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계산은 정확히 (4)
익절선생 마휘는 재빨리 판관필을 뻗었다.
이것은 그의 사군자 중 죽(竹)의 수법.
대나무처럼 곧게 뻗는 정직한 공격은 능히 상대의 방패를 뚫을 수 있고…….
사군자필 중 죽의 구결처럼 곧음이 이 수법이 추구하는 오의였다.
대나무처럼 날아드는 판관필은 한빈의 가슴을 관통하려는 듯 병사가 던진 창처럼 마휘와 하나가 되어 날아들었다.
그때였다.
마휘는 입을 크게 벌려야 했다.
상대도 자신과 똑같은 기세로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창이라면 상대는 화살이었다.
마휘의 판관필에 서린 붉은 기운과 한빈의 검 끝에 서린 푸른 기운이 막 격돌하려는 순간.
누군가 소리 질렀다.
“적룡대협!”
이것은 진세미의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한빈이 보여 준 검술은 분명히 적룡대협이 보여 준 것과 비슷했다.
잘 생각해 보면 한빈이 입은 붉은 무복도 적룡대협과 똑같지 않은가?
지금 한빈의 모습은 적룡대협과 너무 흡사했다.
순간 마휘의 판관필이 멈췄다.
물론 한빈의 월아도 판관필과 얼굴을 맞대듯 멈췄다.
시간이 멈춘 듯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한빈과 익절선생 마휘.
둘의 병장기 끝에 서린 검기가 촛불 꺼지듯 스르르 사라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한빈이었다.
“역시 열 번의 말보다 한 번의 칼질이 낫다는 강호 속담이 맞습니다.”
“…….”
마휘를 말없이 판관필을 거두고 고개를 돌려 진세미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진세미가 달려왔다.
“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마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말끝을 흐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진세미를 바라봤다.
“어떻게 된 일인가?”
“군사님, 죄송해요. 적룡대협과 초식이 닮아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어요.”
“그럼 이자가…….”
마휘는 한빈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 시선에 한빈이 씩 웃으며 월아를 검집에 꽂았다.
탁!
한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하시는 게 맞을 겁니다.”
“허…….”
익절선생 마휘가 한숨을 내쉬자 진세미가 말을 받았다.
“적룡대협과 관계가 있는 분이 분명합니다.”
진세미는 한빈이 적룡대협이라 생각하지는 못했다.
그때 보여 줬던 기세와는 천지 차이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허장성세를 사용해서 사자후를 뱉어 낸 한빈은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 화경 중에서도 삼 경 이상의 경지였다.
진세미의 말에 익절선생 마휘가 염소수염을 쓰다듬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사파의 영웅인 적룡대협과 관계가 있다라…….”
마휘의 꿈틀대던 눈썹이 멈췄다.
이제야 지금 한빈의 이야기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마휘는 치열하게 계산을 하다가 한빈에게 말했다.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겠는가?”
“그건 제가 먼저 할 말입니다.”
“그럼 이쪽으로!”
마휘가 손짓했다.
* * *
한빈은 마휘의 초대로, 공사를 관리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한빈의 옆에는 설화가 먹을 게 없나 하고 눈을 돌리는 중이고 마휘의 옆에는 진사명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 뒤로는 진세미가 가슴이 벅찬 듯 연신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 옆에 있는 흑의살풍과 편육랑아는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한빈의 앞에 있는 찻잔이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을 때 마휘가 물었다.
“자네의 정체에 관해 물어봐도 되겠는가?”
“보시다시피 저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입니다.”
“흠, 내 판관필을 검으로 막는 솜씨로 봐서는 하루 이틀 검을 다뤄 본 게 아닐 듯싶은데?”
“그런 말은 요즘 많이 듣죠. 보시다시피 저는 도객(刀客)이 아니라 검객입니다.”
“하북팽가에 도객이 아니라 검객이라……. 그건 처음 들어 보는군.”
