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실력의 삼 할을 숨기는 법 (3)
한빈이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아쉽습니다.”
“언제 서문세가로 오게. 내가 톡톡히 대접하지, 아니 자네를 가문의 귀빈 맞겠네.”
“말씀이라도 고맙습니다.”
한빈이 쓱 고개를 숙이자 서문무결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빈말이 아니니, 꼭 오게. 생각해 보니 소가주 후보라면 언젠가는 오대세가에 한 번쯤은 들러야 하지 않나?”
“하하, 오대세가 소가주 후보라면 치러야 하는 시험을 말씀하시는군요.”
“그렇지. 그때 내가 도와주겠네.”
“아닙니다. 제힘으로 해결하겠습니다.”
“허울뿐인 시험인데 꼭 힘을 뺄 필요가 있겠나? 그 시간에 나와 비무를 하는 게 더 나을 텐데…….”
서문무결은 또다시 아쉬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때 뒤에서 서문진경이 재촉하듯 말했다.
“아버님,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허허, 우리 애들이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그러니 이만 가 보겠네.”
“네, 살펴 가십시오.”
한빈은 깊숙이 포권했다.
서문무결은 아쉬운 듯 미소를 한 번 더 지은 뒤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한빈도 아쉬운 듯 멀어지는 그의 등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자신의 검, 월아를 바라봤다.
사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월아를 보고 욕심을 내지 않을까 살짝 염려하기도 했었다.
전생에서는 월아의 주인이 서문무결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욕심을 내던 것은 한빈과의 비무였다.
검에 미쳐서 가문의 구석에 박혀 수련만 하던 인물다웠다.
그가 한빈에게 준 것은 적지 않았다.
응용편 중 두 개의 구결을 던져 주고 떠났으니까.
한빈은 허공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서문무결에게서 얻은 구결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返), 진(眞)]
이제 두 개만 더 있으면 초식이 완성될 것 같았다.
하지만, 서문무결에게는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더는 남지 않았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타다닥.
뭐지?
다급한 발소리에 한빈이 시선을 돌렸다.
가만히 보니 저 멀리서 서문수연이 먼지를 일으키며 다시 오고 있었다.
잊고 간 물건이라도?
과연 누구에게 달려오는 것일까?
고개를 갸웃할 때 한빈의 옆에서 수염이 더 늘어난 이무명이 한 걸음 나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제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친 이무명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서문수연을 기다렸다.
한빈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오해를 일으키고 나서 서로 간의 호감이 조금 생긴 것 같기도 해서였다.
하지만, 서문수연은 이무명을 지나쳤다.
휙!
순간 이무명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푸웁.”
한빈이 입술 사이로 헛웃음을 토해 낼 때 서문수연은 설화의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헉헉!”
그 모습에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언니, 왜 그래요?”
“내, 내가 전에 약속한 거 있잖아.”
“약속이요?”
설화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때 서문수연이 빙긋 웃으며 품 안에서 전낭을 꺼냈다.
“이거 받아.”
갑자기 건네는 전낭에 설화의 눈이 더 커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가 자신에게 전낭을 건넬 이유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은 임무를 끝내고 나서 받는 것이다.’라는 게 설화의 머릿속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지금 법칙이 막 깨지려 하고 있었다.
한껏 커진 눈과 함께 설화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서문수연이 왜 전낭을?
설화가 멍하니 있자 서문수연이 웃었다.
“지난번에 내가 약속했잖아.”
말을 마친 서문수연은 억지로 전낭을 설화의 손에 쥐여 줬다.
설화가 겨우 표정을 수습하고 물었다.
“이건 왜 주는 거예요, 언니?”
“지난번에 내가 당과 사 준다고 약속했잖아. 이걸로 사 먹어.”
“그렇다고 다 주시면…….”
설화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가 이렇게 당황한 것은 천수장에 오고는 처음이었다.
설화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 힐끔 전낭을 열어 봤다.
“앗!”
전낭에는 철전뿐 아니라 은전까지 제법 있었다.
