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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40화 (140/621)
  • 140화. 맹호 비고 (3)

    한빈은 코를 실룩이며 그 냄새에 집중했다.

    집중하자 코끝에서 느껴지는 냄새의 정체가 감이 잡혔다.

    그것은 돼지기름 냄새였다.

    뭐지?

    고개를 갸웃한 한빈은 그 냄새를 따라갔다.

    한빈은 책장이 올려져 있는 바닥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살짝 고민하던 한빈은 책장을 옮기는 대신 그 아래쪽을 파기로 했다.

    살짝 흙을 건들자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틱.

    소리가 나는 곳을 슬쩍 바라보니 구릿빛을 띤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한빈은 그 물체의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파내었다.

    모습을 드러낸 물체의 정체는 바로 기름 덩어리였다.

    기름은 주먹만 한 돌덩이 같았다.

    한빈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영단을 장시간 보관할 때 쓰는 방법이었다.

    영단을 넣은 보관함을 기름종이로 싼 후 그 위에 기름을 바르면 몇십 년이 지나도 영단의 진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마련이었다.

    이것을 발견한 것은 어찌 보면 천운.

    기름을 두껍게 펴 바른 덕분에 냄새를 맡을 수 있던 것이다.

    한빈은 기름을 걷어 낸 후 드러난 기름종이를 조심스럽게 펼쳤다.

    얼마나 꼼꼼히 싸 놨는지 기름종이를 벗기는 데에 품이 들었다.

    겨우 기름종이를 벗기자 손톱만 한 작은 은빛 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빈의 예상대로 영단을 넣어 두는 보관함이었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것은 마교의 물건이 아니라 북해빙궁의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남들이라면 그냥 구슬이라고 생각할 테지만, 한빈의 전생 강호 짬밥은 어디 가지를 않았다.

    그는 이 구슬의 정확한 사용법을 알고 있었다.

    한빈은 조심스럽게 조그마한 은빛 구슬을 잡고 진기를 불어넣었다.

    스르륵.

    은빛 구슬이 돌아가며 반으로 갈라졌다.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천마신단이 모습을 드러낼 차례이기 때문이다.

    뭐지?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은빛 구슬의 안에는 손톱의 사분지 일만 한 투명한 수정이 들어 있었다.

    이게 천마신단?

    분명 아니었다.

    구슬의 안을 살펴보던 한빈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것은 북해빙궁의 보물이라 불리는 만년빙정이었다.

    당장 쓸모는 없지만, 쓰임에 따라서는 웬만한 세가 하나를 살 수 있는 값어치의 보물.

    이 보물이 왜 여기에?

    고민도 잠시 한빈은 재빨리 구슬을 원상태로 돌려놨다.

    한기가 새어 나가는 만큼 값어치도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만년빙정이란 물건이 더위에 녹을 물건은 아니지만, 세상의 탁기에 노출시킬 필요는 없었다.

    스륵.

    구슬을 원상태로 만든 한빈은 만년빙정이 담긴 구슬을 자신의 목걸이에 넣었다.

    전에 청명환을 보관했던 바로 그 목걸이였다.

    천마신단과 만년빙정이 한 곳에서 발견될 가능성은 없는 법.

    한빈은 일단 천마신단을 찾는 것은 포기하고 가부좌를 틀었다.

    서문무결이 준 영단을 흡수하기 위해서였다.

    한빈은 품에서 서문무결이 준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어 보니 백색의 영단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서문세가의 삼대기물(三代奇物) 중 하나라는 태양단이었다.

    한빈은 지체 없이 태양단을 삼켰다.

    청아한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히더니 목구멍 속으로 스르르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다.

    한빈은 천천히 들숨과 날숨을 반복했다.

    특별한 상승 심법이 아닌 민간에서도 흔히 쓰는 운기 토납법.

    모든 것이 최고의 상승 심법을 익히기 위한 길이었다.

    개구리가 높이 뛰기 위해서는 잔뜩 움츠리는 법.

    사실 용린겁법을 익히지 못했다면 이런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상승 심법 없이 영약으로 일 갑자를 얻는다?

    용린검법의 회복 속성이 없었다면, 혈맥이 터졌을 것이다.

    지금도 혈맥을 보호하기 위해 회복의 속성을 끊임없이 쓰는 중이었다.

