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계산은 정확히 (1)
이무명의 인사에 서문진경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무명이라면……. 혹시 그 절정검 이무명 소협이신가요?”
그 말에 이무명이 약간 당황한 듯 서문진경을 바라봤다.
하남 지역에서라면 몰라도 서문세가에까지 자신의 이름이 퍼질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문 소협, 제가 유명하다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이무명이 어색하게 웃자 서문진경이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너무 겸손하십니다. 강북에서는 무씨검가와 벌인 백 대 일 비무 때문에 명성이 자자합니다.”
“그러니까 백 대 일 비무라는 건 좀 과장이…….”
이무명은 말끝을 흐리며 한빈을 바라봤다.
실제로 무씨검가의 무사들과 백 대 일 비무를 벌인 것은 한빈이었다.
그때 한빈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이무명의 행세를 한 것 때문에 이렇게 소문이 난 것이었다.
이무명이 어찌할 줄 모르자 한빈이 조용히 나섰다.
“내 제자의 명성이 강북에 퍼졌다니 기쁘군요.”
“아, 사부.”
이무명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는 자신이 하지 않을 일을 자랑할 만큼 얼굴이 두껍지 못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문수연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호.”
고개를 숙인 이무명의 모습이 서문수연에게는 한없이 겸손한 무림인으로 비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결례일 수도 있는 법.
서문진경이 재빨리 나섰다.
“죄송합니다, 소협.”
“괜찮습니다.”
이무명은 가볍게 손을 저었다.
서문수연의 웃음은 누가 봐도 호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얼음장 같았던 분위기가 다소 풀리자 서문진경이 조심스럽게 한빈을 바라봤다.
다시 봐도 외모는 자신보다 윗줄이 아니었다.
그런데 무공은 상상을 초월한다?
서문진경은 검을 쓰는 자 중 자신의 또래에서 저런 무위를 가진 자가 있다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반로환동한 고수.
이 가능성밖에는 없었는데, 분위기를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서문진경은 한빈이 보여 준 한 수를 머릿속으로 그려 봤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검로를 떠올릴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자신의 아버지인 서문무결과 비견되는 검객일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서문진경이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한빈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설화가 고개를 갸웃했다.
“언니는 거미 공포증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맞아. 그래서 아까는 목소리도 못 냈던 거야.”
서문수연은 어려 보이는 설화에게 편하게 답했다.
설화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거미가 한두 마리도 아닐 텐데, 산길을 어떻게 걸어온 거예요? 언니.”
“뭐, 보이지만 않으면 괜찮거든.”
“아, 그래서 발밑에 거미가 있는데도 놀라지 않는 거네요…….”
설화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아래로 돌리자 서문수연도 반사적으로 아래를 바라봤다.
그녀의 발아래에는 털이 숭숭 나고 다리는 아이의 새끼손가락만 한 큰 거미가 놓여 있었다.
아까 봤던 그 거미보다 더 큰 거미였다.
순간 서문수연의 동작이 멈췄다.
입만 딱 벌린 채 굳어 버린 서문수연.
갑작스러운 상황에 서문진경이 재빨리 서문수연의 곁으로 움직여 거미를 밟았다.
푹!
땅바닥이 파일 정도의 강력한 진각.
하지만, 그 전에 설화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설화는 바닥에 있는 거미를 낚아채서는 멀리 던졌다.
그러고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죽으면 거미가 불쌍하잖아요. 거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잖아요. 저렇게 태어난 것도 자기 잘못은 아니고…….”
설화가 말끝을 흐리며 물끄러미 바라보자 서문진경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것도 그렇구나.”
서문진경의 사과에 설화가 말끝을 흐렸다.
“그냥 안 보이는 곳으로 치우면 될 텐데요…….”
“미안하구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구나.”
서문진경은 다시 사과하며 설화를 바라봤다.
자신이 동작보다 몇 배는 빠르게 거미를 낚아챈 설화의 동작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는 지금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다.
자신에 뒤처지지 않는 절정검 이무명과의 만남도 놀라운데, 그의 사부가 같은 또래라니?
거기에 시녀로 보이는 설화의 경지도 추측이 되지 않았다.
서문진경의 복잡한 심경과는 다르게 설화를 바라보던 한빈은 작게 웃었다.
살수의 측은지심이라?
어찌 보면 살수에게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설화에게는 어울렸다.
