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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43화 (143/621)

143화. 아군이냐 적군이냐? (3)

모두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눈만 굴리는 가운데 이번에도 질문을 던진 것은 설화였다.

“공자님, 계약서요?”

설화가 눈을 크게 뜨자 한빈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아마 설화 네 기억에는 없을 거야. 절호곡에 늑대 사냥 갔다가 주워 온 계약서야.”

설화는 한빈의 말이 반어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기억에 없다는 이야기는 기억에 반드시 있을 거라는 뜻이었다.

“아!”

탄성을 터뜨린 설화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절호곡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순간 설화는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치가 떨렸기 때문이었다.

설화는 절호곡에 얽힌 사건들을 떨쳐 내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한빈은 설화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서찰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적혈맹호대를 바라봤다.

“이 계약서는 황보세가와 나의 관계를 증명하는 서류지.”

한빈의 당당한 말에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와아!”

그러던 중 누군가 고개를 갸웃하며 속삭였다.

“관계라고? 무슨 관계?”

“혹시 황보세가와 밀약이라도 있는 거야?”

다시 누군가가 말을 받았다.

그렇게 모두는 추측을 이어 나갔다.

“그렇지. 그쪽 대공자와 밀약이 있을 수도 있지. 세가들 공자끼리는 남모를 협약 같은 게 존재한다고 듣기도 했어.”

“아무래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말인가?”

“잘 생각해 봐. 밀약을 맺은 관계면 벌써 나와서 우리 주군을 맞았겠지.”

“허허, 그것도 그러네.”

“그럼 관계라는 것은 뭐지?”

모두는 호기심을 주체 못 하고 추측을 이어 나갔다.

그때 이무명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아, 혹시…….”

살짝 말끝을 흐리며 눈을 빛내는 이무명의 모습은 마치 과거 시험장에서 정답을 떠올린 유생과도 같았다.

이번에는 이무명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이무명은 입술을 달싹거릴 뿐 정답을 말하지는 않았다.

뭔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머뭇거리는 이무명의 소매를 설화가 잡아끌었다.

“아저씨, 궁금해요.”

설화의 재촉에 이무명이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자 이무명이 말했다.

“사부, 관계라 하심은? 혹시 출생의 비밀이라도…….”

이무명의 말에 적혈맹호대는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출생의 비밀?”

“설마?”

모두의 술렁임은 한빈의 다음 행동에 멈췄다.

한빈이 이마를 탁 친 것이다.

그것도 잠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한빈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무명! 오늘따라 왜 그래? 이상한 소리 할 거면 뒤로 빠져.”

한빈이 서찰을 흔들며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턱짓했다.

동시에 모두가 이무명을 쏘아봤다.

하지만, 이무명은 억울하다는 듯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관계라는 게 대체 무엇입니까? 사부.”

이무명이 다시 묻자 한빈이 씩 웃으며 답했다.

“뭐긴 뭐야.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지.”

한빈의 말에 모두가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한빈이 계약서를 쓰는 모습이 저절로 그려지고 있었다.

그때 설화가 눈치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왜 그래? 설화야.”

“저, 받을 돈이 얼마나 되는 거예요? 공자님.”

설화의 물음에 한빈은 활짝 웃었다.

“좀 많지.”

“공자님, 조금 더 자세히요. 그러니까 당과를 얼마만큼 살 수 있는 거예요?”

“뭐, 당과로 황보세가를 다 덮고도 남을 금액이지.”

“헉!”

설화가 놀라 입을 벌렸다.

그 광경에 적혈맹호대는 웃음을 참기 바빴다.

한빈이 고개를 돌려 소대섭을 바라봤다.

“오늘부터 황보세가를 떠날 때까지 수련은 없으니 그리 알아, 소 대주. 오늘부터 맘 놓고 쉬어.”

“네, 알겠습니다. 주군.”

소대섭이 재빨리 답한 후 적혈맹호대에게 한빈의 지시를 전하자 모두는 동시에 병장기를 땅에 찍으며 함성을 질렀다.

쿵! 쿵!

잠시 후.

황보세가의 정문에는 모닥불을 피울 터가 마련되었고 그 옆으로 새벽이슬을 피할 간이 막사가 생겨났다.

