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빈손은 섭섭하지 (3)
한빈은 진지한 표정도 잠시.
턱을 매만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흔히 꼽사리라고 하지.”
“아!”
설화가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크게 벌렸다.
이런 진지한 상황에서 튀어나올 이야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화는 진심으로 한빈의 본마음이 궁금했다.
한빈에 의해 강제로 독을 먹고, 해독을 위해 삼 년 동안 시녀 노릇을 하기로 한 자신이었다.
그런데 한빈과 지내다 보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누구보다 자신을 잘 챙겨 주는 것이 한빈이라는 생각이다.
아버지인 흑천의 주인보다도, 엄격하기만 했던 어릴 적 유모보다도 더 잘 챙겨 줬다.
설화는 어릴 적 못 누린 것을 지금 모두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끔 위험한 일도 있지만 말이다.
설화는 한빈의 지시에 따라 초식을 하나하나 배워 나갔다.
설화가 생각하기에 한빈은 타고난 무공 교관이었다.
모든 동작 하나하나를 쉽게 설명했으며 틀린 동작을 정확히 짚었다.
반나절 정도를 수련하자 한빈이 말했다.
“나는 잠시 쉬고 있을 테니 너희들끼리 수련해.”
설화와 이무명은 동시에 포권했다.
“네, 알겠습니다.”
“명 받들게요.”
한빈은 조용히 연무장의 구석으로 가서 허공에 뜬 비급을 살폈다.
[기본편]
[속(速) : 삼십(三十)]
[……]
[심(心) : 공(空)]
마음을 나타내는 심이라는 속성이 생겼다.
하지만, 그 마음은 쌓이지 않았는지 비어 있음을 나타내는 공(空)이 자리 잡고 있었다.
기본편에 새롭게 자리 잡은 심(心)이 진룡파혼검을 사용할 수 있는 속성이 분명했다.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한빈의 미소를 바라본 이무명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설화야, 사부의 표정이 이상하구나. 아무래도 조심해야겠지?”
“그건 당연하죠. 알아서 기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말을 마친 설화는 재빨리 허공에 검을 놀리며 한빈이 가르쳐 준 파혼검의 형태를 만들어 나갔다.
* * *
보름 후.
임무가 끝나면 바로 떠나려 했지만, 용린검법의 안배를 얻은 한빈은 그 깨달음을 실천하기 위해 하남정가에 잠시 머물렀다.
물론 그 실천이라는 것은 파혼검의 전수였다.
그동안 한빈은 이무명과 설화에게 파혼검의 형태와 속성을 전달했다.
그 둘은 한빈이 전한 파혼검을 어설프게나마 익힐 수 있었다.
남들은 모르겠지만, 한빈은 그 결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기본편]
[……]
[심(心) : 이(二)]
설화와 이무명에게서 심력을 획득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빈이 깨달은 사실도 꽤 많았다.
홍칠개에게 구걸십팔보를 사사받으며 융합편의 길을 열었었다.
그때 이상했던 것이 홍칠개가 펼치는 구걸십팔보는 극성이 아닌데 자신이 펼치는 구걸십팔보는 극성이라는 점이다.
물론 용린검법의 기본편 중 속의 구결을 이용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차이였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둘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면 분명 파혼검을 일정 수준까지 펼칠 줄 알았다.
하지만, 한빈이 전한 파혼검의 완성형에 다다르기에는 두 사람의 실력이 많이 부족했다.
초식의 깨달음을 굳이 나눈다면 십이 성 중 일 성 정도에 해당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처음부터 극성까지 펼칠 수 있는 건 용린검법과 인연이 있는 자신밖에는 없다 결론을 내렸다.
물론 그들이 배웠던 검법보다는 몇 단계 위에 있는 상승 검법임에는 틀림 없었다.
그것은 이무명도 설화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한빈은 이제 하남정가를 떠나 하북으로 돌아가야 할 때임을 알고 있었다.
한빈이 가주 정무룡과 작별 인사를 나누기 위해 가주전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가주의 호위 무사 하나가 번개처럼 한빈에게 뛰어왔다.
“공자님! 가주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그의 말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보름 동안 하남정가의 가주 정무룡은 모든 편의를 제공했지만, 한빈을 찾은 적은 없었다.
필시 상상도 못 할 급한 일이 생겼음이 분명했다.
‘과연 무슨 일일까?’
