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아군이냐 적군이냐? (1)
강북 오대세가 중 자신의 편이 될 가문을 찾아라.
그리고 그 가문의 가주에게 서명을 받아 오라는 시험.
그것을 통과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문제는 이 문제의 참뜻을 언제 깨닫느냐 하는 점이었다.
팽대위가 한빈이 당황할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웃고 있을 때 팽강위가 찻잔을 내려놨다.
탁!
그러고는 평소 팽강위답지 않게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그 모습에 팽대위가 물었다.
“형님, 그 표정은 뭡니까?”
“내 생각에는 한빈이 그놈이라면 가문의 누구보다도 가장 빨리 문제를 해결할 것이 분명해.”
“네? 그거 진심이십니까?”
“그놈은 호랑이가 아니라 여우 같은 놈이니까. 어쨌든 두고 보세. 나는 한 달 안에 그 시험을 통과한다는 데 걸겠네.”
“험, 그럼 저는…….”
“내기하려니 망설여지나?”
“저는 세 달, 아니 해결 못 한다에 걸겠습니다.”
“무엇을 걸겠나?”
“제가 열 살 때부터 숨겨 놓은 백아주를 걸겠습니다.”
“허허, 열 살 때라? 그럼 그때부터 술을 마셨다는 말인가? 형제도 모르게? 이건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이군.”
“헉. 제가 잘못 말했습니다, 형님. 십 년 전입니다.”
“자백은 언제 해도 얼굴이 화끈한 법이지!”
팽강위의 놀리는 듯한 말투에 팽대위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때 팽강위가 물었다.
“동생, 그런데 내가 폐관에 든 사이에 맹호 비고의 지하에 뭐라도 숨겨 놨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님.”
“버리기에는 아깝고 당장 쓸모없는 물건을 넣어 둔 게 맹호 비고의 지하가 아닌가?”
“네, 그건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놈이 왜 상으로 지하의 출입을 택한 거지? 갑자기 호기심이 드는군.”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팽대위가 말끝을 흐리자 팽강위가 턱짓을 하며 재촉했다.
“빨리 말을 해 보게.”
“아마도 연공실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연공실이라고?”
“맹호 비고의 지하에서 만 하루가 되어서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흠, 거기에서 무슨 깨달음이라도…….”
“뭐 궁금하시면 제가 지하를 한번 둘러볼까요?”
“됐네, 동생! 쓸모없는 일에 신경 쓸 때가 아니네,”
“네, 맞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팽대위는 차를 한 번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에 팽강위도 미소를 지었다.
가문의 세력 중 삼분지 일이 정리되었다.
덕분에 아직도 가문이 어수선한 상황.
일단은 가문의 결속을 다시 다져야 할 때였다.
* * *
같은 시각.
한빈은 적혈맹호대와 함께 하북팽가를 막 나섰다.
한빈은 천천히 걸어가며 품 안에서 오행 패를 꺼냈다.
오행 패를 본 이무명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사부, 이게 그 유명한 강북 오대세가 공통의 신물인가요?”
“신물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애물단지지.”
“애물단지요?”
“며칠 전에 옆에서 들었잖아. 여기에 다른 세가의 확인을 받아 오라는 거 말이야.”
“한 군데만 받아 오면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그게 쉬울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강북 오대세가의 소가주 후보들이 이 시험을 뭐라고 하는지 알아?”
“뭐라고 하는데요, 사부?”
“강북 고행(苦行).”
“고행이요?”
“그만큼 어렵다는 거지. 거기에 제 시간에 목표를 이룬 소가주 후보는 드물어. 재시험을 보게 해 달라고 가문에 애원하는 게 보통이라지. 거기까지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럼 먼저 통과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요?”
말을 마친 이무명은 머릿속에서 강북 오대세가의 소가주들을 떠올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을 보던 한빈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시험에 통과한 자들 중 자신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했는지를 말하는 자는 아무도 없어. 그게 규칙이야. 그 규칙이 없었다면 이 시험이 백 년 동안이나 이어지지 않았을 테지.”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요?”
“하지만, 나는 그 이 시험의 정답을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을 하나 알고 있지.”
