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계산은 정확히 (3)
흑의살풍이 놀란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한빈이라는 점.
하남정가의 소식을 최근에 들었지만, 하북팽가의 사 공자에 대한 말은 없었다.
오로지 새로 나타난 정파의 고수, 청운사신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청운사신이 화경의 무위와 의혐심으로 하남정가를 구했다.
하지만, 소문은 여기까지였다.
청운사신의 나이도.
문파도, 심지어는 외모까지도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단지 푸른 도포를 입고 구름의 잔상을 남긴다는 것이 전부였다.
청운사신의 소식으로 한빈의 소식은 손톱만큼도 흘러나오지 않았기에 흑의살풍은 한빈이 죽은 줄로만 알았다.
흑의살풍의 기억에 의하면 한빈은 잔혈마도의 칼에 옆구리가 뚫렸었다.
그 상황에서 강 속으로 처박혔는데, 살아날 가능성이 있을까?
아마 화타가 와서 치료한다고 해도 살 수 없을 것이었다.
흑의살풍의 놀람 속에는 두려움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빈의 등장으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는 한둘이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흑의살풍이 적룡대협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는 점.
만약 흑의살풍이 적룡대협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것을 밝혔다면, 지금처럼 영웅화 작업이 진행되었을까?
흑의살풍은 그 점에 대해서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흑의살풍이 눈 깜빡할 사이에 수많은 상념을 머릿속에 담고 있을 때 마휘가 미간을 좁히며 한빈을 바라봤다.
“귀하는 대체 누구신지?”
“저는 하북팽가의 막내, 팽한빈이라고 합니다.”
“팽한빈이라…….”
마휘는 눈썹을 꿈틀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적룡대협과 잔혈마도가 생사결을 펼치기 전의 상황에 대해 떠올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청명환 탈취를 위해 사파인들이 영단산에 모였던 일.
상대가 이 자리에 왜 나타났을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바로 복수.
마휘가 한껏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팽 공자, 옛 속담에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란 말이 있소. 여기는 사파의 성지가 될 자리요. 이곳에 나타나다니 간이 부었구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청명환을 탈취하려던 사파인에 대한…….”
마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빈이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잠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탐나는 물건이 있으면 저라도 빼앗을 겁니다.”
“헉, 그게 무슨 말인가?”
마휘는 자신도 모르게 좁혔던 미간을 풀며 한빈의 얼굴을 다시 살폈다.
정파인이 저런 말을 한다라?
마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휘가 잠깐 당황하고 있을 때 한빈이 말했다.
“무인이라면 영단을 탐내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영단을 빼앗겼다고 치죠. 누굴 탓하겠습니까? 빼앗은 자?”
“…….”
마휘는 한빈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상대의 표정을 확인한 한빈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면 뺏긴 자? 저는 힘이 없어 빼앗긴 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흠, 그럼 여긴 무슨 일로 나타난 것인가?”
“사업 이야기 좀 하려고 합니다.”
“사업이라?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리고 강남 사도련의 군사인 내가 한가하게 자네와 농담을 나누고 있을 시간이 있다고 보나?”
“지금 계획하시는 일에 제 지분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죠.”
한빈은 전각이 올라갈 터를 가리켰다.
그 모습에 마휘가 자신의 체면도 잊고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뭐 하나만 묻죠.”
“말해 보게.”
“적룡대협이 사파인이 아니라 정파 사람이라면요?”
“정파인이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게 하려면 썩 꺼지게. 아니면 내가 친히 자네의 목을 치겠네.”
마휘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지금 한빈이 한 말이 마휘의 완벽한 계획에 틈을 만드는 것 같아서였다.
적룡대협이 정파인이라?
그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기본적으로 사파인의 눈시울을 적셨던 잔혈마도와의 동귀어진을 생각하면 그가 정파인이라는 건 말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 등골을 타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이 불길한 예감은 뭐란 말인가?
마휘는 날 선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웃기는 소리. 정파인이 사파인을 위해서 몸을 바친다고? 지나가는 개가 웃을 소리군.”