* * *

해가 서쪽으로 자취를 감추어 어둠이 짙게 깔린 황보세가의 정문.

안쪽에서 꼼짝하지 말란 지시를 이행하고 있는 황보세가의 경비 무사는 궁금해서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이어서 이제는 고기 굽는 냄새까지 담장 밖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경비 무사 중 하나가 말했다.

“아무래도 확인해 봐야겠네.”

“아까 대공자께서 분명히 말했잖나. 꼼짝도 하지 말라고 말일세.”

“그래도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아야 보고할 수 있지 않겠나.”

“허, 그것도 그렇지.”

두 명의 경비 무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경비 무사 둘은 조용히 담장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지 말라는 황보견우의 지시를 차마 어길 수 없었던 그들은 담장 아래에 사다리를 대고 올랐다.

황보세가의 담장은 제법 높은 편이기에 그들은 사다리의 끝까지 올라야 했다.

담장 위로 올라간 경비 무사는 담장 너머를 바라보고는 입을 떡 벌렸다.

“헉, 저게 뭔가?”

“그러게, 저게 뭐지? 진짜 모닥불에서 고기를 굽고 있잖아. 저게 어떻게 된 일이지?”

“자, 잠시만, 우리가 헛것을 보는 건 아니지?”

“지글지글 고기 타는 소리까지 들리는데 저게 헛것일 리가 있나?”

“그러게나. 그런데 저 술은 대체 뭐지? 주향이 여기까지 날아오네그려.”

“그러고 보니 우리 밥도 못 먹었지? 쩝.”

두 무사는 담장 위에서 고기 뜯는 모습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들이 한참을 멍하니 아래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아래에서 고기를 뜯고 있던 붉은 무복의 사내가 담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무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순간, 붉은 무복의 사내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외쳤다.

“거기 무사님들도 내려와서 한잔하지?”

그 목소리에 경비 무사는 고개를 돌렸다.

경비 무사의 시야에는 붉은색 무복의 사내가 한 손에는 술병을, 한 손에는 고기 꼬치를 들고 손짓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물론 붉은 무복의 사내는 한빈이었다.

한빈이 담장 위에서 멍하니 있는 무사를 보고 다시 외쳤다.

“어차피 문만 안 열어 주면 임무는 다하는 것이 아닌가? 한 잔 받게!”

한빈의 외침에 무사가 쭈뼛대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저희는 임무 중이라.”

“어차피 꼼짝하지 말란 지시를 받았을 거 아닌가? 거기서 꼼짝 안 하나 여기서 꼼짝 안 하나 문만 안 열면 되는 게 아닌가?”

한빈의 말에 경비 무사의 눈이 하염없이 돌아갔다.

한참 동안 방황하던 경비 무사의 눈이 갑자기 멈췄다.

담장 위에 자신들만 있는 것이 아님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는 백색 무복의 여인이 마치 자신의 안방이라도 되는 듯 담장 위에 편안히 걸터앉아 있었다.

경비 무사 둘은 동시에 입을 벌렸다.

달빛은 빳빳한 백색 무복에 긴 머리를 찰랑거리는 여인을 비추고 있었다.

경비 무사는 그 여인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는 가주의 막냇동생이자 세가의 서열 삼 위인 집법당주 황보서현이었다.

나이는 마흔 초반으로 소가주 황보견우의 고모였다.

여인이 집법당주를 이끈다?

강북 오대세가 중에는 황보서현이 유일했다. 아니, 강남에서도 이런 경우는 드물었다.

여인이라면 보통 출가외인이 되어야 할 나이였지만, 황보서현은 가문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아직도 가문의 일원으로 남아 있었다.

물론 이것은 황보서현이 주장하는 것이고 남들이 보기에는 성격이 하도 괄괄해서 시집을 못 갔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일 수도 있는 것이 요즘 들어서 신경이 부쩍 날카로운 그녀였다.

신경만 날카로운 것이 아니라 그녀의 검 끝도 요즘 들어 날카로웠다.

조금만 못마땅한 점이 있으면 검을 들이밀며 비무를 신청하는 그녀였다.

그런 이유로 세가 무사들은 가주보다 그녀를 더 무서워했다.