설화의 놀란 모습에 서문수연이 웃었다.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어차피 집에 가면 돈 쓸 일도 없거든. 그럼 나중에 꼭 놀러 와야 해, 설화야.”
서문수연이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하지만, 설화는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태어나서 대가 없이 받아 보는 최초의 돈이었다.
설화는 석상이 되어 멀어지는 서문수연을 바라봤다.
그때 이무명이 억울한 듯 한빈에게 속삭였다.
“구해 준 건 저 아닌가요?”
“정확히 말하면 거미를 죽인 건 설화지.”
“아, 그래도 저는 죽을 뻔했는데…….”
“문제는 효율이지. 세상은 결과만 기억하는 법이야.”
“뭔가 억울한데요.”
“돈이? 아니면 서문 소저의 마음이?”
“흠.”
“뭐, 둘 다겠지.”
한빈이 피식 웃자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드러난 이무명의 볼이 뻘게졌다.
모두가 떠나자 한빈은 조용히 허공을 올려다봤다.
기본편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기본편]
[……]
[심(心) : 구(九)]
아무래도 하남정가에 파혼검을 익힌 자가 더 늘어난 것 같았다.
뭐, 직계 중 원로와 각주 들이 정무룡의 깨달음을 이어받은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면 그냥 놔두어도 삼십 개가 금방 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이제 ‘심’의 속성이 하나만 더 늘어나면 융합편의 진룡파혼검을 쓸 수 있게 된다.
이제 한빈에게 남은 과제는 본신의 공력을 높이는 일과 새로운 응용편의 구결을 완성하는 일 그리고 심의 속성을 늘리는 일이었다.
한빈은 고개를 돌려 강북 땅을 다시 밟고 상기되어 있는 맹호사대를 바라봤다.
생각해 보니 맹호사대에 뭔가 변화가 있었다.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찾을 수 없었다.
매의 눈으로 맹호사대를 바라보던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하나도 안 보이네…….”
드디어 변화를 찾은 것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사부.”
“아무것도 아니야.”
“표정이 심상치 않으신데요?”
“뭐, 심각하다면 심각한 일이지.”
한빈은 다시 맹호사대를 바라봤다.
맹호사대가 달라진 점은 바로 하나였다. 그것은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록 응용편의 구결은 아니지만, 가끔 기본편의 구결이 맹호사대 중 몇몇에게 번갈아 가면서 보였었다.
그런데 이제는 구결이 한 점도 없는 것이었다.
한빈은 눈매를 좁히며 그 원인에 대해 분석했다.
한참을 생각하던 한빈은 결론을 냈다.
그것은 그들의 수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한빈은 씩 웃으며 소대섭과 심미호를 불렀다.
“소 대주, 심 부대주!”
한빈의 부름에 둘은 지체 없이 달려왔다.
“주군, 부르셨습니까?”
“네, 주군.”
한빈은 먼저 소대섭을 바라봤다.
“지금부터 수련이라 생각하고 천수장까지 갈 테니 준비해 둬.”
“아, 왜 갑자기…….”
갑작스러운 한빈의 지시에 소대섭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아무래도 요즘 들어서 맹호사대가 좀 무뎌진 것 같아서.”
물론 이것은 한빈의 착각이었다.
맹호사대가 무뎌진 것이 아니라 한빈이 너무 강해진 것이었다.
맹호사대가 아무리 강해지고 있어도 한빈의 성장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기에 나타난 현상.
소대섭이 떨리는 표정을 겨우 수습했다.
“네, 명에 따르겠습니다.”
소대섭이 포권하고 돌아가자 심미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주군, 저는 뭘 할까요?”
“심미호 부대주는 소대섭 대주를 감시해야지.”
“명 받들겠습니다.”
심미호가 상기된 표정으로 자리에서 떠났다.
* * *
사흘 후.
한빈과 일행은 드디어 하북팽가에 도착했다.
하북팽가를 목전에 둔 한빈이 손짓했다.
한빈의 신호를 본 소대섭이 박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모두 잠시 멈춰라!”
동시에 맹호사대가 멈췄다.
마차에서 내린 한빈이 마차 위를 바라봤다.