“혹시 그게 누구입니까? 그럼 그 사람부터 만나러 가는 게 먼저 아닙니까? 사부.”
“굳이 만나러 갈 필요는 없어.”
“만나러 갈 필요가 없다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사부.”
“그게 바로 나니까!”
한빈이 씩 웃으며 검지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자 이무명이 입을 떡 벌렸다.
“헉, 사부!”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설화도 끼어들었다.
“공자님, 시험의 해법이 뭔데요?”
“진짜 궁금하니? 설화야.”
“저 철전 다섯 닢도 드릴 수 있어요.”
“미안한데, 철전 다섯 닢으로는 말 못 해. 이건 일급비밀이니까.”
“아.”
설화가 탄성을 흘리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빈을 쏘아봤다.
옆에서 대화를 지켜보던 적혈맹호대 대원들은 너나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또 당했냐는 표정이었다.
그때 심미호가 뭔가 생각난 듯 한빈에게 다가왔다.
“주군, 잠시만요.”
“왜? 심 부대주.”
“우리 서문세가로 가는 거 맞죠?”
“아니, 거기는 나중에 들를 거야.”
“서문무결 대협이 계시는 서문세가로 안 가시면 어딜 가신다는 건가요?”
심미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북 오대세가는 하북팽가, 산동악가, 모용세가, 황보세가, 서문세가였다.
이 중에서 한빈과 친분이 있는 곳은 산동악가와 서문세가였다.
모두 최근에 만난 서문무결이 있는 서문세가로 가는 것이 이 시험을 가장 빨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모두가 눈을 빛내고 있을 때 한빈이 답했다.
“황보세가.”
짧은 한빈에 대답에 모두의 눈이 커졌다.
심미호가 다급하게 다시 물었다.
“황보세가요?”
심미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번뜩 떠오르는 건 없지만, 이상하게 부담스러운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갸웃거리던 심미호가 깜짝 놀라 외쳤다.
“주군!”
“왜? 심 부대주?”
“황보세가면 황보견우가 소가주잖아요.”
“그렇지. 그게 왜? 문제야?”
“황보견우면 주군이 절호곡에서 뒤통수를 쳤던…….”
“아, 심 부대주, 왜 거짓말을 하고 그래? 내가 언제 뒤통수를 쳤다고?”
한빈은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돌렷다.
심미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빈을 바라봤다.
그때 심미호의 뒤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원래 때린 사람은 쉽게 잊는 법이죠.”
목소리의 주인공은 조호였다.
조호의 말에 옆에 있던 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맞은 사람은 잠 못 자도 때린 사람은 발 뻗고 자는 법이에요.”
그 말에 심미호가 물었다.
“너희들 바꿔 말한 거 아니야?”
“아, 바꿔 말했나?”
조호가 뒤통수를 긁적이자 설화가 진지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원래 때린 사람이 발 뻗고 자는 법이에요.”
설화가 눈을 빛내며 답하자 조호가 끼어들었다.
“그럼 맞은 사람은 끙끙 앓기만 하겠네.”
“그야, 당연하죠. 그런데 맞은 사람 중에도 발 뻗고 자는 사람이 있어요.”
“이거 수수께끼 같은데…….”
조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끝을 흐리자 설화가 손가락을 하나 펴며 말했다.
“맞은 사람 중 편히 자는 사람은 딱 한 종류죠.”
“정답이 뭐냐? 설화야.”
조호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설화를 바라봤다.
“죽은 사람은 발 뻗고 자죠.”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조호가 입을 딱 벌렸다.
그것도 잠시 재미있는 농담이라 생각한 조호가 활짝 웃었다.
“앗, 이거 설화한테 완전히 한 방 먹었는데. 내가 지나가는 길에 당과 하나 사 주마, 설화야.”
옆에 있던 심미호도 재미있다는 듯 엄지를 들어 올렸다.
“우리 설화가 재치가 있네!”
“헤헤.”
주변 사람들의 칭찬에 설화가 해맑게 웃었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한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웃음이 줄어들자 한빈이 심미호를 불렀다.
“심 부대주.”
“네, 주군.”
