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아군이냐 적군이냐? (2)
귀를 긁적이는 한빈의 모습에 설화가 물었다.
“누가 공자님 얘기를 한다고 그래요?”
그때 뒤쪽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보세가에서 주군 험담할 사람이 한둘인가요?”
그 목소리에 한빈과 설화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심미호가 초췌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날 험담할 사람은 어차피 황보세가의 대공자, 황보견우 하나밖에 없잖아? 안 그래, 심 부대주?”
“에이, 그건 아니죠, 주군. 그날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게 황보견우 하나만이던가요? 그 수하들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됐잖아요.”
“그랬던가? 그건 그렇고 갔던 일은 잘됐어?”
말을 마친 한빈이 힐끔 심미호의 등 뒤를 바라봤다.
심미호는 꽤 묵직해 보이는 짐을 지고 있었다.
소매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쓱 닦은 심미호가 웃었다.
“잘되긴 했는데, 정철민 어르신이 앞으로는 직접 오시래요.”
“어르신께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게 아니라 보고 싶다네요.”
“어르신이?”
“아니요. 어르신의 손녀가요.”
“손녀라면, 소연이?”
“네, 맞아요.”
“그건 그렇고 심 부대주 말솜씨가 많이 늘었네.”
“제가요?”
“이제는 막 나를 낚으려고 하잖아. 심 부대주 많이 큰 것 같아.”
한빈이 슬쩍 입꼬리를 올리자 심미호는 손을 내저으며 등짐을 풀었다.
“아, 아니에요. 제가 주군을 낚으려고 하다니요. 그건 오해예요.”
“뭐, 아니면 말고.”
“참, 이 짐은 어떻게 할까요?”
“하나만 내놓고, 나머지는 계속 심 부대주가 보관해.”
“그럼 여기 하나 받으시고 나머지는 제가 가지고 있을게요.”
심미호는 짐 속에서 천에 싸인 물건 하나를 건넸다.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물건을 품속에 넣자 심미호는 포권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심미호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등짐을 진 심미호의 뒷모습은 영락없는 상인이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무명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부, 제가 도울 일이라도…….”
“아니야. 그냥 모른 척하는 게 도와주는 거야. 그런 호기심을 가질 여유가 있으면 검이라도 한 번 더 휘둘러.”
한빈이 슬쩍 설화를 바라봤다.
시선을 받은 설화가 허리에서 연검을 뽑았다.
스릉.
막 뽑힌 연검은 나뭇잎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 떨림이 멈추기도 전에 설화가 말했다.
“아저씨, 한판 해요.”
“그러자꾸나!”
스릉!
검을 뽑은 이무명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조그마한 아이가 두렵다고 하면 믿어 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둘의 모습을 바라보던 한빈은 팔짱을 꼈다.
그때 둘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챙! 챙!
하지만, 한빈이 보고 있는 것은 그들의 검술이 아니었다. 한빈은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용린검법의 초식을 정리하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던 한빈은 다시 황보세가를 내려다봤다.
‘황보세가라?’
황보세가를 바라보던 한빈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빛냈다.
마치 먹잇감을 앞에 둔 맹수와도 같은 눈빛이었다.
* * *
다음 날, 황보세가의 제일 연무장.
황보견우는 자신의 수하들을 바라봤다.
팔짱을 끼고 수하를 바라보던 황보견우가 외쳤다.
“목소리가 작다!”
동시에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던 무사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얍!”
황보견우가 다시 외쳤다.
“제일식 태룡향천! 태산을 덮을 용이 하늘로 향하니…….”
황보견우가 외치는 구결에 맞춰 수하들의 검이 변화무쌍하게 공간을 갈랐다.
휙! 휙!
초식이 마무리되자 황보견우가 외쳤다.
“다들 그만!”
동시에 허공을 가르던 수십 개의 검이 멈췄다.
그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던 황보견우가 다시 외쳤다.
“지금 너희가 흘리는 땀은 훗날 황금이 될 터이니……. 모두 내 말을 명심하거라. 내가 태양이 되면 너희는 그 빛이 된다.”
그 말에 무사들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와아!”
그 함성에 황보견우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이것은 어제까지만 해도 의기소침해 있던 황보견우의 모습이 아니었다.
과연 무엇이 그를 바꾸었을까?
황보견우는 어제 동생 황보영우의 계책을 듣고는 무릎을 탁 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계책의 성공을 위해 하루 동안 하북팽가의 막내를 옭아 넣을 함정을 준비했다.
모든 것을 준비해 놓고 보니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이제 목표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
“쩝.”
황보견우는 수하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입맛을 다셨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황급하게 뛰어왔다.
타다닥.
발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자신의 오른팔인 송경운이었다.
황보견우의 앞에서 멈춘 송경운이 다급한 표정으로 외쳤다.
“왔습니다, 대공자님!”
송경운의 말에 황보견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자, 그럼 가 볼까!”
“네, 대공자님.”
포권한 송경운이 빠른 걸음으로 앞장섰다.
잠시 후.
정문에 도착한 황보견우는 재빨리 경비 무사를 불렀다.
그의 부름에 경비 무사 하나가 달려왔다.
“대공자님, 부르셨습니까?”
“지금 밖에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와 있다지?”
“네, 맞습니다. 그래서 대공자님께 기별을 넣었습니다. 혹시 가주님께도 따로 전해 드릴까요?”
“됐네. 아버님께 기별을 넣을 사안은 아니니, 내가 직접 맞이하겠네.”
말을 마친 황보견우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에 경비 무사는 고개를 숙였다.
가칙으로 봐도 그렇고 배분상 황보견우가 하북팽가의 사 공자를 맞이하는 것이 맞았다.
그것도 잠시 경비 무사는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대공자 황보견우의 모습에 조금 이상했던 것이다.