한참을 보던 한빈이 설화에게 말했다.
“저 위에 있는 비둘기는 다 풀어 주자, 설화야.”
“왜요, 공자님?”
“그동안 비둘기도 수고했잖아. 그러니 이제 쉬어야지.”
설화가 마차의 지붕 위로 사뿐히 뛰어올라 새장 속에 갇힌 비둘기를 풀어 줬다.
푸드덕!
날갯짓하며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비둘기를 본 설화가 한빈에게 물었다.
“저 전서구는 어디로 날아가는 거예요? 공자님.”
“그야 나도 모르지.”
“네? 전서구가 목적지가 없다고요?”
“저거 전서구 아닌데.”
“헉, 저게 전서구가 아니라고요? 그럼 지난번에 마휘 앞에서 날린 것도…….”
“그것도 그냥 비둘기. 하남정가 가주가 그러는데 전서구가 동났대. 그래서 그냥 비둘기로 채워 넣었지.”
“그럼 익절선생 마휘가 눈치챘으면 어떻게 하시려고 했어요?”
“에이, 눈치채도 당분간은 꼼짝 못 할걸? 그리고 중요한 건 너도 알아채지 못했잖아. 원래 병법에 이런 말이 있지.”
“무슨 말인데요?”
“적을 속이려면 자신도 속여라.”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설화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잠시 고개를 갸웃한 설화가 물었다.
“그거 자신이 아니라 우리 편 아닌가요?”
“아군만 속여서는 부족하지. 자신까지 속여야 상대가 넘어가는 법이야.”
“아. 뭔가 납득이 가는 것 같기도 하네요, 공자님.”
설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강호에서는 실력의 삼 할을 숨기라는 말이 있잖아. 중요한 것은 실력의 삼 할을 숨기려면 자신한테도 숨겨야 하는 법이지.”
“그럼 공자님은 실력의 삼 할을 자신한테도 숨기고 계신 건가요?”
“그건 비밀이야.”
“에이.”
설화의 투정에 한빈은 쓱 허공을 올려다봤다.
본신 내공 오십 년에 기본편의 내공 삼십 년.
여기서 요점은 기본편의 내공 삼십 년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구중심처에 내공을 숨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문제는 본신의 내공을 숨기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일 갑자를 채워 천지일연공을 익히기 전에 응용편의 남은 초식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완벽히 경지를 속일 수 있으니 말이다.
생각을 마친 한빈은 다시 맹호사대를 바라봤다.
한빈이 그들을 향해 외쳤다.
“멈춘 김에 새 옷으로 갈아입고 쉬었다가 출발한다. 이제 훈련은 끝이다!”
한빈의 외침에 모두가 함성을 지르며 얼굴에 감았던 천을 벗어 던졌다.
“이제 살았다!”
“와!”
가장 크게 환호성을 지른 것은 막내 조호였다.
복면을 벗어 던지고 모래주머니까지 모두 풀어 놓은 조호는 하늘을 바라봤다.
창공에서는 방금 주군이 풀어 놓은 비둘기가 날갯짓을 하며 빙빙 돌고 있었다.
비둘기가 마치 자신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는 것 같았다.
조호는 싱긋 웃었다.
“날아갈 듯 기뻐하는 거 같네.”
조호의 혼잣말에 누군가가 답했다.
“조호야, 날아갈 듯한 게 아니라 진짜 날고 있는 거다.”
조호가 고개를 돌려 보니 옆에서는 장삼이 웃고 있었다.
조호도 마주 웃었다.
“하하, 장삼 아저씨.”
“왜?”
“너무 사실대로 말하니 뭔가 분위기가 확 깨는 것 같아서요.”
“너도 내 나이 돼 봐라.”
“저는 그냥 여기서 멈출래요. 그런데 우리도 새장에 갇힌 비둘기일까요?”
“그게 무슨 말이더냐? 조호야.”
“맹호사대가 새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새장이 아니라 울타리지. 우리를 지켜 줄 울타리.”
“그건 그렇죠. 주군 자체가 울타리죠.”
조호와 장삼은 시선을 돌려 멀리 있는 한빈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