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실력의 삼 할은 숨겨야 하는 법 (1)
진사명의 질문에 마휘는 기분 좋게 염소수염을 쓸어내렸다.
“적룡대협의 후인에게 허락을 맡았으니 이제는 명분도 생긴 겁니다. 강북 사도련 앞에서 이제 조금 더 힘을 줘도 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사파의 통합을 더 빨리 당길 수 있겠지요. 그럼 남는 장사가 아니겠습니까?”
“군사님의 말씀대로 강북과 강남의 사파인들이 빨리 뭉치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뒤쪽에서 이를 지켜보던 이들의 표정은 둘로 나뉘었다.
진세미는 적룡대협이 살아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고 흑의살풍과 편육랑아는 이대로 강호에서 잠적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고 있었다.
만약 적룡대협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게 밝혀진다면?
그것은 강호가 뒤집힐 수도 있었다.
일단 이 정도 상황은 흑의살풍도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불안감이 이상하게 가시지를 않았다.
모든 일이 끝난 것처럼 사람 좋은 얼굴로 모두를 바라보던 익절선생 마휘가 허허롭게 천장을 올려다봤다.
순간 그의 눈이 살짝 빛났다.
한빈과의 거래는 지금부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런 사업은 명분 싸움이었다.
한빈에게 약속한 일 할은 강북 사도련과 통합이 끝나면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익절이라는 별호처럼 평생 이익만 보며 산 그였기에 한빈을 이용한 후에는 다시 계산을 해 봐야 했다.
그때 진사명이 마휘의 웃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군사님은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이익을 내주고도 그렇게 웃으시는 걸 보면 군사님이 보시는 강호는 좀 더 큰 것이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허허, 뭐 그렇지요.”
익절선생 마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생각한 강남 사도련과 강북 사도련의 통합 시점은 단 일 년에서 이 년.
그 기간이 지나면 한빈과의 거래도 끝이었다.
* * *
한빈이 맹호사대 쪽으로 돌아왔을 때는 심미호를 비롯한 모두가 눈이 시뻘건 채로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때 가장 먼저 달려온 것은 이무명이었다.
이무명이 물었다.
“일은 잘됐습니까? 사부.”
“잘됐으니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왔겠지. 양쪽 팔이 다 붙어 있으면 잘된 게 맞아.”
한빈이 씩 웃자 뒤쪽에서 따라오던 설화가 물었다.
“공자님, 저 진짜 궁금한 게 있거든요.”
“궁금하면 철전 다섯 닢.”
“아, 없다니까요.”
“그럼 이번에도 공짜로 얘기해 줄 테니 말해 봐.”
“아까 지필묵 가져오려는데 필요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이제까지는 항상 계약서 쓰셨잖아요. 그런데 아까 마휘 군사하고는 왜 안 쓰신 거예요?”
“설화야!”
“네, 공자님.”
“계약은 동등할 때만 쓰는 거야.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차이가 나면 계약서를 쓰는 게 아니다. 이건 너도 기억해 둬야 한다, 설화야.”
“차이가 나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짓는 사당과 무관의 주인이 누구라고 생각하니? 설화야.”
“그야, 강남 사도련?”
“에이, 그건 아니지,”
“그럼요?”
“사당에 모신 자가 살아 있다면, 그 사람 거지.”
“헉, 공자님…….”
“아마도 마휘 군사는 일 년 안에 날 찾아올거야. 그리고 반을 내놓겠지.”
“일 년 안에요?”
“뭐, 그때가 되면 계약서를 써 줘도 되고. 일단 시작했으니 남는 장사를 해야겠지.”
“아!”
설화가 탄성을 지르며 한빈을 바라봤다.
모든 게 끝난 줄 알았더니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느낌이었다.
설화는 한빈에게 다음 수가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익절선생 마휘와 남는 장사를 한다라?
보통 사람으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설화는 한빈을 다시 바라봤다.
한빈에게 배울 것이 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검술일까?