“이제 보셨으니 나중에는 놀라시지 않겠죠.”
“그럼 그 검술을 자네에게 가르쳐 준 사람이…….”
익절선생 마휘는 목소리를 더욱 낮추었다.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생각하신 게 맞습니다. 사파에서는 적룡대협이라 칭하시는 분이 바로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흠.”
“그런데 잘못 알고 계신 게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다고? 그게 뭔가?”
“그것은 적룡대협의 신분입니다.”
“신분이라…….”
말끝을 흐린 마휘는 진사명에게 살짝 눈짓했다.
동시에 진사명이 내공을 끌어올려 기막을 펼쳤다.
이제부터 나눌 이야기는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기막을 확인한 마휘가 찻잔을 잡으며 말했다.
“이제 새어 나갈 일도 없고 시간도 넉넉하니 편히 말해 보게.”
“그분은 어찌 보면 정사지간의 인물이죠. 그날 영단산에 왜 그분이 나타나셨다고 보십니까?”
“그야 위험에 빠진 사파인을 구하기 위해서…….”
“사파인이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됐을까요?”
“음.”
마휘는 계속된 한빈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한빈은 그의 신음에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를 구하기 위해 나타난 겁니다.”
“자네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아마도 잔혈마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목이 달아나는 건 사파인들이 되었을 것이지요.”
“허허, 말이 지나치네.”
“적룡대협과 저와의 관계는 그러니까…….”
한빈은 최대한 사실에서 벗어나지 않게 적룡대협을 중간에 끼워 넣어 설명을 이어 나갔다.
설명을 듣던 흑의살풍은 떡 하니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한빈의 설명은 간단했다.
산서삼살을 제압한 게 적룡대협이고 산서삼살에게 한빈을 사로잡은 것처럼 행동하라고 지시를 내린 것도 적룡대협이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한빈이 위험에 처하자 다시 나타났다는 말이었다.
물론 한빈이 비명을 지르면서 도망간 것은 사파 무리와의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고 말이다.
그런데 마인인 잔혈마도가 튀어나오자 사파 무리를 구하기 위해 일전을 벌였다는 것이었다.
만약 저것이 흑의살풍에게 사실이라고 물어본다면?
무조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빈의 이야기를 부정하는 순간 산서삼살은 사파에 있어 배신자가 되었다.
한빈과의 악연은 이제 끝난 줄 알았는데 사실 이 끈질긴 악연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이런 제기랄, 이런 대대손손 썩을 놈!’
속으로 욕을 내뱉은 흑의살풍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아니나 다를까.
설명을 듣고 난 익절선생 마휘가 흑의살풍을 바라봤다.
“지금 팽 공자가 이야기한 것이 모두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흑의살풍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마휘의 이마에 잔주름이 잡혔다.
“허허, 그럼 사파인이 아니란 말인가…….”
회한이 어린 마휘의 목소리에 한빈이 씩 웃었다.
“적룡대협은 정파와 사파를 오가는 인물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다만, 제가 이 자리에서 그분의 사문을 밝히는 것은 결례라 생각합니다.”
“그럼 자네의 검술이 그분에게 받을 것이란 말인가?”
“알아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얼마 전까지 하북 최고의 겁쟁이라고 불렸습니다.”
“흠.”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만한 기연이 있었겠지요.”
말을 마친 한빈은 차를 한 잔 들이켰다.
마휘도 차로 입술을 적신 뒤 한빈은 조용히 바라봤다.
한빈의 말은 마휘가 생각해도 타당했다.
하북 최고의 겁쟁이란 말도 지금 생각해 보니 어렴풋이 들어 본 것 같았다.
마휘는 한빈의 말뜻을 지레짐작하고는 진중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자네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얘기는 적룡대협을 사파의 영웅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인가?”
“그건 아닙니다.”
“그럼 자네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대체 뭔가?”