그때 서문수연이 놀란 표정으로 설화를 바라봤다.
“와, 넌 용감하구나. 구해 줘서 고마워.”
“헤헤, 뭘요. 언니를 구한 게 아니라 거미를 구한 건데요.”
“아니야, 진짜 고마워. 나중에 꼭 보답할게.”
“그럼 나중에 만날 때 당과나 잔뜩 사 주시면 돼요, 언니.”
“당과라면 얼마든지 사 줄게.”
갑자기 급속도로 친해지는 둘의 모습에 한빈이 미소를 지을 때였다.
한빈은 뒤쪽에서 기척을 느꼈다.
동시에 한빈은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가 번개와 같은 속도로 달려왔다.
풀잎조차 흩날리지 않는 것이 보통의 경지가 아니었다.
놀랄 틈도 없이 의문의 사내는 무복 자락을 휘날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다가오는 그를 바라봤다.
뿜어내는 기척으로 봐서 적은 아니었다.
휘릭!
홍칠개와 비견하는 속도로 날아온 사내는 일행 앞에 가뿐히 멈췄다.
탁!
한빈은 그의 외모를 살폈다.
한빈이 눈매를 좁히고 있을 때 먼저 반응한 것은 서문진경과 서문수연이었다.
“아버님.”
“아버지.”
사내의 정체는 서문진경과 서문수연의 아비인, 서문무결이었다.
서문무결이 물었다.
“수연아, 대체 무슨 일이더냐? 네 비명을 듣고 급하게 뛰어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버지. 거미를 보고 놀랐는데, 이분들이 구해 주셨어요.”
여러 오해가 있었지만, 서문수연은 간단하게 도움을 받았다고만 표현했다.
서문수연이 한빈 일행을 가리키자 서문무결은 한빈 쪽으로 가볍게 포권했다.
“우리 애들을 도와줘서 고맙네. 나는 서문무결이라 하네.”
나이 많은 서문무결이 먼저 예를 차리자 한빈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한빈은 빙긋 웃으며 서문무결을 바라봤다.
갸름한 얼굴에 날렵한 턱선.
머리에 얼핏 보이는 흰머리만의 그의 나이를 짐작게 했다.
화경의 고수이자 서문세가를 대표하는 검객.
검을 위해 가주 자리를 동생에게 양보하고 오직 수련에만 전념했던 집념의 검객.
강북에서 가장 무거운 검을 구사하는 검객.
검객이라는 말 앞의 화려한 설명들이 그의 위상을 말해 주고 있었다.
물론 한빈의 전생 기억에도 있는 고수였다.
강북제일검을 넘어 천하제일검으로 중원에 우뚝 선 자.
대쪽 같은 성격 탓에 군자검이라 불리며 정의맹에 눈 밖에 난 자.
전생에는 한빈과 같은 배를 탔던 적은 없었지만, 현생에는 손을 잡아야 하는 자였다.
게다가 몸 곳곳에 일렁이는 점.
그것은 분명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분명했다.
사실 서문진경과 서문수연을 만나고도 그냥 가기에는 빈손으로 가는 것 같아서 서운했다.
그런데 서문무결이라니?
어찌 보면 길 가다가 고수 하나를 주운 느낌이었다.
한빈이 가볍게 포권하며 말했다.
“별일 아닙니다. 산길을 오르다가 작은 도움을 드린 것뿐입니다. 그리고 대협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팽한빈이라고 합니다.”
한빈의 호의 가득한 눈빛에 서문무결도 마주 웃었다.
“팽가라……. 그럼 혹시 하북팽가 사람이란 말인가?”
“네, 맞습니다. 하북팽가의 막내 팽한빈이라고 합니다.”
“하북팽가라…….”
서문무결을 말끝을 흐리며 한빈이 허리에 찬 검을 바라봤다.
그 시선의 의미를 한빈은 알고 있었다.
서문세가라면 하북팽가와 더불어 강북 오대세가 중 하나였다.
그 때문에 교류도 적지 않은 편이라 서로를 잘 아는 상태.
한빈이 작게 웃으며 답했다.
“가끔 하북팽가에는 검객이 없다 오해를 받고는 하죠.”
“실례였다면 미안하네.”
“아닙니다.”
그때였다.
서문무결의 시선이 서문진경의 검신으로 향했다.
서문진경은 반 토막이 난 검신을 아직 들고 있었다.
