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빈손은 섭섭하지 (2)
횃불을 비추자 널찍한 공간이 드러났다.
한빈은 횃불을 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에 있는 방 안에는 아무런 흔적이 없었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연공실에 숨겨진 비밀 방이 이상하긴 했지만, 보통의 방과 특별히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빈은 입구 쪽에 횃불을 꽂아 놓고 조용히 눈을 감은 후 표면을 만져 봤다.
뭐지?
한빈이 미간을 좁혔다. 벽면을 직접 만져 보자 방을 이상하게 느꼈던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한빈이 만져 본 벽면은 너무도 매끈했다.
이리 말하면 밖에 있는 이무명과 설화는 매끈한 것이 뭔 대수냐고 하겠지만,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벽면에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돌로 된 안쪽을 깎아 방을 만들었다고 해도 정으로 돌을 친 흔적이 보여야 했다.
하지만, 이 방은 한 번에 잘려 나간 것처럼 매끈했다.
한빈은 모든 가능성을 머릿속에 떠올려 봤다. 전생의 경험에 의하면…….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가능성은 딱 한 가지였다.
이 비밀 공간 자체가 하나의 초식으로 만들어졌다는 가능성 말이다.
한빈은 눈을 뜨고 공간을 다시 살폈다.
“이 정도의 공간을 만들려면?”
한빈은 계산을 해 봤다.
화경, 그것도 삼 경 이상의 고수가 모든 공력을 다 쏟아부어야 했을 것이었다.
그는 왜 모든 공력을 다 쏟아 이 흔적을 남겼을까?
한빈은 씩 웃었다.
그것은 이 흔적을 알아보고 이 안배를 받을 자를 찾기 위해서가 아닐까?
물론 이 안배를 받을 자는 자신밖에는 없을 것이었다.
한빈은 비밀 공간 가운데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이런 흔적을 남긴 자가 아무 단서도 없이 무 자르듯 공간만 남겨 놓고 사라질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가부좌를 틀고 기감을 높이자 주변에 맴도는 날카로운 검기가 느껴졌다.
“이건 대체…….”
한빈은 다시 눈을 떴다.
아무리 봐도 주변에는 초식으로 만들어 냈다고 예상되는 벽밖에 없었다.
한빈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미약하지만, 다시 몸을 찌르는 기가 느껴진다.
한빈은 한 가지 가정을 해야 했다.
초식으로 만든 공간 안에 기를 가두었다면?
아마도 이 초식을 만들어 낸 기운이 아직도 방 안에 맴돌고 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초식을 재현한 공간이 분명했다!
오묘하지만, 그렇다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약한 검기에서 어떤 초식을 찾을 수 있을까?
그건 일반인이라면 불가능했다.
하지만 한빈에게는 이전에 얻은 묘한 인급 초식이 있었다.
그것은 살신성인이란 초식이었다.
상대방의 공격을 흡수해서 구결을 얻을 수 있다는 초식.
이것을 지금 사용하지 않는다면 언제 사용하겠는가?
입가에 미소를 피운 한빈은 용린겁법의 초식을 떠올렸다.
‘살신성인.’
초식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용린의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음.”
살신성인을 사용하자 공간에 남아 있던 검기가 살을 베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실전에서 사용을 하다 보니 살신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고통이 죽을 만큼 느껴지다니!
하지만, 이 정도의 고통은 약자로 살아가며 받아야 할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강자는 약자를 짓밟는 것이 강호의 법칙.
그것은 정, 사, 마가 모두 동일했다.
자신과 자신의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힘이 필요했다.
한빈은 기감을 더욱 끌어올려 살갗에 파고드는 검기를 느끼려 애썼다.
순간 시야에 나타나는 초식.
[용린검법의 흔적을 정확히 찾았습니다. 융합편의 구결 진(眞)을 획득합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초식 하나가 만들어졌다.
[진룡파혼검(眞龍破魂劍) 심력을 사용하여 상대방의 영혼까지 날려 버리는 용린검법 상승의 초식입니다. 다만 심력이 부족할 경우 파혼검의 형태로 사용이 가능합니다. 진룡파혼검 시전 시 필요 심력 열 개가 필요합니다. 단, 파혼검 시전 시 필요한 공력은 삼 년.]
이제 융합편에는 초식이 하나 더 늘어났다.
[구걸십팔보]
[진룡파혼검]
초식을 확인한 한빈은 눈을 떴다.
그러고는 진룡파혼검을 시전하기 필요한 조건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필요 조건은 심력이라는 것을 소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깨달음으로 알게 된 심력은 사람의 마음에 가까웠다.
좋아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 두려워하는 마음 같은 인간의 본성.
그런데, 아무리 봐도 기본편에는 심력이란 속성은 없었다.
