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맹호 비고 (2)
철노는 문도 닫지 않고 약간 화난 표정으로 한빈을 쏘아봤다.
“아, 공자님! 오셨으면 저부터 찾으셨어야죠.”
“철노, 미안해. 나도 가주님께 불려 갔다가 지금에서야 온 거야.”
“그런데, 아직도 가주님 보고 아버지라고 안 하시네요.”
철노가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뭐,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하니까.”
한빈이 씩 웃었다.
언젠가는 가문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이 상반될 때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아직 먼 이야기를 생각하는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였다.
한빈의 웃음을 본 철노가 말했다.
“아, 공자님도 너무하시네. 그리고 걱정했다고 한마디 해 주시면 어디 덧나나요? 그렇게 웃으시면 저 서운합니다.”
“에이, 당연히 걱정했지. 혼자서 천수장과 여길 오가면서 관리하느라 고생할 철노를 생각하면 내가 잠이 왔겠어? 그런데 어디 갔다 온 거야? 방에 와서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서 걱정했지 뭐야.”
“걱정해 주신 건 감사한데요. 뭔가 엎드려 절받기 같은 느낌이…….”
철노는 말끝을 흐리며 탁자 위에 간식거리를 내려놓았다.
탁!
철노는 탁자 위에 커다란 대나무 통을 열었다.
순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옆에서 지켜보던 설화는 눈치를 보다가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재빨리 만두를 하나 잡았다.
“아, 맛있네요.”
“설화야, 그거 내가 직접 만든 거다.”
“헐, 철노 아저씨, 나중에 객잔 하나 차리셔도 되겠네요. 당과만큼 맛있어요.”
“그래, 고맙다. 그런데 이거 칭찬 같지 않은데.”
“칭찬 맞아요, 아저씨.”
설화는 만두를 입에 넣은 채 엄지를 들어 올렸다.
둘이 대화를 나눌 때 철노를 훑어보던 한빈이 눈을 빛냈다.
철노의 옷자락이 살짝 찢어진 것을 발견했다.
“철노, 또 누가 괴롭힌 거야? 옷이 왜 그래?”
한빈의 말에 옆에서 당과를 먹던 설화도 눈을 크게 떴다.
“철노 아저씨, 누구한테 맞았어요? 제가 대신 때려 줄까요?”
설화의 말에 철노가 발끈하며 일어났다.
“와, 설화야. 내가 어디서 맞고 다닐 사람처럼 보이냐?”
“조금요…….”
“와, 이거 너무하네. 설화 너, 진짜 나를 얼마나 물로 봤다는 거야?”
“그러니까…….”
설화는 철노를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생각해 보니 철노는 설화에게 있어서 훌륭한 간식 공급처였다.
설화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알아요. 왕년의 무공만 찾으시면 다 끝장나잖아요. 그런데 아직 무공을 못 찾으셨으니 걱정하는 거죠.”
“그래, 알아주니 고맙다.”
그때 한빈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철노, 그 옷은 왜 그런 거냐니까? 대체 누가 괴롭힌 거야? 대충 들어 보니 정화 부인 쪽은 다 갈려 나간 것 같은데.”
“뭐, 갈려 나갔다기보다는 그냥 제 발로 걸어 나갔죠.”
“제 발로 걸어 나가?”
한빈은 턱을 괴며 고개를 기울였다.
정화 부인이 숨겨 놓은 재산은 한빈이 이미 털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화 부인이 빈손으로 나갔을 리가 없다.
한빈의 표정을 본 철노가 말했다.
“그날 난리도 아니었어요.”
“그날이라고?”
“네, 그날이요, 그러니까…….”
철노는 침을 튀겨 가며 자신이 본 장면을 설명했다.
이야기는 간단했다.
가주 팽강위가 폐관 수련에서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정화 부인은 하북팽가의 곳곳을 털어 야반도주를 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마차에 재물을 싣고 하북팽가에서 떠나려는 순간 폐관 수련을 하고 있던 팽강위가 나와서 막아섰다고 한다.
여기에서 철노가 이야기를 끊고 만두를 하나 베어 물자 턱을 괴고 옛날이야기를 듣는 듯 집중하던 한빈이 재촉했다.
“그래서?”
“뭐, 결론은 비녀까지 반납하고 나갔어요.”
“아, 그래서 아까 분위기가 안 좋았었구나.”