그 검신을 확인한 서문무결의 시선이 이무명이 들고 있는 검으로 향했다.
그의 검신 또한 반 토막이 나 있었다.
둘의 검신을 확인한 서문무결은 슬쩍 바닥을 바라봤다.
서문무결은 둘의 검과 바닥에 흩어진 검신의 조각만으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게 대체…….”
서문무결이 주위를 둘러봤다.
저런 절묘한 수법으로 둘의 대결을 말릴 만한 고수가 주변에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아래쪽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서문무결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아래쪽을 바라봤다.
“대규모의 인원이 이쪽으로 오고 있군.”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대협.”
“그게 무슨 말인가?”
“제 일행입니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아래에서 올라오는 맹호사대에게 걸어갔다.
옆에 있던 설화와 이무명도 당연하다는 듯 한빈이 뒤를 따랐다.
멀어지는 한빈을 본 서문무결이 서문진경을 바라봤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그러니까…….”
서문진경은 한빈 일행과 있었던 일을 털어놨다.
서문무결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서문진경이 설명을 마쳤을 때 서문무결의 시선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부서진 검신 조각에 멈춰 있었다.
서문무결이 다시 물었다.
“저것이 팽가 사 공자의 작품이라는 것이 확실한 것이냐?”
“네, 그렇습니다. 아버님. 아까 하북팽가의 사람이란 걸 알고 저도 적잖게 놀랐습니다.”
“흠.”
“왜 그러십니까? 아버님.”
“그 일은 잠시 미루고 저 일행을 잠시 따라가자꾸나.”
“그럼 아버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어떻게 하고요?”
“그건 조금 미루고 저 친구의 검에 대해서 알아봐야겠구나.”
서문무결은 멀리서 수하들과 대화를 나누는 한빈을 바라봤다.
그때 서문수연이 끼어들었다.
“아버지, 저는 대찬성이에요. 새로운 친구도 사귀었으니 금방 헤어지고 싶지는 않아요.”
“새로운 친구라니, 저 사 공자를 말하는 것이냐?”
“아니에요, 사 공자의 시녀를 말하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서문무결은 뜻밖이라는 듯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서문수연을 바라봤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한빈이 씩 웃었다.
서문무결은 먼저 다가가면 뒤로 물러나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훌쩍 떠나야 다가올 사람이 서문무결이었던 것이다. 대화를 들어 보니 한빈의 의도가 정확히 적중했다.
일단 낚시는 성공한 것 같은 기분에 한빈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 * *
한 시진 후.
서문무결은 한빈 일행과 함께했다.
마치 원래 일행인 것처럼 서문무결은 아무렇지도 않게 한빈과 맹호사대를 대했다.
화경의 고수치고는 소탈한 그의 성격 때문인지 맹호사대의 대원들도 그다지 어려워하지 않고 그를 대했다.
한빈과 설화도 마차에서 내려서 서문무결과 함께 걷고 있을 때였다.
맹호사대를 살피던 서문무결이 한빈에게 물었다.
“진혈맹호대인가?”
진혈맹호대는 하북팽가에서 세 번째로 강한 무력대로 집법당주 팽대위가 관리하는 무력 단체였다.
이것은 그만큼 맹호사대의 면모를 높이 평가한다는 말.
한빈이 작게 웃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제 수하들인 맹호사대입니다.”
“자네의 수하라……. 그럼, 자네가 하북팽가의 소가주 후보라는 말인가?”
서문무결의 눈이 커졌다.
무력대의 칭호는 소가주 후보의 수하부터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직 검에만 관심이 있던 서문무결은 하북팽가에서 새로운 소가주 후보가 탄생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네, 맞습니다. 얼마 전에 소가주 후보로 인정받았습니다.”
“허허, 내가 너무 관심을 끊고 살았어. 같은 강북 오대세가에 이런 변화가 있었는데도 모르고 있다는 게 쑥스럽군. 미안하네.”
“그럴 수도 있죠. 저는 괜찮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가십니까?”
한빈을 물끄러미 서문무결을 바라봤다.
수련에만 전념하고 가문 밖으로는 잘 나오지 않는다 들었는데 이렇게 나온 이유가 진심으로 궁금했다.
서문무결이 사람 좋은 얼굴로 답했다.
“꼭 만날 사람이 있어 찾아가고 있다네.”
“만날 사람이라고요?”
“적룡대협이라는 사파의 고수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