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빈손은 섭섭하지 (4)
잠시 후 연공실에 도착한 정인지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연공실 문 한쪽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으며 한쪽은 달랑거리고 있었다.
이곳이 한빈에게 내어 준 연공실이라는 것이 기억이 난 것이다.
“침입자가 아니라 귀빈께서 난장판을 만들어 놓고 떠나셨구나. 허허.”
뒤돌아서려던 정인지가 이어진 소리에 멈췄다.
쿵!
나머지 남은 문 하나마저 쓰러진 것이다.
그때였다.
정인지의 시야에 이상한 광경이 들어왔다.
허물어진 벽을 메꿔 놓은 나뭇가지가 지금 쓰러진 문 때문에 대롱대롱 흔들리더니 이내 떨어진 것이다.
정인지가 눈매를 좁히는 모습에 수하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가주님.”
“횃불을 이리 줘 보거라!”
정인지가 횃불을 빼앗아 들고 연공실로 들어섰다.
휑한 벽면이 눈에 들어왔다.
이무명과 설화가 막아 놓은 부분이 반쯤은 허물어져 있는 상태.
정인지는 이 공간이 기억이 났다.
정인지의 아버지, 전대 가주 정무룡은 이 공간을 이렇게 말했었다.
‘수수께끼가 가득한 쓸모없는 공간.’
대대로 하남정가 사람들은 이 공간의 비밀을 풀지 못했다.
하지만 하남정가는 남들에게 이 공간을 보여 주기는 싫었다.
그래서 막아 놓은, 방치한 곳이었다.
정인지가 열 살이 되기 전에는 개방된 공간이었다.
그래서 정인지도 이 공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막혀 있던 여기가 왜 뚫려 있단 말인가?
정인지는 조심스럽게 그 사이로 내부를 들여다봤다.
순간 그의 시야에 만년암석으로 만들어진 비밀 공간이 들어왔다.
정인지는 나뭇가지를 치우고 비밀 공간 안으로 횃불을 비추어 보았다.
그러고는 바로 입을 벌렸다.
“허…….”
벽면의 무수히 많은 검흔(劍痕)이 눈에 띄었다.
정인지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토해 냈다.
“대체 무슨 수로 만년암석으로 된 벽에 저런 흔적을 냈다는 말인가? 허허.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때 수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가주님, 뭐라 하셨는지요?”
수하 덕분에 정신을 차린 정인지가 횃불을 꽂고 수하에게 말했다.
“너는 어서 가서 가주님, 아니 아버님을 모셔 오너라.”
정인지는 어찌나 당황했는지 자신이 가주가 되었다는 것도 잊을 뻔했다.
“네, 알겠습니다.”
수하가 깊숙이 포권하고 바로 연공실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비밀 공간 안에 나란히 선 정무룡과 정인지는 서로를 마주 봤다.
정무룡이 먼저 말했다.
“하나의 검로 안에 또 다른 검로가 있군.”
“나눠진 검로 안에 다른 검로가 또 존재하는군요, 아버님.”
정인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 둘의 눈동자에 벽에 새겨진 검로가 비친다.
검로 속의 검로.
그 검로 속의 검로가 반복되는 형태.
정무룡의 눈빛이 물결치는 파도처럼 흔들렸다.
빠른 검기로 백 개의 결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그물처럼 사용하는 하남정가의 비기, 쾌검백결의 원형이 되는 무공이 분명했다.
사실 가문에 이 무공의 원형이 전해졌다면 좋았을 테지만, 비기가 전해지고 몇 대가 지난 후에는 그 뼈대만 남았다고 전해진다.
그 남은 뼈대로 만든 것이 바로 하남정가 최고의 비기였다.
정무룡과 정인지는 마치 어린아이의 머리를 만지듯 조심스럽게 벽면을 쓰다듬었다.
백 개가 아닌 천 개, 아니 그 이상도 만들어 낼 수 있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초식이 여기에 남겨져 있었다.
과연 이것을 누가 남겼다는 말인가?
정무룡의 어깨가 간헐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희열이 온몸을 관통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검로만 있다면 쾌검백결의 원형을 충분히 복구하고도 남았다.
정인지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인 정인지의 표정을 보니 자신의 생각이 맞았던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잠시 침묵이 오가더니 아비인 정무룡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곳에 누가 왔다 갔는지 아느냐?”
“하북팽가의 사 공자입니다.”
정인지가 답하자 정무룡이 천장을 보며 웃었다.