“당연히 안 좋죠. 둘째 공자도 정화 부인과 같이 나갔거든요.”
“혹시 셋째 형님은 남아 있단 이야기야?
“네, 셋째 공자님은 남았어요.”
한빈은 슬쩍 입맛을 다셨다. 한빈은 정화 부인이 그렇게 빨리 나갈지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한빈이 알았으면 뒤를 밟을 사람을 붙여 놨을 것이었다.
하남정가와 하북팽가를 전복하려 했던 시도가 정화 부인과 정휘지 둘만의 계획일까?
한빈은 둘 이외의 인물이 개입했다고 확신했다.
이것은 전생의 기억에 근거한 것은 아니고, 한빈의 느낌이었다.
원래 불길한 예감은 딱 들어맞는다는 강호 속담이 있지 않은가?
그때 해가 지고 멀리서 희미하게 달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나갔다 올게.”
“야심한 밤에 어디를 가세요?”
“아, 철노 왜 그래? 솔직히 야심한 밤은 아니잖아.”
“그런가요? 그런데 어디 가세요?”
“맹호 비고에 잠시 산책 좀 다녀올게.”
“맹호 비고요?”
“가주님께는 허락 맡은 일이니 걱정하지 말고. 여기에서 설화랑 좀 놀고 있어.”
“네, 알았어요. 제가 설화 잘 보고 있을게요.”
철노가 가슴을 팍팍 치며 말하자 한빈은 씩 웃으며 물었다.
“참, 정이 어디 있는지 알아?”
“정은 연무장 옆에 있을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정은 왜요? 망치는 필요 없으세요?”
“망치는 필요 없어. 고마워, 철노.”
말을 마친 한빈은 번개처럼 방을 빠져나갔다.
* * *
맹호 비고는 칠 층짜리 전각이었다.
건물의 높이로는 하북팽가에서 가장 높기에 하북팽가 밖에서 본다면 꼭 탑처럼 보인다.
그래서 강북 무림인들은 하북보탑(河北寶塔)이라는 말로 맹호 비고를 부르기도 한다.
진귀한 보물이 쌓여 있는 탑.
그것이 맹호 비고에 대한 가문과 강호인의 생각이다.
물론 오 층 이상에 한해서였다.
한빈이 맹호 비고 앞에 도착하자 경비 무사 중 하나가 달려왔다.
잔뜩 긴장한 경비 무사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사 공자님, 오셨습니까?”
“얘기는 들었지?”
“네,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하층만 개방하면 되는 게 맞나 모르겠습니다.”
경비 무사의 말에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럼 지금부터 지하층을 개방하겠습니다.”
“그럼 부탁해.”
“그리고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말해 봐.”
“절대 다른 층은 안 됩니다. 제가 받은 명령서에는 지하층만 개방하면 된다고 표시되어 있습니다.”
“아, 걱정하지 말고. 지하층만 열어 줘.”
“진짜 괜찮으신 거죠? 공자님.”
“괜찮다고 해도.”
“지하층은 청소도 안 되어 있습니다. 진짜 괜찮으신 거죠? 나중에 다른 말 하시면 안 됩니다.”
“걱정하지 말고 열어 줘.”
“네. 알겠습니다, 공자님.”
경비 무사는 몇 번을 확인하고 지하층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비고를 개방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먼저 경비 무사가 기름종이에 싸인 서책 하나를 꺼내어 서책 중 지하를 열 방법이 적혀 있는 곳을 펴서 확인했다.
그리고 서책에 적혀 있는 대로 비고 앞에 있는 원형의 문을 순서에 맞춰 돌려야 문이 열리는 방식이었다.
그 문을 어떻게 돌리느냐에 따라 열리는 층수도 달라졌다.
끼기-긱!
마치 계단이 긁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멈추자 비고를 지키는 무사 넷이 한 번에 달려들어 비고를 열었다.
드드득!
관절이 어긋나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거대한 비고의 문이 열렸다.
한빈이 안으로 들어가자 경비 무사들은 다시 문을 닫고 원형 손잡이를 돌렸다.
문을 닫고 난 무사 하나가 말했다.
“사 공자가 미친 거 맞긴 맞나 봐.”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수많은 부탁 중에 왜 맹호 비고의 지하를 보겠다고 한 건지 이해가 안 가서. 차라리 영약 하나 내려 달라고 하는 게 남는 장사지.”
