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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38화 (138/621)
  • 138화. 맹호 비고 (1)

    한빈은 허허롭게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조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보는 곳과 주군이 보는 곳이 같을까요?”

    조호가 한빈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장삼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마도…….”

    “같았으면 좋겠네요.”

    조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날 오후, 하북팽가 가주전.

    한빈은 천천히 가주전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따르는 맹호사대의 어깨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맹호사대는 강남 무림이 흔들릴 뻔한 사건을 막은 주역 중 하나였다.

    만약 하남정가가 정휘지에 손에 들어갔다면?

    그 파장은 강남 무림이 아닌 하북팽가로 먼저 전해졌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한빈과 맹호사대는 하북팽가를 구한 셈이 되었다.

    가주전에 들어선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원로와 각주를 바라봤다.

    일단 분위기를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곧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한빈과 맹호사대의 귀환은 분명 전쟁에서 승리한 군대의 행렬과도 같았다.

    그에 맞는 자리가 되어야 할 가주전이 의외로 썰렁했다.

    원로와 각주의 수도 줄어든 것 같고 남은 각주들마저도 한빈과 눈이 마주치면 피하기에 급급했다.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태사의를 바라봤다.

    태사의에는 가주 대행인 팽대위가 아니라 진짜 가주, 팽강위가 앉아 있었다.

    뭐지?

    한빈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한빈의 기억대로라면 팽강위의 폐관 수련은 아직 기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아마도 정화 부인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폐관을 깨고 나온 것 같았다.

    한빈은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과연 벽을 깼을까?

    만약 벽을 깼다면 한빈이 알고 있던 하북팽가의 미래가 미묘하게 바뀔 것이다.

    그럼 거기에 맞춰 한빈의 행보도 바꿔야 했다.

    그때 태사의 위에서 팽강위가 일어났다.

    벌떡 일어난 그는 천천히 한빈에게 다가왔다.

    터벅터벅.

    마치 내공을 실어 걷는 것처럼 가주전이 울렸다.

    모두가 시선을 집중하고 있을 때 팽강위가 말했다.

    “그동안 많이 컸구나.”

    “…….”

    한빈은 아무 말 없이 그 뜻을 되새겨 봤다.

    몸집이 컸다는 건 아닌 것 같고 한빈이 지닌 내력을 알아본 것 같았다.

    팽강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임무 완수를 축하한다. 네 덕분에 하북팽가도 깨끗해졌구나.”

    살짝 고개를 숙이는 한빈.

    그의 눈이 슬쩍 원로와 각주를 향했다.

    이제야 떨떠름한 분위기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팽강위가 깨끗해졌다고 하는 것을 보면 정화 부인의 세력이 모두 정리된 것이 분명했다.

    재빨리 표정을 수습한 한빈이 답했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흠.”

    팽강위는 뭔가 아쉬운 듯 헛기침을 했다.

    뭘까?

    한빈은 눈매를 좁히며 팽강위를 바라봤다.

    가만히 팽강위를 바라보던 한빈의 눈이 커졌다.

    비록 기세를 숨기고 있지만, 팽강위는 분명 변했다.

    한빈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화경에 드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한빈이 팽강위를 다시 바라봤다.

    전에는 초절정과 화경의 경계에서 각각의 경지에 한 발씩 걸쳐 놓은 모호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화경의 기세였다.

    다른 이라면 몰라봤겠지만, 한빈은 서문무결과의 동행 이후 이런 기세에 대해 분명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팽강위가 화경에 들기까지 걸린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한빈의 계획도 미묘하게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한빈의 말에 팽강위가 다시 헛기침했다.

    “험.”

    그 헛기침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님이 화경에 드셨다고?”

    “이럴 수가!”

    여기저기서 탄성이 튀어나오다가 모두가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가주님, 경하드립니다!”

    “가주님의 성취를 축하드립니다!”

    모든 함성이 잦아들자 팽강위는 품속에서 적색 깃발을 꺼냈다.

    그러고는 한빈에게 건넸다.

    한빈은 공손히 그 깃발을 받아서 펼쳤다.

    적색 깃발의 앞에는 적혈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고 뒤에는 맹호라고 적혀 있었다.

