게 말이 되는가? 왜 고모님이 거기에서 나타나셔서.”

“우리가 파 놓은 함정에만 빠뜨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형님.”

“그것 그렇지만, 초장부터 격장지계를 펼쳐 놓았는데 그게 무산되고 도리어 내가 구덩이에 빠진 느낌이라는 것이 문제지.”

“조금 더 크게 보십시오. 내일 일만 성공하면 하북팽가의 사 공자 놈은 우리의 손바닥 안입니다.”

“그건 그렇지. 부처님 손바닥 위의 손오공처럼…….”

“아닙니다.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윙윙대는 파리가 되겠지요.”

“하하. 덕분에 기분이 풀리는군. 동생은 그만 돌아가서 쉬게. 그래야 내일 일을 차질 없이 진행하지.”

“네. 형님은 마음 푹 놓으십시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다만…….”

“편하게 말하게, 동생.”

“다만, 목소리만 높이시면 됩니다. 그 어떤 경우라도 물러서시면 안 됩니다.”

“흠.”

“일단 놈이 함정에 빠지면 저희도 호랑이의 등을 탄 것과 똑같습니다.”

“기호지세(騎虎之勢)란 말이군.”

“맞습니다. 조금의 빈틈만 보여도 파 놓은 함정은 무용지물입니다.”

“알았으니 걱정 말게.”

그때였다.

황보영우가 눈매를 좁히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에 황보견우가 물었다.

“왜 그러는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좀 예민했나 봅니다.”

황보영우가 멋쩍게 웃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그는 자신의 착각이라 생각했다.

기척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신의 기감을 벗어나 활동할 수 있는 자는 이 세가 내에 없었다.

가주조차 그의 기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외부 손님이라고 해 봤자 하북팽가의 풋내기밖에 없었으니 잘못된 느낌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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