“허허.”
“아, 아버님! 저 밑에 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정인지는 다급하게 허리를 숙여 글귀를 확인했다.
-파혼검
그곳에는 이 초식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정인지가 조용히 초식의 이름을 읊었다.
“파혼검.”
“이 초식의 이름이 파혼검이었구나. 아들아, 그런데 그 필체는…….”
정무룡이 말끝을 흐리자 정인지가 그의 말을 받았다.
“마, 맞습니다.”
정인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방금 봤던 계약서의 필체.
분명 이 필체의 주인은 하북팽가의 사 공자 한빈이 맞았다.
가슴을 진정시킨 정인지가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대체 그를 뭐라 불러야 한단 말입니까?”
“나도 모르겠다. 그가 원하는 대로 그냥 사 공자라고 부르자꾸나.”
“네, 아버님.”
정인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다시 하남정가가 날아오를 날이 머지않았다.
생각을 마친 정인지는 자신의 아비인 정무룡에게 큰절을 올렸다.
“아버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잠시나마 그분의 의도를 의심했습니다. 역시 아버님의 선택이 옳았습니다. 대대손손이라는 문구야말로 올바른 선택이셨습니다.”
“그래 이해해 주니 고맙구나. 그런데 대대손손이라니…….”
정무룡은 고개를 갸웃했다.
대대손손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 보는 문장이었다.
사실 정무룡은 한빈과 계약서를 쓰면서 회한으로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그런 이유로 세세한 문구까지는 보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무룡의 생각은 정인지의 다음 말에 끊겼다.
“아버님. 이게 모두 아버님의 선택 덕분입니다.”
“그래. 이제 아픔은 거둬 버리고 하남 아니 강남에 하남정가의 이름을 떨쳐야 한다.”
그렇게 두 부자는 결의를 다졌다.
* * *
한빈 일행이 하남정가를 떠난 지 이틀 뒤.
한빈 일행은 이제 사연 많은 영단산 초입을 막 지나려 하고 있었다.
한빈은 마차에서 여유 있게 창밖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한빈이 보고 있는 것은 창밖의 풍경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이는 없었다.
[기본편]
[……]
[심(心) : 사(四)]
용린검법의 기본편을 바라보는 한빈의 입가에는 미소가 슬며시 퍼졌다.
용린검법의 흔적과 이어진 이의 마음이 진룡파혼검을 운용하는 심(心) 구결을 얻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 한빈은 자신이 떠난 후 연공실의 흔적을 발견하기 편하게 안배를 해 놓았던 것이다.
그 결실을 지금 늘어난 심(心)의 숫자가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빈은 왜 아무 조건 없이 그들에게 이런 안배를 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파훼법에 있었다.
파혼검이 널리 퍼져 나가든 하남정가의 비기로 남든 그것은 관계없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한빈만이 그 파훼법을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하남정가의 궁극의 비기 위에 다름 아닌 한빈이 있다는 말이었다.
퍼 줄 때 퍼 주더라도 채무에 대한 담보는 철저히 관리한다는 것이 한빈의 원칙이었다.
한빈의 미소를 바라본 설화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공자님, 지금 그 웃음 좀 이상해요.”
“어, 뭐가?”
“또 악당 같은 표정을 하고 있잖아요, 공자님.”
“악당은 무슨 악당? 이번에는 진짜 좋은 일을 했다고. 그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웃은 거고.”
“아, 그러시구나.”
설화가 영혼 없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일 때 밖에서는 말을 탄 조호가 달려와서 열린 창문으로 뭔가를 툭 던졌다.
휙!
날아온 꼬치를 설화가 아무렇지 않게 덥석 잡았다.
그 모습을 확인한 조호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설화야, 당과다! 이 젊은 삼촌이 쏘는 거다.”
말을 타고 멀어지는 조호를 본 설화가 손을 흔들었다.
“고마워요, 조호 아저씨.”
인사를 마친 설화가 당과를 한 입 베어 물자 한빈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는 자연스레 외모와 어울리는 나이에 적응해서 그 삶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이는 설화였다.
한빈은 마차 밖을 살폈다.
마차 주변으로는 하남정가에서 받아 온 물품들로 가득 찬 수레들이 줄을 잇고 있다.
올 때는 소수 정예였지만, 돌아가는 길은 맹호사대와 함께하는 관계로 시끌벅적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떠나기 바로 전, 광개가 하남정가로 찾아온 것이다.