“밑에 숨겨 둔 보물이라도 있나 보지 뭐.”
“보물은 무슨 보물, 우리가 십 년 동안 지하를 연 적이 있었어?”
“그야 당연히 없었지,”
“그러니까 하는 말이네. 십 년이면 보물도 썩었겠어.”
“생각해 보니 그게 맞네.”
“옆에서 보니까 내가 안타깝네. 그 좋은 기회를 날린 거지.”
“하하, 사 공자의 판단이 그렇지 뭐. 이번 하남정가 일도 사 공자가 한 일은 없었다면서? 그 뭐더라……. 맞다, 청운사신이 다 해 준 거라던데.”
“하하, 그러고 보니 사 공자가 운이 좋긴 좋아.”
경비 무사들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 * *
한빈은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은 생각보다 밝았다.
계단의 중간중간에는 등불이 생선 기름 냄새를 풍기며 타고 있었다.
아마도 내려가는 사람에 맞춰 지하의 불도 켜진 것 같았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맹호 비고를 설계한 것이 진법과 기관에 능한 제갈세가라고 한다.
흔히 병법을 포함한 학문에 관해서는 남제갈 북모용이라고 강호인들은 말한다.
왜 가까운 모용세가를 놔두고 제갈세가에 부탁했을까?
어찌 보면 강북 오대세가 중 하나인 모용세가보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제갈세가가 부탁하기에 편했을지도 모른다.
가까운 만큼 불편한 것이 바로 강북 오대세가 간의 관계.
한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하층에 도착했다.
경비 무사가 걱정한 것보다 지하는 잘 정리되어 있었다.
물론 벽에 아무렇게나 세워 둔 병장기와 가끔 보이는 거미줄을 본다면 왜 지하를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한빈에게 필요한 것은 겉모습이 아니라 바로 속이었다.
한빈이 지금 찾으려고 하는 것은 앞으로 하북팽가를 바닥으로 끌어 내릴 한 사건의 단초가 되는 것이다.
바로 하북팽가의 마교 연류설과 관련된 것.
이 일은 막 정마대전이 터진 후 생길 일이었다.
정마대전이 발발하고 얼마 안 된 시점, 천마신단 반쪽이 하북팽가의 비고에서 발견되는 일이 발생한다.
천마신단이라면 마교에서도 천마의 후인에게 내리는 영단.
그 영단이 비고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하북팽가는 이 일을 무마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가세는 반의반 토막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이건 전생의 기억.
본래에는 천천히 해도 될 일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미묘하게 어그러진 것을 보고 지금 확인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하북팽가의 역사는 이미 바뀌었다.
그것은 바로, 이 공자가 정화 부인과 함께 쫓겨난 것이었다.
이게 뭔 대수냐고 세인들은 말하겠지만, 전생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한빈에게는 커다란 사건이었다.
전생의 기억에서는 이 공자가 소가주가 되고 나중에는 가주 자리까지 오른다.
이 공자가 나갔으니 하북팽가의 역사는 전생과는 다르게 움직일 터였다.
뭐, 중요한 것은 바로 오늘이었다.
‘만일 오늘 여기서 천마신단을 발견한다면?’
물론 한빈이 바로 취할 것이었다.
마교의 신단이라고 해서 정파의 영단과 그리 다를 것은 없었다.
천마신단의 재료의 가장 큰 부분이 얼마 전 취한 천산혈랑의 내단이었다.
진짜 천마신단을 구할 수 있다면?
오늘 천지일연공의 첫 번째 단계를 실행할 수 있을 것이었다.
한빈은 전에 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정으로 바닥의 틈을 찍었다.
픽!
내공을 담아 찍자 바닥 사이로 정이 들어갔다.
한빈은 지렛대처럼 정을 사용해 바닥을 들어 올렸다.
순간 팔뚝만 한 청강석 조각이 올라왔다.
한빈은 그것을 시작으로 바닥을 헤집기 시작했다.
툭. 툭.
청강석 조각이 구석에 쌓이기 시작했다.
툭. 툭.
한빈은 계속 바닥을 제거해 나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초식을 떠올렸다.
‘전광석화.’
정이나 검이나?
사용하기 나름이라는 게 한빈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
이런 작업에서도 속도가 빨라졌다.
청강석이 점점 쌓이자 바닥에서는 이제 습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천마신단이 들어갈 만한 장소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꿉꿉한 냄새 사이로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살짝 섞여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