“그럼 하나만 묻죠. 마휘 군사님 같으면 정파와 마교도가 나란히 있다고 치면 누굴 적으로 삼겠습니까?”
“…….”
순간 마휘는 할 말을 잃었다.
한빈의 논리는 정확했다.
정파와 사파는 항상 서로의 목에 칼을 들이댈 준비를 하고 있지만, 마교가 등장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마교는 세외 세력으로 구분하기 때문이다.
무림 천년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마교가 중원을 침입할 때에는 정파와 사파가 하나가 되었으니까.
마휘는 반대의 입장을 생각해 봤다.
정파가 마교도에게 죽어 나가는 상황에 그곳을 지나가는 사파의 고수.
과연 그 고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을 마친 마휘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전각을 올릴 터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돌을 깎는 석공과 목재를 다듬는 목수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 모든 것이 황금 알을 낳는 거위를 만들 초석이었다.
거기에 지금까지 들어간 비용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한빈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맞춰 뒤에 있는 설화가 비둘기가 든 새장을 열었다.
동시에 비둘기가 자유롭게 날갯짓하며 하늘 위로 날았다.
퍼드득!
갑작스러운 상황에 마휘가 다시 한빈을 바라봤다.
물론 이 장면에 익숙한 흑의살풍과 편육랑아는 입을 떡 벌렸다.
흑의살풍은 저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
저렇게 전서구를 날릴 때마다 조여 왔던 올가미.
이제는 그 대상이 누구냐가 문제였다.
하지만, 이 모습을 처음 보는 마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정사 대전이 일어나는 한이 있어도 여기서 네 목숨을 거두겠다.”
한껏 흥분한 마휘는 오른손으로 판관필을 들고 한빈을 겨냥했다.
그때 한빈이 한 발짝 물러서며 손을 저었다.
“워워, 군사님. 저 같으면 이렇게 흥분하기 전에 전서구가 담고 있는 내용이 궁금할 겁니다.”
“흠.”
마휘가 헛기침했다.
한빈의 말이 맞았다.
지금은 전서구가 담고 있는 내용이 중요했다.
한빈이 괜히 전서구를 날렸다고는 볼 수 없었다.
마휘는 지금 자신의 상태를 떠올렸다.
자신은 지금 과도하게 흥분하고 있었다.
이것은 상대의 격장지계에 넘어갔다는 말이었다.
강남 제일의 지낭이라 불리는 자신이 이렇게 흥분한 일이 있던가?
최근 몇 년 동안은 없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면 판단력이 흐려질 뿐이었다.
마휘는 재빨리 마음을 가라앉히고 한빈을 바라봤다.
“그래서, 저 전서구가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 내용은 제가 앞으로 할 말입니다.”
“앞으로 할 말이라?”
마휘는 눈썹을 꿈틀했다.
바로 대답해 주는 법이 없고 빙빙 돌려 까는 저 화법.
분명 자신을 놀리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여기에 넘어간다면 상대에게 당하는 꼴이 되었다.
마휘는 강남 사도련의 군사답게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럼 할 말을 해 보게.”
“이게 고급 정보라서 맨입으로는…….”
한빈은 말끝을 흐리며 마휘를 가리켰다.
그 모습에 마휘의 눈썹이 다시 꿈틀댔다.
“무슨 뜻이냐? 돈을 원한다는 말이냐?”
“돈 말고 일단 비무 한판 하시죠.”
“허허, 하룻강아지 같은 놈이!”
“흥분하지 마시고 생사결이 아니라 비무입니다.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려면 제 검술을 확인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럽니다. 아무리 말을 해 봐야 믿어 주지 않으실 테니까요.”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구나!”
“아마 눈물은 안 흘릴 것 같습니다. 제가 관짝 안에서도 잘 자는 놈이라서요. 평상시에도 잠이 안 오면 관짝에 눕고는 하죠. 그러니 이상한 말은 하지 마시고! 그 판관필 맛 좀 보여 주시죠.”
