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아군이냐 적군이냐? (4)
황보서현은 슬쩍 자신의 옷소매를 바라봤다.
“오호!”
그녀는 기분 좋은 탄성을 흘렸다. 옷소매가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상대에 대한 배려였다. 실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술잔을 날린 것이 아니라 호의에서 술을 건넨 것이라는 말이었다.
술잔에 부담도 주지 않고 상대도 다치지 않게 하면서 술잔을 날린다고?
그것은 기막의 외벽과 내벽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이야기.
한빈의 경지를 추측하던 황보서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던 그녀는 술잔을 한빈에게 향했다.
받은 대로 돌려주겠다는 듯 그녀의 손에는 희미한 진기가 맴돈다.
술잔이 마치 보름달처럼 빛을 발했다.
그윽한 눈으로 술잔을 바라보던 황보서현이 말했다.
“잘 마셨으니, 술잔을 돌려줄까 하네.”
말을 마친 그녀는 술잔을 화살처럼 날렸다.
슝!
술잔은 공간을 가르며 파공성을 냈다.
순간 적혈맹호대 모두의 눈이 한 단계 더 커졌다.
한빈이 던졌던 술잔은 위협적이지 않았었다. 그런데 황보서현이 던진 술잔은 그 기세가 포악했다.
마치 미친개 한 마리가 날뛰는 것처럼 한빈을 향해 날아왔다.
기세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기어검, 아니 이기어잔이라고 해야 할까?
술잔의 움직임이 신묘했다.
마치 어린아이의 낙서처럼 규칙 없이 날아오는 것만 같았다.
흉포한 기세에 신묘한 움직임.
과연 한빈이 저 술잔을 잡을 수 있을까?
막는다 해도 술잔이 산산조각 나 파편이 튈 상황.
하지만,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술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휙!
순간 모두는 눈을 더욱 크게 떠야 했다.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술잔을 잡았다.
그들이 놀란 것은 한빈이 별다른 수법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친구에게 술잔을 건네받듯 한빈은 그렇게 술잔을 받았다.
술잔을 던진 후 손을 한빈에게 향한 황보서현.
술잔을 받은 후 동작을 멈춘 한빈.
둘은 마치 서로를 바라보며 멈췄다.
어찌 보면 한 폭의 수묵화와도 같은 모습.
한빈과 황보서현이 만드는 묘한 광경에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중 조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속삭였다.
“지금 뭐 하는 거죠? 장삼 아저씨.”
“나도 모르겠다. 왜 저러고 있는지 감이 안 잡히네.”
장삼이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혹시, 멋 부리는 게 아닐까요?”
“멋이라고?”
“보통 공연이 끝나면 경극 배우들도 저렇게 멈춘 자세로 있잖아요.”
그때 설화가 조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조호가 조용히 물었다.
“설화야, 왜 그래?”
“멋 부리는 게 아니에요.”
“그럼 뭔데?”
“저기 보세요.”
설화는 한빈과 황보서현 사이의 공간을 가리켰다.
조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공간에는 어둠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호의 모습을 본 설화가 말했다.
“자세히 보세요.”
“자세히라…….”
눈을 가늘게 뜬 조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조호의 눈에 가느다란 선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선은 마치 진기를 머금은 듯 일렁이고 있었다.
그들이 보고 있는 일렁이는 선은 과연 무엇일까?
황보서현은 한빈을 시험하기 위해 단순히 술잔을 날린 것이 아니었다.
술잔에 천잠사를 묶어 놓은 후 한빈에게 던진 것이었다.
천잠사에 진기를 흘려보내 이기어잔의 착시 현상을 만들어 낸 것.
한빈이 술잔을 잡자 이제는 내공을 대결하는 양상이 된 것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상황에 대처하고 있었다.
‘자승자박!’
이것은 이화접목의 묘리를 시전하는 용린검법의 초식.
한빈은 황보서현이 흘려보낸 공격적인 내공의 일부분을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돌려보내고 있었다.
모두가 놀라고 있을 때 한빈은 술잔을 잡은 왼손을 움직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한빈이 술잔을 다시 황보서현에게 던지려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갔다.