    잠시 후.

    한빈이 눈을 떴다.

    한빈의 눈에 잠시 동안 상서로운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누가 봤다면 환골탈태라도 했다고 할 수준.

    하지만,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상승 심법 없이 일 갑자에 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된 것이다.

    지금 한빈이 흡수한 기운은 정확히 오 년의 내공이었다.

    이제는 오십오 년의 본신 내공을 지니게 된 것이었다.

    만약 태양단이 처음 먹는 영약이라면 십 년의 내공은 거뜬할 터.

    하지만, 이미 많은 영약을 섭취한 한빈이기에 효력이 급감한 것이었다.

    뭐, 예상했던 결과였다.

    영약의 복용 횟수가 증가할수록 그 효과는 감소한다는 것은 강호인 누구나 아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한빈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가늠해 보았다.

    아마 다섯 시진은 지났을 것 같았다.

    한빈은 천천히 벽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정을 잡고 용린검법의 초식을 운용했다.

    ‘일촉즉발.’

    정의 끝에 푸른 검기가 일렁이자 한빈은 그것을 검처럼 벽에 찔러 넣었다.

    푹!

    단단한 청강석으로 만든 벽이 기로 감싼 정 앞에서는 두부가 뭉개지듯 힘없이 뚫렸다.

    잠시 벽을 바라보던 한빈은 같은 동작을 몇 번 반복했다.

    푹!

    마지막으로 벽을 찔렀을 때였다.

    그 벽 속에서는 기름이 조금씩 흘러나왔다.

    한빈이 지금 한 행동은 기관 장치에 흠집을 내기 위함이었다.

    지금 한빈은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기름이 공급되는 통로를 찾았던 것이다.

    한빈이 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간단했다.

    한빈은 미래의 화근을 제거하려 하고 있었다.

    미래의 화근이라?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한빈이 오늘 맹호 비고 내에서 천마신단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거나, 아니면 앞으로 누군가 가져다 놓은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누군가가 만년빙정은 취하고 마교의 표식을 가져다 놓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한빈은 일단 첫 번째 가능성은 제거해야 했다.

    만에 하나 맹호 비고 내에서 마교의 물건이 발견된다면?

    거기에 더해 천마신단이나 기연이 안에 남아 있다고 해도 자신이 못 찾은 것을 남이 찾아서는 안 되었다.

    내가 못 먹는 건 남이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로 그의 철칙 중 하나였다.

    한빈은 기름이 바닥을 적당히 적실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고는 천천히 밖으로 나가는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거의 오른 한빈은 만년빙정을 감쌌던 기름종이에 불을 붙였다.

    후르륵.

    타오르는 기름종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아래로 던졌다.

    순간 한빈의 눈동자에 비치는 타오르는 불꽃.

    한빈은 앓던 이가 빠진 것 같은 시원한 표정으로 지하의 문을 닫았다.

    맹호 비고의 설계상 지하에서 다른 층으로 불이 옮겨붙을 염려는 없었고 지하는 깨끗이 청소될 것이었다.

    두 번째 가능성인 차후 적이 들어와 가문을 모함할 가능성도 지하층의 전소로 해결될 것이다.

    화재를 빌미로 앞으로 지하를 다시 꾸미며 함정을 만들어 놓을 테니까!

    “잘 가라!”

    한빈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맹호 비고 입구의 손잡이를 돌렸다.

    * * *

    스르륵.

    맹호 비고의 손잡이가 돌아가자 경비 무사들이 눈을 크게 떴다.

    들어간 지 하루가 지난 한빈이 걱정되어 가주에게 보고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하던 참이었다.

    그 상황에서 맹호 비고의 문이 열린 것이었다.

    바깥에서는 서책에 나와 있는 대로 돌려서 열어야 하지만, 나올 때는 안쪽에서 사람이 열 수 있었다.

    덜컹.

    문이 열리고 한빈이 걸어 나왔다.

    한빈은 무사들에게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고생들 하라고.”

    “고,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냐니 그게 무슨 말인가? 잠깐 있는 동안 생길 일이 무엇이 있다고?”

    “앗, 잠깐이라니요? 저는 들어가신 지 하루가 넘었길래 걱정돼서 여쭤본 겁니다.”

    “하루?”

