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빈손은 섭섭하지 (5)
한빈이 가볍게 웃었다.
“하하, 그 혹시가 맞을걸. 뭐, 청운사신이 있는 곳을 소개해 주고 소개비를 받을 수 있고 또…….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지.”
물레방아처럼 쉴 틈 없이 뱉어 내는 한빈의 계획에 설화가 다시 입을 벌렸다.
청운사신을 이용해 장사를 하려는 속셈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가당키나 한 이야기던가?
혼미해지는 정신을 겨우 잡은 설화가 다시 말을 이었다.
“자, 잠시만요. 공자님. 어떻게 청운사신이 있는 곳을 알려 줘요? 청운사신은 바로 공자님이잖아요.”
“내가 장백산에 청운사신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장백산을 뒤지겠지.”
“그럼 헛수고할 게 아니에요.”
“그게 이 사업의 요점이야. 청운사신이 누군데 그런 자들 눈에 띄겠어. 못 찾은 건 그들 책임이지. 하하.”
한빈은 작게 웃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사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청운사신을 빌미로 정의맹에서 일정량의 영단을 뜯어낼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뭐 운이 좋다면 성공할 것이고 운이 나빠도 본전이니 밑질 것은 없는 장사였다.
설화는 한빈을 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다시 인생의 외줄을 타는 느낌이 든 것이었다.
정의맹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 하다니 누가 이런 상상을 하겠는가?
어떨 때는 성인군자인데, 어떨 때는 칼만 안 들었지 강도에 가까웠다.
아니, 정확히는 칼도 들고 있었다. 월아뿐 아니라 단검까지 몸의 곳곳에 준비해 놓았으니 칼을 여러 개 든 강도라고 해야 할까?
한빈과 같이 있으면 편안하다가도 불현듯 느끼는 이 아슬아슬한 감정.
이것은 살행을 나갔을 때보다도 머리카락이 쭈뼛 돋는 경험이었다.
그때였다.
심미호가 다급히 달려와 외쳤다.
“앞쪽에 적이에요! 아무래도 이 호위가 습격당한 것 같아요. 주군!”
그녀의 외침에 한빈이 재빨리 마차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구걸십팔보를 운용했다.
사사삭.
풀잎 밟는 소리와 함께 한빈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챙! 챙!
아버지인 서문무결을 따라 강호행을 나온 서문세가의 젊은 검객, 서문진경은 지금 정신이 없었다.
자신도 꽤 빠른 검을 구사한다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문진경은 팔을 뻗었다.
날아오는 검을 피하며 엉겁결에 뻗다 보니 조금은 엉성했다.
엉성한 자세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서문세가의 화려한 검이었다.
서문진경이 이렇게 싸우는 이유는 자신의 동생을 해하려는 산적을 처단하기 위함이었다.
서문진경의 목표는 산적을 생포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나머지 무리도 토벌할 수 있었으니까.
혼자서 산적을 토벌한다라?
어찌 보면 불가능할 수 있지만, 자신의 아버지인 서문무결이라면 가능했다.
서문세가 최초로 막 화경에 발을 들였으며 강북무림을 대표하는 검객으로 우뚝 선 것이 바로 서문무결이었다.
이 산적은 자신이 생포하고 산적 토벌은 아버지에게 맡기면 된다는 것이 서문진경의 계획이다.
검을 나누던 서문진경이 눈을 가늘게 떴다.
상대의 검은 빠르고 예리했다.
산적 주제에 이렇게 예리한 검법을 구사하다니!
챙. 챙.
이번에는 상황이 바뀌어서 상대가 매섭게 서문진경을 몰아붙였다.
계속된 공격에 서문진경은 방어를 이어 나갔다.
서문진경은 검을 좌우로 흩날리며 날아오는 상대의 검날을 막기에 바빴다.
챙.
가장 큰 문제는 상대가 자신만큼 빠르고.
자신만큼 묵직하다는 점이었다.
검이 오갈 때마다 저릿했다.