한빈이 술잔에 술을 부은 것이다.
그러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술을 마셨다.
그 모습을 본 황보서현은 내공을 흘려보내는 것을 멈췄다.
한빈을 해할 마음은 없었기에 상대가 놀랄 만큼의 내공을 적절하게 흘려보냈던 황보서현이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그 내공이 자신에게 돌아왔다.
이것은 분명 이화접목의 수법.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술을 마시자 이제는 시험할 마음조차 없어졌다.
그것은 당연했다. 그녀가 측정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으니까.
황보서현은 술잔과 같이 보냈던 천잠사를 거둬들이는 동시에 담장 아래로 내려왔다.
휘릭!
소매를 펄럭이며 사뿐히 아래로 착지한 황보서현은 천천히 한빈에게 걸어왔다.
한빈 앞에서 멈춘 그녀가 말했다.
“나는 황보세가의 집법당주 황보서현이네.”
“알고 있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그녀에게 술잔을 건넸다.
“한 잔 더 받으시죠. 집법당주 누님.”
“그래도 될까? 동생.”
황보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술잔을 받았다.
그 후 말없이 술잔이 오고 갔다.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켜던 황보서현이 말했다.
“이런 술이 있다니? 처음 맛보는 맛이야.”
“이게 몇십 년 된 백아주입니다.”
“오호, 하북팽가에는 주선이 사나 봐?”
“그 주선을 소개해 드릴까요?”
한빈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이것은 진심이었다.
그 주선은 다름 아닌 하북팽가의 집법당주 팽대위였다.
한빈은 팽대위 몰래 백아주를 몇 병 홈쳐서 나왔다.
아마 이 사실을 알면 펄쩍 뛸 일이었다.
아니, 백아주를 홈친 것보다 이런 대화가 오가고 있다는 걸 안다면 팽대위는 기절초풍할 것이었다.
허튼소리라 생각한 황보서현이 술을 들이켜다가 헛웃음을 토해 냈다.
“허!”
그러고는 한빈을 뻔히 바라봤다.
왠지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자신의 조카 황보견우보다 더 친근한 느낌이랄까.
황보서현의 표정을 본 한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전생의 기억대로였다.
아마 그때는 어르신이라고 했다가 칼부림이 났었던 것 같다.
일단 황보서현을 낚는 데는 성공한 것 같고.
이제는 본론으로 들어가야 할 때였다.
한빈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원래 중매도 잘 서면 귀싸대기가 석 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귀싸대기가 석 대라고? 술이 석 잔이 아니고?”
황보서현이 살짝 눈을 크게 뜨자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뭐, 술은 이미 얻어먹을 걸로 하고요. 원래 착한 일을 하면 꼭 뺨을 맞더라고요. 그것도 같은 오대세가한테요.”
“그게 대체 무슨 말…….”
황보서현은 말끝을 흐리며 한빈과 적혈맹호대를 바라봤다.
착한 일을 하고 뺨을 맞는다는 건 황보세가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그때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황보세가의 직계가 하북팽가에 방문했는데, 이런 일을 겪었다고 하면 가만있으시겠습니까?”
“…….”
“황보세가에 손님을 밖에 세워 놓으라는 가칙이라도있던가요?”
“흠, 그런데 착한 일이라는 건 대체 뭐지?”
“제가 황보견우 공자에게 돈을 좀 빌려줬거든요.”
한빈은 품에서 계약서를 꺼내 펼쳤다.
한빈이 보여 준 계약서를 살피던 황보서현은 눈을 크게 떴다.
계약서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독소 조항.
문제는 이 계약서의 공증인이 하북성의 관리라는 점이었다.
게다가 거기에는 황실의 대리라고 명시되어 있기까지 했다.
약속을 지킨다면 아무 일도 없겠지만, 자신의 조카 황보견우가 이 약속을 지켰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물론 한빈이 착한 일을 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계약은 계약.
뭐, 계약서를 봤다고 한빈에 대한 호의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황보서현 나름대로 머릿속에서 계산을 하고 있을 때였다.
뒤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익!