황보견우는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칼자루는 자신에게 넘어왔으니 이제 요리만 하면 되었다.
황보견우는 머릿속에 저울을 그려 봤다.
은자 오십 냥과 소가주 후보의 시험이라?
과연 어느 쪽에 더 무게가 실릴까?
은자 오십 냥은 한빈에게 줄 돈이었다.
절호곡 사건 이후 한빈에게 은자 오십 냥을 지불했지만, 나머지는 입을 씻고 있던 황보견우였다.
가문에 말할 이유도 자신이 나머지를 줄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황보견우에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찝찝하던 차에 지금 한빈에게 복수할 기회가 온 것이었다.
소가주 후보의 시험 때문에 황보세가를 방문한 이상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자신의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황보견우가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경비 무사가 말했다.
“대공자님, 하북팽가의 사 공자를 일단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그건 아니 될 말이지.”
“대공자님, 그게 무슨 말씀…….”
경비무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보견우가 말을 이었다.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그냥 놔두게.”
“네? 그냥 놔두라니 그게 무슨…….”
놀라 다시 묻는 경비 무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보견우가 손을 내저었다.
“어허, 자네는 내가 말한 대로 하면 되네. 나가서 보고했다고 하고 문을 걸어 잠가 놓으면 되네.”
“걸어 잠그라고요?”
황보견우의 말에 경비 무사의 눈이 커졌다.
황보세가에서 십 년 넘게 일했지만, 이런 경우는 없었다.
손님이 왔는데, 밖에 세워 놓은 채 문에 빗장을 걸어 두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가주가 안다면?
놀란 경비 무사가 다시 물었다.
“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이건 소가주로서의 명이네.”
황보견우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하자 경비 무사는 다급히 포권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소가주라는 직책을 운운하며 명을 내리자 받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 나는 잠시 자리를 비울 테니, 자네는 여기에서 한 걸음도 움직여서는 안 되네. 나는 내일 새벽에 오겠네.”
“네? 새벽이라니요, 대공자님?”
“언제부터 내 말에 토를 달았지?”
황보견우가 이마에 팔자 주름을 새기며 묻자 경비 무사는 마지못해 답했다.
“알겠습니다, 대공자님.”
경비 무사가 고개를 조아리자 황보견우는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경비 무사는 황보견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
그는 아마도 황보견우의 원수임이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노골적으로 냉대할 수는 없었다.
같은 강북 오대세가에서 온 손님을 새벽까지 밖에 세워 둔다라?
경비 무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담장 너머를 바라봤다.
“쯧쯧. 재수도 없지.”
그때 그의 동료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게 말일세. 우리 대공자님이 성격이라면 이쪽 산동에서도 한 가닥 하는 편인데, 운도 지지리 없지.”
두 명의 경비 무사는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한빈을 걱정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경비 무사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기별을 넣는다고 하고 소식이 없으면 다시 대문을 두드리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런데 대문 밖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뭐지?’
경비 무사의 머릿속에 호기심이 일었지만, 대공자의 지시가 있었기에 꼼짝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진각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함성이 울렸다.
‘뭐지?’
경비 무사는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 되었다.
“자네, 저게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겠나?”
“허, 나도 모르겠네.”
경비 무사 둘은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계속 담장 너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자 두 경비 무사는 움찔거렸다.
* * *
과연 문밖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한빈 일행은 황보세가의 문 앞에 멈춰 담장 너머 높이 솟은 전각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참을 구경하던 적혈맹호대의 일부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중 조호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와, 여기 전각이 하북팽가보다 좀 더 큰 것 같은데요.”
“어떻게 보면 하북팽가가 검소한 거지.”
“강북 오대세가는 다 이래요? 어마어마하네요.”
“뭐, 다 비슷하지.”
“에이, 아저씨. 솔직히 하북 벗어나신 게 이번이 두 번째라면서요. 지난번 하남정가가 첫 번째고요.”
“흠.”
장삼은 하늘을 보며 헛기침했다.
그때 어디선가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딱.
그 소리에 조호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빈이 불만 어린 표정으로 적혈맹호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터벅터벅.
한빈의 발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한빈은 일부러 내공을 실어 걷고 있었다.
한빈의 한 걸음 한 걸음에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얼어붙었다.
기세가 오늘따라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잔뜩 얼어붙어 있을 때 한빈이 말했다.
“오늘은 여기에 자리 깐다.”
한빈의 지시에 화들짝 놀란 소대섭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주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은 이곳에서 노숙할 테니, 자리 좀 마련하라고.”
“아니, 조금 있으면 우리를 맞을 사람이 나올 텐데 왜 여기에서 노숙을 합니까? 그것도 황보세가 정문에서…….”
“소 대주는 내가 여기에 왜 온 것 같아?”
“그야, 소가주 후보가 치러야 할 시험 때문에 오신 거 아닙니까?”
“땡, 틀렸어!”
한빈이 장난스럽게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모두가 한빈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잔뜩 얼어 있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 적혈맹호대 모두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들이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한빈이 말을 이었다.
“나는 소가주 후보 시험 같은 사소한 문제 때문에 이곳에 온 게 아니야. 바로 이것 때문이지.”
한빈은 품속에서 서찰 하나를 꺼냈다.
모두는 말없이 그 서찰을 바라봤다.
하지만, 묻는 이는 없었다.
모두가 서찰만 바라보고 있을 때 설화가 물었다.
“공자님, 그 서찰은 뭐예요?”
한빈이 고개를 돌려 설화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적절한 시점에 질문을 했다는 듯했다.
입가에 미소를 띤 한빈이 말했다.
“이건 바로 황보세가와 나 사이의 계약서지.”
뜻밖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갸웃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