* * *
가주전에 도착한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그곳에는 자신까지 네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사부인 홍칠개는 먼저 와 있었고 그 옆에 가주 정무룡 그리고 대공자 정인지가 나란히 서 있었다.
어쩐 일인지 그중 대공자 정인지는 한마디 말도 없이 석상처럼 문 앞에 서 있었다.
한빈이 이게 무슨 일일까 하는 의문을 품고 있을 때 가주 정무룡이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은 하남정가에 있었던 사건을 마무리 짓고자 함입니다. 저는 마지막 단죄를 실행하겠습니다.”
홍칠개는 무슨 말인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한빈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지난 보름간 하남정가에서 일어난 참변이 어느 정도 수습되자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한 자리 같았다.
지금의 분위기로 보면 가주 정무룡은 대공자 정인지에게 책임을 물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가주 정무룡은 이번에는 한빈과 홍칠개를 번갈아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 대해 귀빈 두 분을 증인으로 요청하는 바입니다. 들어 주실 수 있을는지요.”
말을 마친 정무룡은 비장한 표정으로 한빈과 홍칠개에게 포권했다.
홍칠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물론이네, 가주.”
“네, 저도 좋습니다.”
한빈도 정무룡의 청을 승낙했다.
그러고는 옆을 힐끔 봤다.
그곳에는 얼떨결에 따라온 설화와 이무명이 서 있었다.
아무래도 둘이 있을 자리는 아니란 생각이 되었다.
한빈이 막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려 할 때였다.
정무룡이 고개를 저었다.
“사 공자, 그들은 사 공자의 수족이 아닙니까? 같이 있어도 좋습니다.”
설화와 이무명을 바라본 정무룡은 그들에게도 포권했다.
하남정가를 구하는 데 이무명과 설화의 공도 컸다고 인정하는 표정이었다.
말을 마친 정무룡은 천천히 태사의로 걸어갔다.
터벅터벅.
일부러 내공을 실어 걷는 것처럼 가주전이 울렸다.
정무룡이 태사의가 부서질 정도의 기세로 앉았다.
탁!
정인지를 매섭게 쏘아본 정무룡이 말했다.
“할 말이 있으면 말해 보아라.”
정무룡의 날 선 외침에 정인지가 천천히 태사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러고는 정무룡의 발아래 자신의 검을 풀어 놓았다.
탁!
그가 내려놓은 검은 소가주를 나타내는 하남정가의 신물이었다.
검을 본 정무룡이 물었다.
“무슨 뜻이더냐?”
“저는 소가주로서 자격이 없습니다.”
“자격이 없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건 일리가 있구나.”
말을 마친 가주 정무룡은 천천히 태사의에서 내려왔다.
터벅터벅.
정인지의 곁으로 다가온 정무룡은 정인지가 내려놓은 검을 잡았다.
그 검집을 매만지던 정무룡은 그 검을 뽑았다.
스릉!
창문 틈 사이로 스며든 햇빛을 받은 검신이 묘하게 일렁인다.
그것이 햇빛인지 검기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정무룡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정인지의 목에 갖다 댔다.
조금 힘만 주면 정인지의 목이 달아날 상태.
그 장면을 지켜보던 이무명은 눈을 크게 떴다.
하남정가에서 십 년 넘게 밥을 먹으며 가주 정무룡이 이렇게 노한 모습은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진짜 정인지의 목을 치려는 것일까?’
그것도 안 되었다.
자신이 나서서라도 이 일을 막아야 했다.
한빈이 이무명의 두 번째 은인이라면 정인지는 첫 번째 은인이기 때문이었다.
이무명은 판단이 서지 않았기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찔끔 감았다.
그때 정무룡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죄는 막중하다. 소가주로서 집안 관리를 소홀히 한 점. 형제라 하지만, 너무 마음을 놓고 믿은 점. 가장 큰 죄는 책임을 내려놓으려 하는 점이다.”
“아버님, 저는…….”
정인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무룡이 말을 이었다.
“짐을 내려놓으려거든 모든 것을 정리하거라.”
말을 마친 정무룡은 미간을 좁혔다.
동시에 검에 푸른 기운이 맴돈다.
당장이라도 정인지의 목을 베겠다는 신념이 담긴 행동이었다.
정인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버님.”
“돌려 놓기 힘들다 싶으면 오늘 네 목을 베겠다. 택하거라.”
“…….”