거대한 황보세가의 대문이 소음을 내며 열렸다.
덜컹!
드디어 문이 활짝 열리자 그곳에는 경비 무사 하나가 달려왔다.
황급히 달려온 경비 무사는 황보서현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집법당주님.”
“빨리도 물어보네.”
“그, 그게 아니라…….”
“괜찮아. 자네도 이리 와서 같이 한잔해.”
황보서현이 옆자리를 가리키자 경비 무사는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 아닙니다.”
한사코 사양하던 그의 옆으로 누군가가 고기 꼬치를 내밀었다.
조그만 여자아이가 눈을 빛내며 꼬치를 내밀자 경비 무사의 눈이 커졌다.
아이는 물론 설화였다.
설화가 건네는 꼬치를 본능적으로 받아 든 경비 무사.
그 모습에 모두는 웃었다.
조금 남아 있던 긴장감이 모닥불 위의 연기처럼 산산이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다급한 발소리가 담장 안에서부터 울렸다.
타다닥.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그 소리의 주인공이 달려왔다.
그는 바로 황보세가의 대공자 황보견우였다.
황보견우는 재빨리 황보서현의 앞에 달려와 포권했다.
“고모님께 인사드립니다.”
“…….”
황보서현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한빈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모습에 황보견우가 다시 말했다.
“고모님, 그러니까…….”
황보서현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한겨울의 서릿발 같은 눈빛으로 황보견우를 쏘아봤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대공자!”
“네, 고모님.”
“가문에 손님이 오면 어떻게 하기로 되어 있지?”
“그것은…….”
“이렇게 밖에 손님을 세워 둬도 괜찮은 건가?”
“고모님, 이번에는 상황이 특수합니다.”
“뭐가 특수하다는 거지?”
“소가주 후보의 시험을 치르러 온 자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들여보내는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황보견우의 말에 황보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북 고행이라 불리는 소가주 시험이라면 특수한 상황이 맞았다.
이 시험이 깔고 있는 기본적인 바탕은 간단했다.
그것은 가문의 힘이 없이는 한 톨의 먼지만도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었다.
소가주 후보로서 이곳에 왔다면 하북팽가의 일원으로 온 게 아니라 그저 한 톨의 먼지로 대하는 것이 맞았다.
황보서현이 고개를 돌려 한빈을 바라봤다.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방문한 게 맞는 건가?”
“시험이라……. 잘못 짚으셨군요.”
“그럼 황보세가에는 왜 왔는가?”
황보서현은 이전과는 다르게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한빈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답했다.
“아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그대로라면?”
“빚 받으러 온 거죠. 그리고 최소한 제가 왜 왔는지는 알고 대해야 맞는 것이 아닐까요? 그게 가칙일 테고요.”
“흠.”
황보서현은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한빈의 말이 모두 맞았기 때문이었다.
시험 때문에 왔다 해도 일단 확인하는 것이 먼저고 대우는 차후 문제였다.
그런데 황보견우가 실수를 한 것이었다.
그 실수에 대한 책임은 황보견우뿐 아니라 가문의 흠이 될 수도 있다.
그때 황보견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한빈에게 물었다.
“빚이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오랜만이네요. 황보세가의 대공자님.”
“내가 줄 돈은 반만 남았을 텐데, 대체…….”
“일단 손님부터 모시는 게 도리가 아닐까요? 대공자님.”
한빈이 씩 웃자 황보서현이 끼어들었다.
“맞는 말이다. 이 일은 네가 책임지거라.”
말을 마친 황보서현은 술잔을 들고 일어나더니 대문을 향해 걸었다.
그때 뭔가 생각난 듯 걸음을 멈춘 황보서현이 몸을 돌렸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한빈을 바라보는 황보서현.
시선을 느낌 한빈이 물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집법당주 누님?”
“한 가지만 물어볼게.”
“네, 말씀하시지요.”
“자네는 황보세가의 아군인가? 아니면 적군인가?”
“최소한 적군은 아닙니다.”
한빈이 망설임 없이 답하자 황보서현이 기대감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그럼 아군이란 말로 들어도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