아니면 상술일까?
그때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설화야, 기억해 둬. 계약서는 동등할 때만 쓰는 거다.”
“계약서는 동등할 때만…….”
한빈의 말을 곱씹던 설화는 말끝을 흐리며 활짝 웃었다.
분명 자신은 한빈과 계약서를 썼다.
그것도 삼 년짜리.
계약할 자격도 없는 사도련의 군사 익절선생 마휘.
사도련의 군사보다도 더 대우를 잘 받았다고는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설화의 웃음은 전염병처럼 일행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웃음을 피운 이들은 설화와 한빈의 대화를 들은 맹호사대였다.
조호가 장삼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조용히 속삭였다.
“아저씨, 우리도 계약서 썼잖아요.”
“그렇지, 우리는 계약서 썼지.”
“하하, 그러면 우리가 익절선생 마휘보다 대우를 받고 있다는 거잖아요.”
“그래, 그게 맞다. 조호야.”
“헤헤. 갑자기 흥분되네요.”
그때 조호와 장삼의 뒤에 그림자가 나타났다.
갑자기 나타난 그림자에 조호가 고개를 돌렸다.
상대를 확인한 조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림자의 주인은 다름 아닌 의원 장자명이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의원님.”
“조호야, 이런 말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장자명이 말끝을 흐리자 조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편하게 말해 보세요.”
“그러니까……. 나는 계약이 삼 년짜리다.”
“헉, 삼 년이요?”
“그래, 삼 년이란다. 한마디로 여기서 최고 대우를 받고 있는 건 바로 나란 말이지.”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의원님.”
“그럼? 나 말고 또 누가 있더냐?”
“설화만 해도 삼 년이잖아요. 그리고 서재오 대협은 기약도 없고요. 기간으로 치면 기약 없는 서재오 대협이 최고죠.”
“허허, 서재오 대협이라……. 아무래도 본인에게 물어봐야겠구나. 진짜 기약이 없는지.”
장자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서재오라면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눴던 천수장의 동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쓸데없는 부분에서 그에게 경쟁심을 느꼈다.
그때 조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누굴 찾으시는 거예요?”
“당연히 서재오 대협이지.”
“서재오 대협은 우리보다 먼저 천수장으로 떠나셨잖아요. 하루빨리 매화 패를 찾으셔야 한다고요.”
“우리보다 먼저 출발했다고?”
“네, 두 분이 친한 줄 아셨는데, 여기까지 오면서 없는 줄도 모르신 거예요? 그분이 들으면 서운해하시겠네…….”
“아니다, 알면서 농담 한번 던져 본 거다.”
장자명은 얼굴을 굳히며 손을 내젓기 바빴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나한테는 말도 없이 출발했지?”
“그걸 몰라서 물으세요? 공자님.”
“정말 모르니까 묻지.”
“또 일 시킬까 봐 겁난 거죠.”
“에이, 내가 무슨 일을 시킨다고 그래. 이번에도 와서 몇 마디 하고 퇴장해 놓고 말이야.”
그때였다.
한빈의 앞에 서문무결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그러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소협, 그게 사실인가?”
“사실이라니요? 갑자기 그렇게 물어보시면…….”
“아까 사파의 막사에서 마휘와 나눴던 대화 말일세.”
“흠.”
한빈은 헛기침하며 서문무결을 바라봤다.
막사 근처에서 서문무결의 기척을 느꼈었다.
백사문주 진사명이 기막을 펼쳤지만, 화경의 고수인 서문무결이 그들의 대화를 못 들었을 리 없었다.
한빈은 서문무결이 생각보다 늦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서문무결의 진중한 성격은 전생이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한빈의 표정에 서문무결이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본의 아니게 소협이 익절선생과 나눈 대화를 엿듣게 되었네. 그 점은 사과하겠네.”
“헉, 그걸 어떻게…….”