정인지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자신이 소가주 신분을 내려놓겠다고 밝힌 것은 그동안의 잘못을 갚을 길이 없어서였다.
정인지는 푸른 검기가 감도는 검을 쥐고 있는 정무룡을 바라봤다.
순간 정인지의 눈이 커졌다.
정무룡의 눈빛에는 아무런 감정도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책망하는 감정도 기대하는 감정도.
어떤 감정도 없이 정인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득도한 승려의 눈빛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정인지가 말했다.
“명 받들겠습니다.”
그 대답과 동시에 정무룡이 쥐고 있던 검날에 맺힌 검기가 사라졌다.
“오늘부터 네가 가주다.”
“네, 알겠습니다.”
“내가 팽 소협과 나눈 이야기는 네가 이어받거라. 한 치의 소홀함도 없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정인지가 깊게 포권하자 정무룡은 검을 겁집에 꼽았다.
착!
그 울림이 끝나기도 전에 정무룡은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홍칠개와 한빈이 있었다.
“감사합니다. 무제자 선배, 팽 소협. 저는 이만 물러날까 합니다. 다른 얘기는 새로운 가주가 처리해 줄 것입니다.”
정무룡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정인지를 가리켰다.
그 모습에 한빈이 조용히 포권했다.
홍칠개는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은 듯 쓴웃음을 삼켰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인이 뒤로 물러나는 순간이었다.
정무룡이 누구던가?
그는 전대까지는 이름이 없던 하남정가를 강남 오대세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거기에 더해 하남정가라고 하면 쾌검이 떠오를 만큼 그 위세를 강호에 새겼던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거물의 은퇴치고는 너무 조촐했다.
하지만, 정무룡은 만족하는 눈빛이다.
두 명의 은인이 증인이 되어 준 자리였기 때문이다.
한빈은 천천히 뒤돌아선 정무룡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진정으로 단죄하려는 자는 정인지가 아닌 정무룡 자신이었다는 것을 이곳에 있는 모든 자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살아서 은퇴한다는 것은 전생과는 조금 다른 강호의 역사였다.
물론 이것이 한빈에게는 호재였다.
하남정가가 건재하는 한 가주 정무룡과 맺은 계약서도 힘을 발휘할 테니 말이다.
* * *
한빈 일행이 떠나고 새로운 가주가 된 정인지는 가주의 신물을 넘겨받았다.
가주 패와 정무룡이 쓰던 검이 전부인 줄 알았으나 하나가 더 있었다.
가주 정무룡이 가주가 지켜야 할 것이라며 서찰 하나를 넘겨준 것이다.
정인지는 떨리는 손으로 그 서찰을 집었다.
“이것은 비급…….”
정인지는 누가 볼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찰에 집중했다.
가주의 신물과 함께 넘겨준 서찰이 평범한 내용을 담고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정인지가 판단컨대 이것은 비급이 맞았다.
하남정가의 전력을 단번에 상승시켜 줄 비급이 이 서찰에 담겨 있다면?
정인지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 비급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의문도 잠시 정인지는 서찰을 뜯었다.
툭!
서찰이 열리고 드디어 비급이라고 예상되는 내용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찰의 첫 줄을 읽은 정인지는 황당함에 두 눈을 크게 떴다.
-하남정가와 팽한빈은 ……
이것은 정무룡과 한빈이 맺었던 계약서였다.
계약서의 존재에 대해서는 정인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황당하기만 했다.
이건 한마디로 불공평한 계약이었다.
서로 주고받는 것이 불공평하다는 것이 아니었다.
주고받는 건 공평했지만, 위약금이 문제였다.
정인지는 피식 웃었다.
한빈이 가문의 은인이긴 해도 현 가주로서 간과 쓸개를 모두 빼서 바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정인지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계약이라는 것은 당대에 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가주가 바뀌었으니 이제 그에 걸맞은 새로운 계약을 해야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 …… 대를 이어 효력을 발휘한다.
정인지는 이 대목에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속에서 아버지 정무룡을 향한 원망이 치밀어 오르려는 순간이었다.
덜컹!
가주전의 문이 열렸다.
그러고는 무사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새로운 가주 정인지의 앞에 선 무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침입자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침입자라고? 대체 어느 곳이냐?”
“빈객들이 쓰는 연공실입니다.”
“일단 확인해야겠으니 앞장서거라.”
정인지가 서찰을 옆에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