    한빈이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경비 무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네, 거기 안쪽에는 먹을 것이 있을 리가 없고…….”

    한빈이 재빨리 말을 끊었다.

    “걱정해 줘서 고맙네.”

    손을 내저었다.

    한빈이 자리를 떠나자 경비 무사가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기름 냄새 같은 게 나지 않나?”

    “기름은 무슨 기름? 배고파서 그런 거지.”

    “그런가? 그러고 보니 우리 한 끼도 못 먹었네.”

    경비 무사의 말은 진심이었다.

    맹호 비고에 출입할 수 있는 것은 하북팽가의 직계.

    평상시에는 경비 업무지만, 하북팽가의 직계 중 누군가가 맹호 비고에 들어간다면 임무는 호위 업무로 변한다.

    그런 이유로 맹호 비고를 담당하는 경비 무사 모두가 출동해서 뜬눈으로 밤을 새운 것이었다.

    경비 무사 하나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단 교대로 밥부터 먹고 오세.”

    “맞네.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경비 무사들은 한빈이 자리를 뜨자 누가 먼저 식당에 갈 건지를 상의했다.

    * * *

    처소로 향하던 한빈의 표정만큼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진지했다.

    ‘하루라?’

    분명 몇 시진이 지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이것도 효율성의 문제인 것 같았다.

    한빈이 피식 웃으며 고민을 끝냈을 때였다.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허겁지겁 달려오는 철노가 시야에 들어왔다.

    한빈의 앞까지 뛰어온 철노는 대나무로 만든 만두 통을 끼고 있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 그거 만두 맞지?”

    “네, 맞습니다. 공자님.”

    “여기서 먹자.”

    한빈이 바닥을 가리키며 철푸덕 앉자 철노가 황당하다는 듯 바라봤다.

    “여기서 드시게요? 체통이 있지 어떻게 여기서 드시려고요?”

    “에이, 내가 체통이 어디있어? 체통도 죽으면 쓸데가 없잖아, 철노.”

    “뭐, 하긴…….”

    철노가 만두 통을 내려놨을 때였다. 그의 뒤에서 누군가가 고개를 내밀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설화가 뭔가 못마땅한 듯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빈은 만두를 베어 물려다가 설화에게 물었다.

    “설화야, 무슨 일이라도 있어?”

    “뭔가 혼자 맛있는 거 드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요.”

    “허, 저 안에 맛있는 게 뭐가 있다고?”

    “그건 아는데 당과보다 맛있는 걸 드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흠, 절대 아니야!”

    한빈이 재빨리 손을 젓자 설화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한빈은 고개를 돌리고 여유 있게 만두를 베어 물었다.

    역시 설화의 눈치는 대단했다.

    설화가 생각하는 맛있는 간식은 아니지만, 서문세가의 태양단을 취했으니.

    어떤 음식보다 값진 것을 먹었다 할 수 있었다.

    잠시 상념에 잠겼던 한빈이 뭔가 기억난 듯 손가락을 튕기며 철노를 바라봤다.

    “참, 지난번에 옷깃이 상한 건 왜 그런거야? 철노.”

    “에이, 일찍도 물어보시네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공자님.”

    철노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한빈은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기에 더는 묻지 않고 만두를 베어 물었다.

    * * *

    삼 일 후, 하북팽가 가주전.

    팽강위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앞에 두고 팽대위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때 무사 하나가 가주전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타다닥.

    포권한 무사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가주님, 사 공자가 막 떠났습니다.”

    “수고했네.”

    무사가 떠나자 가주 팽강위는 말없이 동생 팽대위를 바라봤다.

    팽대위도 눈으로 웃음을 지었다.

    서로 아무 말 없이 차를 홀짝이다가 집법당주 팽대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걸릴까요?”

    “동생 생각에는 얼마나 걸릴 것 같은가?”

    팽강위는 동생 팽대위에게 되물었다.

    “아마도 제가 못 풀었으니, 그놈도 못 풀지 않을까요?”

    팽대위는 씩 웃었다.

    물론 여기서 그놈이란 한빈을 말하는 것이었다.

    팽대위는 예전 일을 떠올렸다.

    팽대위도 예전에 소가주를 놓고 팽강위와 경쟁을 펼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당시 팽대위는 첫 번째 시험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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