한빈이 놀란 척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서문무결은 더욱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네의 안위가 걱정되어…….”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분명 백사문주가 기막을 펼쳤는데 어찌 들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나이를 먹다 보니 괜히 귀만 밝아진 것이니 이해해 주게.”
“대화를 엿들으신 건 괜찮습니다. 정보력도 힘 아닙니까? 사과하실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 생각해 주니 고맙네. 그런데 정말 자네가 적룡대협의 후인인가?”
“후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거의 한 몸이라고 봐야겠죠.”
말을 마친 한빈이 어색하게 웃었다.
이게 딱 한빈이 그에게 전할 수 있는 진실이었다.
서문무결이 품 안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여기 있네.”
지체 없이 조그만 목갑을 한빈에게 건네는 서문무결.
한빈이 물었다.
“이게 뭡니까?”
“서문세가의 영단일세.”
“이걸 왜 제게…….”
“내가 찾던 적룡대협의 후인이라 하지 않았나?”
“대협께서 직접 전해 주시죠.”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무엇을 말입니까?”
“적룡대협의 생사가 불분명하다는 것을 말일세.”
“흠.”
“만약 적룡대협이 생을 달리했다면, 이 영단은 자네가 갖게.”
“…….”
“대신!”
“말씀하시지요.”
“내 비무에 응해 주게나.”
“…….”
한빈은 아무 말 없이 서문무결을 바라봤다.
영단은 덤이고 진짜 한빈이 원하는 것이 바로 비무였다.
한빈은 입가에 염화미소를 피우며 조용히 포권했다.
“물론입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널찍한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작 비무를 제안한 서문무결은 한빈에 행동에 놀라 외쳤다.
“지금 하자는 말은 아니었네만은…….”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서문무결이 검을 치켜들었다.
“그럼 이게 쇠뿔이란 말인가?”
그의 외침에 한빈이 뒤돌아섰다.
“진짜 쇠뿔은 여기 있겠죠.”
한빈이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웃자 서문무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검은 이곳에 있는 게 아니라 가슴에 있는 게 맞지.”
대화가 오가는 동안 서문무결과 한빈은 공터에서 마주했다.
한빈과 서문무결은 동시에 검집을 잡고 상대를 바라봤다.
서문무결이 자신의 검을 보며 말했다.
“이 검은 군자검이라고 하네, 내 검이 너무 정직하다고 해서 친구들이 붙여 준 이름일세. 그런데 몸을 드러내는 즉시 그 정직함이 사라지니 부디 조심하시게.”
한빈이 자신의 검을 가리키며 답했다.
“제 검은 월아라고 합니다. 검을 처음 뽑은 것이 보름달이 중천에 떴을 때지요. 보름달과 겹치니 마치 보름달의 어금니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입니다. 그렇다고 이빨을 숨기고 있지는 않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한빈의 말에 서문무결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오랜만에 회포를 풀어 볼 수 있겠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둘은 동시에 검을 뽑았다.
스릉!
스릉!
둘의 검신이 햇빛을 반사하며 자태를 뽐냈다.
* * *
둘의 검이 멈춘 것은 정확히 반 시진 후였다.
서문무결은 검을 곧게 한빈에게 겨누며 말했다.
“즐거웠네. 역시 적룡대협의 후인답군.”
“아닙니다. 많이 부족합니다.”
“부족하다라? 부족한 것치고는 너무 많은 것을 숨기고 있군…….”
서문무결을 한빈을 바라보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한빈이 숨을 고르며 답했다.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실력의 삼 할이 아니라 구 할을 숨긴 자네가 할 말은 아니지.”
“그렇게 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한빈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검을 검집에 넣었다.
슉!
그러고는 서문무결을 바라봤다.
서문무결을 통해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고수에게는 자신의 실력을 숨길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비급에 담겨 있는 공력을 숨길 수 있지만, 오십 년이라는 본신의 내공은 절대 숨길 수 없었다.
본신의 내공을 숨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빈은 그 정답을 서문무결과의 비무를 통해 얻은 새로운 구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허공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