“일단 이거 받아.”
한빈은 심미호에게 전낭을 건넸다.
전낭을 확인한 심미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정도면…….”
한빈은 심미호의 추측을 끊겠다는 듯 재빨리 말했다.
“묵철 맡긴 거 찾을 돈이니, 괜한 추측 하지 말고.”
“묵철은 왜요?”
“일단, 묵철부터 찾고 나머지는 전낭 안에 서찰을 펴 봐. 거기에 해야 할 일이 적혀 있을 거야. 사냥을 하려면 일단 도구부터 갖춰야지.”
“도구요?”
“일단 출발해!”
“네, 주군.”
심미호가 깊숙이 포권했다.
잠시 후.
한빈의 지시를 받은 심미호는 비장한 표정으로 행렬에서 이탈했다.
* * *
이 주 후.
하북과 산동의 경계에 있는 가람산 아래.
그곳에는 마치 미로처럼 어지러운 전각이 들어서 있었다.
바로 강북 오대세가 중 하나인 황보세가였다.
그중 가장 활기차게 움직이는 것은 무가답게 당연히 연무장이었다.
황보세가 곳곳에 있는 연무장에서는 아침부터 기합 소리가 우렁차게 울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세가가 떠나갈 듯한 소리가 들리는 곳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황보세가의 제일 연무장이었다.
“제일식······!”
“제이식······!”
팔척 거구의 사내들이 너나없이 큰 목소리로 초식을 수련하고 있었다.
그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단상에서 내려다보는 사내가 있었다.
사내는 우울한 표정으로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황보견우.
황보세가의 소가주로 다음 세대를 책임질 황보세가의 대들보였다.
산동에서는 산동악가와 더불어 무림의 기둥이라 칭송받는 가문, 황보세가.
그 가문의 소가주라?
그 이름만으로도 황보견우의 앞날은 보장된 것이었다.
누가 봐도 앞날이 창창한 그에게는 요즘 걱정이 있었다.
그 걱정의 시작은 바로 절호곡에서 난데없이 당한 일격이었다.
육체에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지만, 정신적인 상처가 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정신적인 것이 아니라 금전적인 타격이었다.
“아, 그놈의 계약서!”
황보견우는 자신도 모르게 그날의 일을 떠올렸다.
가문에 돌아와 바로 보고를 했으면 끝날 일이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이 큰 금전적인 손해를 불렀다.
지금이라도 가문에 털어놓으면 해결될 일이지만, 그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옆쪽에서 자신의 동생인 황보영우가 다가왔다.
“형님,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혹시, 지난번에 하북팽가 막내 공자에게 당한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 아닙니까?”
“흠.”
“맞군요.”
“내 언젠가는 그놈의 목을 비틀 것이야.”
“형님, 그놈이 소가주 후보라 하지 않았나요?”
“맞아, 동생, 그러니 아마도 언젠가는 이쪽으로 오겠지.”
“소가주 후보의 시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언젠가 때가 오면 그놈이 내 앞에서 싹싹 기도록 만들어 주겠어, 팽한빈. 어차피 아무리 기어도 우리 가문에서는 못 얻어 갈 테지만 말이야.”
황보견우는 이를 꽉 깨물었다.
그 모습에 황보영우가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형님, 그 언젠가가 지금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팽한빈 그놈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다른 가문에서 벌써 거절당했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 바로 우리 가문 쪽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나한테 그 고리대금 계약서를 안겨 준 지가 언젠데, 바로 우리 쪽으로 온다고?”
“고리대금이라니요? 형님?”
황보영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황보견우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네. 그러니 신경 쓰지 말게.”
“형님,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머리를 맞대면 더 좋은 수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놈의 목을 비틀 좋은 방법이 있으면 말해 봐, 동생.”
“그러니까…….”
황보영우의 설명이 계속되자 황보견우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갔다.
설명을 다 듣고 난 황보견우의 입꼬리는 아예 귀에 걸려 있었다.
* * *
같은 시각.
하북과 산동의 경계에 있는 가람산 정상에서 황보세가의 전각을 내려다보던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귀를 긁었다.
“누가 내 얘기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