“사파든 정파든 같은 하늘 아래에서는 모든 강호인이 동도가 아니던가요? 슬픔도 나누면 배가 되듯 기쁨도 나누면 배가 되다고 생각합니다.”
“허, 설마 그 말은…….”
“지금 이 사업의 이익!”
“…….”
마휘의 미간에 골짜기가 깊게 파였다.
그 모습에도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딱 일 할만 주시지요. 물론 영단으로도 받습니다.”
“허!”
익절선생 마휘는 입을 벌렸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훅 치고 들어오자 아무리 마휘라도 말문이 막힌 것이다.
보통 정파인이라면 사부의 명예를 훼손하지 말아 달라, 사실을 왜곡하지 말고 하던 일을 멈춰라! 등의 일반적인 반응을 보였을 것이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이익을 나눠 달라니?
마휘는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말을 이었다.
“만약 여기서 자네의 목을 친다면?”
그의 말에 한빈이 씩 웃었다.
“그것도 좋은 방법이겠지요. 그런데 아까 날린 전서구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
“제가 죽으면 모두 사파인의 책임이니 사실을 퍼뜨리라고 쓰여 있지 않았을까요? 이익만 나눠 주신다면, 저는 적룡대협이 사파인이 되든 정파인이 되든 관계없습니다. 만약 나눠 주기 싫으시다면 이 사실을 그대로 정의맹에 가지고 가겠습니다.”
“정의맹이라고?”
“당연히 그쪽에서는 제게 대가를 치러 주겠죠. 돈도 돈이지만, 지금 사파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게 누구 덕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계산은 정확하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손을 곧게 펴 천장을 가리켰다.
하늘을 찌르는 사파의 사기를 조금 더 강조한 것이었다.
마휘는 답답한지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벌컥.
한참 동안 한빈을 바라보던 마휘가 눈매를 좁히며 물었다.
“대체 자네는 누군가?”
“하북팽가의 사 공자입니다.”
한빈이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때 뒤쪽에서 설화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필묵 가져올까요? 공자님.”
“아니야, 이번에는 됐어.”
그들의 대화에 마휘의 눈썹이 다시 꿈틀댔다.
자신은 식은땀이 나오도록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상대는 여유가 넘쳤다.
물론 이것은 마휘의 착각이었다.
한빈은 전생에 마휘를 겪어 본 경험이 있기에 이렇게 여유 있게 대할 수 있었다.
* * *
한빈은 제법 긴 시간이 지나서야 막사를 나올 수 있었다.
막사 밖으로 마중 나온 마휘는 멀어지는 한빈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빈의 조건은 간단했다.
이익의 일 할.
영단으로 갈음할 수도 있다고 했다.
거기에 붙는 조건은 사파인이 자신을 해치려 하면 그때마다 일 할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즉, 괜히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었다.
마휘는 이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적룡대협의 후인이라면 이 정도의 성의는 보이는 게 맞았다.
하지만, 정파의 후기지수한테 당하다 보니, 이건 뭔가 털리는 느낌이 들어 찝찝했다.
하지만, 이번 약속에 있어서 한빈이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마휘는 굳게 믿었다.
바로 한빈의 눈 때문이었다.
마휘가 바라보는 한빈은 무인이 아니라 장사꾼이었다.
장사꾼이 미래의 이익을 버릴 리가 없었다.
그런데 한빈의 마지막 말이 묘한 여운을 만들었다.
그것은 적룡대협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흠.”
마휘는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뱉었다.
그때 백사문주 진사명이 근심을 털어 낸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다 끝난 거지요?”
마휘가 진사명의 얼굴을 보고 웃었다.
“네, 사업은 그대로 진행해도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그때는 정사대전이라도 벌이겠습니다.”
“하하, 그런 일은 없겠죠.”
“네, 없을 겁니다. 어찌 보면 잘된 일입니다.”
마휘의 말에 진사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잘된 일이라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