    한빈이 깃발을 확인하자 팽강위가 외쳤다.

    “오늘부로 맹호사대를 적혈맹호대로 칭하며 세가 밖에서의 단독 권력 행사를 인정한다.”

    팽강위의 명에 한빈이 무릎 꿇고 답했다.

    “가주님의 명, 받들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뒤돌아 다시 깃발을 펼쳤다.

    동시에 울리는 함성.

    “와아!”

    “해냈다!”

    맹호사대라는 칭호를 받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독립적인 외부 활동을 인정하는 무력대로 거듭난 것이었다.

    대주인 소대섭부터 막내 무사 조호까지 모두 소리를 지르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때 장삼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런데 왜 적혈이지?”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한빈을 향했다.

    그러고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 무복의 한빈을 보니 팽강위가 왜 적혈맹호대라 칭했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팽강위는 적혈맹호대 대원들이 기쁨을 나눌 시간을 주었다.

    이것은 팽강위가 막내 공자에게 행할 수 있는 예의였다.

    시간이 지나 웅성거림이 잦아들자 팽강위는 손뼉을 쳤다.

    짝짝.

    동시에 무사 하나가 쟁반을 들고 왔다.

    그 위에 오각형 모양의 패가 놓여 있었다.

    쟁반 위의 물체를 본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한빈은 물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오행 패라 불리는 물건이었다.

    오행 패라?

    한빈은 얼마 전 서문무결과 대화 도중 나왔던 소가주 후보의 시험에 대해 떠올렸다.

    이것은 소가주 후보가 되면 당연히 치러야 할 시험이었다.

    오행 패의 손잡이 부분에는 글자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북오대가(北五代家)

    그것은 강북 오대세가를 나타내는 표식.

    이 시험은 하북팽가의 자제만 치르는 시험이 아닌 강북 오대세가의 소가주 후보라면 누구나 치러야 하는 시험이었다.

    오행 패를 잡은 팽강위는 다섯 면 중 한 곳에 손을 올려놨다.

    동시에 팽강위의 손이 오행 패의 한 면에 글자를 새겼다.

    투득.

    일필휘지로 글자가 새겨졌다.

    그곳에는 ‘하북팽가’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음각의 깊이와 넓이였다.

    깊이는 일정했으며 넓이는 마치 세필로 적어 놓은 것처럼 가늘었다.

    이것은 손가락을 직접 대지 않고 진기를 흘려보내 새겼다는 것이었다.

    팽강위는 오행 패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빈에게 건넸다.

    한빈이 두 손으로 공손히 오행 패를 받아 들자 팽강위가 사람 좋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 오행 패에 가문의 이름을 적는다는 것은 너를 도와주겠다는 표시이다. 가문을 다스리려면 혼자의 힘만으로는 벅찬 법. 네 아군을 만들어 오거라. 기간은 석 달이다. 만약…….”

    팽강위는 말끝을 흐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의 눈빛을 각인하려는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이었다.

    한빈은 주눅 들지 않고 그 눈빛을 받았다.

    잠시 오가는 눈빛.

    팽강위가 만족스러운 듯 기세를 거두며 말을 이었다.

    “만약 실패한다면 소가주의 자리를 포기하는 것으로 알겠다.”

    한빈이 즉시 포권하며 외쳤다.

    “명 받들겠습니다, 가주님!”

    말을 마친 한빈은 돌아서서 오행 패를 높이 올렸다.

    순간, 적혈맹호대 대원과 원로 그리고 각주 들이 동시에 바닥에 병장기를 찍기 시작했다.

    쿵! 쿵!

    모두의 소리는 하나가 되어 가주전에 울렸다.

    하지만,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적혈맹호대의 대원들은 한껏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반해 원로와 각주 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 팽강위가 말을 이었다.

    “이제 이번 임무 완수에 대해 포상을 하겠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보아라.”

    한빈은 눈을 빛냈다.

    적혈맹호대로의 승격은 단체에 대한 포상이고 개인에 대한 포상이 뒤따라야 했다.

    이것은 한빈이 기다렸던 말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답했다.