사실 한빈이 한 말은 사실이었다.
전생을 통틀어 생각해 보면 관짝 안에서 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씩 웃은 한빈이 마휘의 판관필을 가리켰다.
순간 마휘의 표정이 바뀌었다.
마휘의 얼굴에는 어떤 동요도 없었다.
마휘는 이제 한빈을 본격적으로 혼내 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상대를 힘으로 누르고 정보를 취한다.
그것이 가장 사파다운 방법이었다.
파박!
마휘가 땅을 박차고 한빈에게 달려들었다.
붓 모양의 병기인 판관필은 보통 일직선의 공격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상대의 요혈을 뚫는 데 최적화된 무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휘의 공격은 태극을 그리듯 유려하게 날아들고 있었다.
마휘의 절기라고 한다면. 누구나 사군자필(四君子筆)을 말한다.
사군자필이라 부르는 이유는 매란국죽(梅蘭菊竹)의 사군자를 연상하게 만드는 공격이 그의 판관필의 끝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태극처럼 유연한 지금 그의 수법은 사군자필 중 난의 수법이었다.
이것은 바로 치겠다는 것이 아닌 탐색전.
상대의 검이 날아오면 유연하게 쳐 내고 다음 수법으로 넘어가겠다는 계산이었다.
마휘는 지금 이성을 잃은 것이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계산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한빈은 왜 마휘를 도발했을까?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마휘에게서도 일렁이는 점을 봤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한빈이 이번에 취할 구결은 별책 부록과도 같은 것이었다.
마휘에게 정작 취해야 할 본편은 따로 있었으니까.
뭐,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 수 없듯이 구결을 뜻하는 점을 본 순간 한빈도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두 번째는 바로 적룡대협과 자신의 관계를 미리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허장성세만 사용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경지는 적룡대협의 후인 정도로 보이기에 딱 좋았다.
본래에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꺼낸 후 검술을 보여 주려 했지만, 갑자기 보이는 구결 때문에 순서를 조금 바꾼 것이었다.
한빈은 유려하게 날아드는 판관필을 보고 씩 웃었다.
뭐, 전생에도 접한 마휘의 판관필이기에 그리 놀라울 것은 없었다.
한빈은 용린검법의 초식을 떠올렸다.
‘전광석화’
‘구걸십팔보’
순간 한빈이 풀 밟는 소리와 함께 잔상을 남기고 사라졌다.
구걸십팔보에 ‘속’의 속성 세 개를 사용한 결과였다.
한빈은 여유 있게 마휘의 판관필의 범위에서 벗어났다.
한빈의 기괴한 보법에 마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하북팽가에 저런 보법이 있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다.
하지만, 당황할 마휘가 아니었다.
마휘는 판관필을 난에서 매로 바꿨다.
이것은 마치 판관필로 매화를 피워 내는 듯한 마휘만의 절기였다.
빠른 피라미를 잡기 위해서는 낚싯대보다 그물이 더 편한 법.
화려한 매화는 자신의 간격 안에 들어오면 상대의 요혈을 파고들 것이었다.
난이 곡선이라면 매는 점의 공격이었다.
슉! 슉!
여러 점이 마휘의 판관필 앞에 모여 매화를 그려 냈다.
화산파의 검법을 보는 듯한 화려함에 모두가 놀랐다.
물론 한빈은 예외였다.
한빈의 목표는 마휘를 꺾는 것이 아니었다.
마휘에게 구결만 취하고 자신의 무위만 확인시켜 주면 되었다.
한빈은 속도를 높이며 마휘의 간격에서 계속 벗어났다.
한빈의 이런 모습에 마휘는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비무를 하자고 청한 건 분명 한빈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응한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왜 도망치기만 하지?
마휘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켰다. 생각해 보니 한빈과 나눴던 대화의 행태나 지금의 비무가 똑같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한빈은 대화를 나눌 때도 비무를 할 때도 격장지계로 자신을 도발하고 있었다.
순간 느려지는 한빈의 모습이 마휘의 시야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