그녀를 알아본 경비 무사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다, 당주님!”

“자네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황보서현이 경비 무사에게 물었다.

경비 무사가 재빨리 답했다.

“그, 그러니까. 밖에 소란이 일어서 확인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집법당주님.”

“내 말은 소란이 있으면 누군지 정체를 확인하고 보고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야!”

“정체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고도 드렸습니다.”

“자네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래에 계신 분은 하북팽가의 사 공자입니다. 그리고 저희는 대공자께 이미 보고를 드렸습니다.”

“음.”

황보서현은 침음을 흘리며 담장 안과 밖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모든 일을 알았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경비 무사와 황보서현이 대화를 나눌 때였다.

아래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집법당주 누님!”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란 황보서현이 눈을 크게 뜨고 아래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붉은색 무복의 사내, 한빈이 웃고 있었다.

황보서현은 놀람 반 호기심 반으로 물었다.

“동생은 나를……. 앗.”

황보서현은 자신도 모르게 한빈을 동생이라 칭했다.

실수를 깨달은 그녀는 재빨리 입을 막았다.

한빈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요? 황보세가의 집법당을 책임지고 있는 황보서현 누님이 아닌가요? 저는 하북팽가의 막내 팽한빈이라 합니다.”

한빈은 속으로 웃었다.

만약에 경비 무사들이 집법당주라 말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었다.

사실 한빈도 생각보다 젊은 황보서현의 모습에 살짝 놀랐다.

전생에는 그녀의 나이 오십이 넘어서야 마주할 기회가 있었으니 못 알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누님이라는 단어에 혹하는 것은 전생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한빈은 씩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 황보세가에서 벌일 일을 위해서라면?

아군은 아니어도 중간에서 판단을 내려 줄 황보세가의 인물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황보서현이었다.

일단 반은 낚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잠시, 한빈은 미소를 싹 지운 뒤 손에 든 술을 술잔에 따랐다.

조르륵.

작은 술잔에 술이 감칠맛 나게 떨어지며 주변에 주향을 피워 냈다.

그 모습에 침을 삼키는 것은 담장 위에 있던 경비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히는 황보서현도 넘어가는 침을 겨우 참고 있었다.

작은 잔에 술을 채운 한빈이 말했다.

“집법당주 누님, 한잔하시렵니까?”

한빈의 행동은 황보서현의 호기심을 일으켰다.

도발일까?

호의일까?

아니면 관심 종자?

그녀는 일단 한빈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럼 한 잔 받을까? 내가 내려갈까 아니면 그쪽이 올라올래?”

황보서현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술잔을 들며 외쳤다.

“그냥 그 자리에 계시지요!”

말을 마친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을 떠올렸다.

‘백발백중.’

그러고는 공력으로 술잔을 덮을 기막을 만들었다.

동시에 술잔을 황보서현을 향해 날렸다.

슝!

화살처럼 날아가는 술잔.

달빛은 받은 술잔은 별똥별처럼 황보서현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옆에서 보던 경비 무사들은 입을 떡 벌리며 검을 뽑으려 했다.

날아오는 술잔을 감싼 기막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보서현은 도리어 입꼬리를 올린 뒤 소매를 펼쳤다.

퍽!

왼쪽 소매로 술잔의 속도를 줄인 황보서현은 오른손으로 잔을 낚아챘다.

황룡조오라는 황보세가 특유의 금나수.

검을 뽑으려던 경비 무사들은 입을 떡 벌렸다.

황보서현의 오른손 검지 끝에서는 술잔이 팽이처럼 돌고 있었다.

한빈이 덮었던 기막을 지우고 황보서현이 그 위에 기막을 다시 씌운 것이다.

달밤에 펼쳐진 신기한 광경에 무사들이 석상이 되어 있을 때 황보서현은 피식 웃으며 술잔을 입속에 털어 넣었다.

황보서현은 술잔을 확인했다.

금이 간 곳이 없이 멀쩡한 술잔을 본 그녀는 내심 놀랐다.

술잔은 저잣거리에서나 볼 수 있는 값싼 도기(陶器)였다.

그런데 그 술잔에 무리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기막을 펼친다라?

내공의 수위보다 그 운용이 놀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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