물론 진기를 운용한다면 이 승부는 일초지적도 되지 않겠지만, 산적에게까지 내공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초식이 예리하기는 했지만, 누가 봐도 상대는 산적이었으니까.
챙, 챙.
검이 내는 소리가 마치 악기 소리처럼 박자가 맞아떨어졌다.
초식으로는 둘의 실력이 동수라는 이야기였다.
서문진경은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되었다.
상대의 속도가 자신의 초식을 압도하고 있었다.
챙. 챙.
상대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문제는 속도보다 검의 묵직함이었다.
서문세가의 중검을 능가하는 무게라니?
서문진경은 자신도 모르게 진기를 끌어올렸다.
단전의 기운이 사지백해로 흐르니 검의 움직임이 한층 더 자유로워졌다.
순간 서문진경은 무아지경에 빠졌다. 가전 심법인 청학 심법이 머리가 아닌 몸으로 다시 해석되고 있었다.
그 깨달음은 서문진경도 모르게 이 대결의 향방을 바꾸고 있었다.
검에 진기를 불어넣고 있지는 않지만, 서문세가 특유의 중검이 몸을 자유롭게 하며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무게에서 동수를 이루자 이제는 서문진경의 검이 상대의 검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상대의 검도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서문진경의 검신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상대의 검 끝에도 검기가 일렁였다.
상대도 무아지경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을 서문진경은 알 수 없었다.
무아지경이란 그런 상태였으니까.
둘의 대결을 바라보던 서문수연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오라버니 서문진경이 상대하는 이는 산적이 아니었다.
단자 자신의 비명을 듣고 구해 주기 위해 온 자였다.
그런데 오해가 생긴 것이다.
이건 분명 오라버니의 실수였다.
과연 어떻게 된 것일까?
이유는 간단했다.
서문수연은 극심한 거미 공포증이 있었다.
희한한 약초를 보고 다가갔는데, 거기에 거미가 있던 것이었다.
그 거미를 보고 비명을 지르는 동시에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그때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이가 바로 오라버니 서문진경이 산적이라고 오해하며 싸우고 있는 사람이었다.
다리라도 움직인다면 달려가서 막을 텐데,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다리도 움직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저 거미만 어떻게…….’
서문수연은 덜덜 떨면서도 속으로 천지신명께 기도했다.
오라버니가 무고한 이를 해치지 않게 해 달라고 말이다.
그런데 둘의 상황이 심각해지자 서문수연은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오라버니, 그자는 산적이…….’
하지만,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서문수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서문수연의 귓가에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탕.
눈을 감았던 서문수연이 눈을 떴다.
대결은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멈춰져 있었다.
달라진 점은 오라버니인 서문진경과 산적으로 오해받는 사내 사이에 누군가가 우뚝 서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검을 검집에서 빼지도 않은 채 둘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서문수연은 서문진경과 상대의 검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상한데 아무리 봐도 이상한 점을 찾을 수가 없던 것이다.
서문수연은 순간 옆에 거미가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천천히 그곳으로 걸어갔다.
무의식중에 거미 공포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가까이 가서야 서문수연은 자신이 이상하다고 느낀 점이 뭔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아!”
서문수연은 짧은 탄성을 뱉었다.
자세히 보니 서문진경의 검신이 반 토막이 나 있던 것이다.
물론 상대의 검도 반 토막이 나 있었다.
중간에 끼어든 사내는 서문진경과 산적으로 오해받은 상대가 서로의 목을 뚫으려는 상황에서 둘의 검을 반으로 잘라 놓은 것이다.
서문수연은 그제야 가운데에 서 있는 한빈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그녀의 머릿속에 의문이 겹겹이 쌓였다.
분명 자신의 오라버니는 절정의 검객이었다.
절정의 그것도 상급에 속하는 경지.
그런데 어떻게 그 검을 잘라 낸다는 말인가?
서문수연은 토막 난 검신을 찾아 고개를 숙였다.
“아, 이게 대체…….”
서문수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검은 반 토막이 난 것이 아니었다.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서문수연이 멍하니 있을 때 오라버니와 상대의 싸움을 막은 사내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래?”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물론 한빈이었다.