그 바람에 분타의 일이 끝나면 꼭 천수장으로 찾아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홍칠개는 광개와 개봉 하남분타로 향했다.
만약에 홍칠개까지 왔다면 여긴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었다.
영단산의 초입에 들어서자 앞서가던 이무명이 손을 들었다.
“잠시만 멈추십시오.”
한빈 쪽으로 후다닥 달려온 이무명이 포권하며 말했다.
“사부, 저쪽에 사람의 흔적이 너무 많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영단산에 이 정도의 흔적이 남을 리가 없습니다.”
“흠, 짐작 가는 바는 있긴 한데…….”
한빈이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예상되는 것은 사파가 영단산에서 할 작업이었다.
당시 잔혈마도에 의해 당한 사파인들도 꽤 되었다.
죽은 동료를 수습하는 것은 사파나 정파나 매한가지.
한 달 남짓한 지금 아마도 그 수습이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없었다.
한빈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이무명은 먼저 포권했다.
“사부, 제가 앞쪽을 정찰하고 오겠습니다.”
그 모습에 마차 안에 있던 설화가 끼어들었다.
“아저씨, 안 가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설화야, 그게 무슨 말이냐?”
“아저씨 지금 모습이 오해받기 딱 좋아요.”
“오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설화야.”
“꼭 산적 같아요.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산적 그 자체예요. 사파인들도 산적한테는 그리 너그럽지 않다고 하던데…….”
설화가 말끝을 흐리자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푸웁.”
이렇게 진심으로 웃어 보는 것이 얼마 만이던가?
한빈은 그들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하지만, 이무명은 삐진 듯 한숨을 내쉬었다.
“주군! 설화야! 후…….”
그 한숨에 어렵게 붙여 놓은 턱수염이 흩날렸다.
사실 이무명의 수염은 조금은 과한 면이 있었다.
수염으로 변장을 하다 보니 그게 취미가 되었고 점점 과해져서 지금의 산적 수염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었다.
한숨을 내쉬던 이무명은 가볍게 땅을 박차고 산길 사이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나 행렬은 잠시 멈췄다.
여기저기서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기에 바빴다.
소대섭은 앞쪽에서 맹호사대 대원들을 토닥이고 있고 장삼과 조호는 뒤쪽에서 하남정가에서의 활약상을 자화자찬하고 있었다.
심미호는 장자명이 길가에서 약초를 수집하는 것을 돕고 있었다.
길 가다가 놓친 약초가 없게 하라는 한빈의 지시 때문이었다.
모두가 정신없이 수다를 떨 때 설화가 물끄러미 한빈을 바라봤다.
설화의 시선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니? 설화야.”
“진짜 궁금한 게 있어서요.”
“흠, 궁금하면 철전 다섯 닢.”
“아, 공자님. 저 돈이 없잖아요. 당과도 아저씨들이 사 주는데…….”
“그럼, 특별히 이번만 공짜다. 궁금한 게 뭐니?”
“왜 공자님이 청운사신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는 거예요?”
“흠, 그건 너무 간단한데.”
“뭐가 간단한데요?”
“강호라는 게 보통 상대를 봐 가면서 덤비거든. 그런데 내가 화경의 고수라고 알려져 봐 봐. 과연 어떤 경지에 있는 이들이 찾아올까?”
“음, 물론 화경의 고수가 찾아오겠죠.”
“그렇지. 그것도 화경에 처음 오른 일 경이나 이 경의 고수가 아닌 삼 경 이상의 고수가 들이닥칠걸. 나를 꺾고 자신의 명성을 더욱 널리 알리려고 말이야. 설화야, 네가 보기에 내가 진짜 화경의 고수 같아 보이냐?”
“그건…….”
설화는 말끝을 흐렸다.
한빈의 능력은 측정할 수 없었다.
화경이라 확신할 수도, 그 이하라 할 수도 없었다.
말끝을 흐리던 설화가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홍칠개 할아버지가 청운사신의 위명을 알리는 건 말리지 않았잖아요.”
“그야,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으니 남는 장사지. 사람들이 청운사신을 찾으려면 누굴 찾아오겠어?”
“그야…….”
“그래, 당연히 나를 찾아오겠지. 공식적으로 청운사신과 관계있는 자는 나 하나뿐이니까!”
한빈이 당당하게 자신을 엄지로 가리키자 설화가 입을 떡 벌리고 있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
“혹시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