    “맹호 비고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하는 한빈의 모습에 팽강위가 호기심이 이는 듯 다시 물었다.

    “맹호 비고라?”

    “네, 맹호 비고에서 잠시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순간 여기저기서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곳은 원로와 각주가 있는 자리였다.

    “맹호 비고는 소가주부터 들어갈 수 있잖아. 그런데 소가주 후보가 맹호 비고에 들어가겠다고?”

    “그렇지, 아무리 공을 세웠다고 해도 소가주 후보가 맹호 비고에 들어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모두가 웅성거릴 때 팽강위가 다시 물었다.

    “몇 층을 원하느냐?”

    “저는 지하를 원합니다.”

    한빈의 대답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팽강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소가주부터 출입이 허락되는 것은 오 층부터.

    즉, 오 층부터 비급과 쓸 만한 병기들이 존재했다.

    나머지 층은 가주의 허락만 있으면 출입할 수 있었다.

    더욱이 비고라고는 하지만, 지하에는 전부 쓰레기밖에 없었다.

    조금 전 원로와 각주들이 웅성대던 이유도 맹호 비고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것을 오 층 이상으로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오 층 이상을 제외하고는 맹호 비고에 들어갈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이것은 팽강위가 생각지도 못한 부탁이었다.

    팽강위는 조금 전 웅성대던 원로와 각주를 바라봤다.

    힐끔 살펴보니 그들도 한빈의 부탁이 의외인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팽강위는 잠시 고심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겠다. 출입은 오행 패의 시험을 위해 떠나기 전 아무 때나 관계없다.”

    “감사합니다, 가주님.”

    “흠.”

    팽강위가 다시 헛기침했다.

    한빈은 그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계속 아쉬운 듯 헛기침하는 모습이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빈과 적혈맹호대가 가주전을 떠나자 팽강위는 동생 팽대위를 바라보며 다시 헛기침했다.

    “험.”

    “왜 그러십니까, 형님? 술이 생각나십니까? 화경에 오르신 지도 얼마 안 됐으니, 술은 멀리하시고 운기에 집중하셔야 합니다.”

    “허, 내가 술을 원하는 것 같은가? 동생.”

    “그럼 아닙니까?”

    “그냥 섭섭해서 그러네.”

    “섭섭하다니요. 모든 일은 잘 마무리되지 않았습니까?”

    “모든 일이 마무리됐으니 저놈이 아비라고 한 번은 불러 줄 줄 알았는데, 아비의 ‘아’ 자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으니 섭섭할 수밖에 없지.”

    “형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뜻밖입니다. 항상 공과 사는 분명히 하라고 하셔 놓고요.”

    “감정이란 놈은 호신강기를 둘러도 주체가 안 되는 것 같네. 나도 모르게 감정을 드러내는 걸 보면 나도 이제 나이를 먹는 것 같군, 동생.”

    “하하, 오늘은 그냥 술 한잔하셔야겠습니다.”

    씩 웃은 팽대위는 대나무 통 하나를 꺼냈다.

    순간 팽강위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잠시 후.

    모두가 떠난 가주전에서는 팽강위와 팽대위의 웃음소리가 해가 질 때까지 이어졌다.

    * * *

    한빈은 간만에 하북팽가 내 처소로 돌아와 창을 활짝 열어 놓고 있었다.

    지는 해를 바라보는 한빈은 마치 때를 기다리는 강태공처럼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한빈은 지금 맹호 비고에 갈 시간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해가 붉은 꼬리만 남기고 자취를 감추자 한빈이 나지막이 말했다.

    “역시 지는 해는 하남이나 하북이나 똑같아.”

    “당과도 하남의 당과나 하북의 당과가 똑같아요.”

    설화가 슬쩍 끼어들자 한빈이 고개를 돌렸다.

    설화 앞에는 당과가 잔뜩 있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당과는 하남하고 하북의 맛이 다를 텐데?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하는데, 맛이 똑같을 수가 없지.”

    한빈의 말에 설화가 당과를 베어 물며 말했다.

    “맛있는 건 똑같아요. 헤헤.”

    설화가 웃고 있을 때 방문이 열렸다.

    덜컹.

    열린 문으로 철노가 씩씩대며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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