한빈이 봤을 때 둘은 동시에 무아지경에 들었다.
그러고는 검으로 서로 상대의 목을 꿰뚫으려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한빈이 둘의 검을 날려 버린 것이다.
한빈의 말에 한 폭의 수묵화처럼 멈춘 채 상대에게 검을 겨누고 있던 검객 둘이 정신을 차렸다.
두 검객은 동시에 한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둘은 동시에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을 바라보고 자신의 검을 보기를 반복하던 그들 중 이무명이 입을 열었다.
“사, 사부, 여기에는 대체 무슨 일로…….”
“정찰 내보낸 놈이 여기서 왜 쌈질을 하고 있어?”
한빈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묻자 이무명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 그게. 여기 있는 양반이 다짜고짜 칼질을 해 대기에…….”
이무명이 말끝을 흐리자 한빈은 고개를 돌렸다.
한빈의 시선을 받은 서문진경은 순간 움찔했다.
한빈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문진경은 저 눈빛을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서문진경이 동네 아이들과 싸웠을 때였다.
말리러 온 아버지 서문무결은 모두를 나무랐지만, 살기 어린 시선 하나만으로 상대 아이들이 오줌을 지리게 만들었다.
저것은 자기 아이를 보호하려는 부모의 눈빛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사부보다 제자의 나이가 더 많아 보였다.
물론 수염을 덕지덕지 붙인 이무명의 외모 덕분에 서문진경이 착각한 것이었다.
문제는 한빈의 나이를 아무리 많이 잡아도 자신보다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서문진경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어느 문파의 노고수이신지…….”
그 말에 한빈이 인상을 구겼다.
“이건 어디서 온 빌어먹을 놈이야? 대낮부터 술을 처먹고 남의 애한테 칼질을 해 대!”
한빈이 보기에 서문진경은 술 마시고 헛소리를 하는 자로 보였다.
자신에게 노고수라니?
이것은 노안이라고 대놓고 욕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게 말이 되는가!
한빈의 외침에 서문진경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다급히 외쳤다.
“죄, 죄송합니다. 얼굴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반로환동한 분으로 착각을…….”
“일단 접수하고, 왜 싸웠지나 말해 보라고.”
“산적인 줄 알고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니…….”
서문진경은 지금 죽을 맛이었다.
뭔가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린 것 같았다.
순간 서문진경의 머릿속에는 어릴 때 실수로 건드린 벌집이 떠올랐다.
그때였다.
조그만 아이가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아저씨, 제가 그래서 말했잖아요. 산적으로 오해를 받을 거라고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물론 설화였다.
하지만, 설화의 정체를 모르는 서문진경은 놀라 뒷걸음쳤다.
기척도 없이 갑자기 나타난 조그만 여자아이에 놀랐던 것이다.
한빈은 팔짱을 끼고 서문진경을 바라보고.
서문진경은 고개를 푹 숙이고.
이무명은 멋쩍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그들의 옆쪽에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모든 게 저 때문이에요.”
작은 목소리지만, 모두의 시선을 모으기에는 충분했다.
모두의 시선이 한 곳에 모이자 서문수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어렵게 말을 이었다.
“다 오해예요.”
서문수연을 본 서문진경이 놀라 물었다.
“수연아,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
“제가 거미를 보고 놀라 비명을 질렀는데, 저기 계신 분이 저를 돕기 위해 오신 거예요.”
서문수연은 조심스럽게 이무명을 가리켰다.
“그럼, 내가 오해를…….”
서문진경이 이무명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것도 잠시 그는 깊숙이 포권하면 다시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소협. 저는 그것도 모르고 오해를 했습니다.”
“오해야 할 수 있는데, 변명할 틈도 주시지 않더군요. 검이 정말 묵직했습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당황했습니다. 참,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서문진경입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아이는 제 누이 서문수연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문수연이에요. 저도 사과드려요, 절정검 소협.”
서문진경에 이어 서문수연까지 인사하자 이무명도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이무명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