그렇다면?
한빈이 어깨를 으쓱했다.
용린검법이란 신공은 한빈에게 또 하나의 숙제를 준 것이었다.
한빈은 조용히 월아를 뽑았다.
진룡파혼검은 사용 못 해도, 파혼검은 내공으로 시전이 가능한 초식.
눈앞의 맛있는 음식을 보고만 있을 한빈이 아니었다.
스르릉.
월아의 검신에 일렁이는 횃불이 반사되자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하지만, 한빈은 이것에 신경 쓰지 않고 파혼검을 펼쳤다.
파바팍!
팡! 슝!
초식이 공간에 용의 모습을 그리는 듯했다.
단 일 초의 검으로 한빈은 좌우 아래위의 모든 공간을 장악했다.
우르릉-쾅!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초식을 펼친 한빈은 자신이 만들어 낸 흔적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초식으로 만든 비밀 공간 안에 한빈이 만들어 낸 흔적들이 빼곡했다.
그것은 파혼검의 검로.
그때였다.
연공실의 입구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팡!
그 소리에 한빈은 비밀 공간에서 나와 연공실 입구를 바라봤다.
입구를 바라본 한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허, 저런…….”
부서지는 것 같은 것이 아닌 진짜 문이 부서진 것이었다.
동시에 입구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물론 두 개의 그림자는 설화와 이무명이었다.
파파박!
거친 발소리를 낸 그들은 한빈의 앞에서 멈췄다.
설화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공자님, 대체 무슨 일이에요? 연공실 무너지는 소리가…….”
설화는 말끝을 흐렸다.
한빈의 뒤쪽에 뻥 뚫린 벽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설화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저, 저거. 공자님이 저렇게 만들어 놓은 거예요?”
“그렇긴 한데, 왜 그렇게 놀라?”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설화는 눈을 크게 뜨며 말을 이었다.
“어, 또 사고 치신 거잖아요. 저거 물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에이, 저런 자질구레한 거 가지고 뭐라 하겠어?”
“그래도요…….”
설화가 한빈이 만들어 놓은 아수라장을 보고 걱정하는 사이 이무명이 끼어들었다.
“사부, 괜찮습니까?”
“그래, 괜찮아.”
한빈이 씩 웃었다.
사부라는 말을 듣는 것이 처음에는 편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리 이상하지는 않았다. 전생의 나이까지 치면 사부란 말을 듣는 게 이치에 맞는 것도 같았다.
한빈의 등 뒤에 공간을 본 이무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부, 저, 저건 만년암석 아닙니까?”
“만년암석이라고?”
한빈이 뒤를 돌아봤다.
만년암석이 맞았다.
돌 중에서도 가장 뿌리가 되는 암석을 칭하는 말.
만년암석은 커다란 돌산의 아래에서 캐내는 광석이었다.
돌로 된 산의 무게를 만년 동안 지탱하고 있는 뿌리는 얼마나 강할까?
그 돌이 바로 만년암석이었다.
문제는 그 가격이었다.
가장 비싼 쇠를 찾으라 하면 누구나 만년한철을 떠올리고 가장 비싼 돌을 말해 보라 한다면 만년암석을 가리키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저런 흔적을 남겨 놨다라?
일단 저 비밀 공간을 훼손한 것은 사실이었다.
한빈이 씩 웃으며 이무명에게 말했다.
“덮어!”
“네?”
“대충 덮어 놓으라고.”
“아, 알겠습니다.”
이무명은 가볍게 포권하며 뚫린 벽과 그 안의 흔적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한빈은 조용히 연공실을 빠져나갔다.
한빈이 밖에서 쉬는 동안 이무명은 돌을 가져와 벽을 쌓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설화가 나뭇가지 한 다발을 가져와서 뚫린 벽 앞에 내려놓았다.
설화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된 이무명이 물었다.
“설화야, 이게 다 무엇이냐?”
“아까 공자님이 대충 덮으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꼼꼼하게 덮지 말고 대충 나뭇가지로 덮어요.”
“그래도 될까?”
“공자님은 신경도 안 쓸걸요. 괜히 힘 낭비하지 말고요.”
“흠, 고맙다. 설화야.”
말을 마친 이무명은 설화가 주워 온 나뭇가지로 벽을 대충 덮기 시작했다.
설화 덕분에 이무명은 차 한 잔 마실 만큼의 시간이 흐르자 벽을 덮는 작업을 거의 끝낼 수 있었다.
* * *
한편 밖에 있던 한빈은 갑자기 눈앞에 뜬 글귀에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살신성인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초식이 변화합니다.]
이 글귀가 뜬 것은 파혼검을 설화와 이무명에게 가르쳐 주기로 결심한 직후였다.
진룡파혼검은 자신만이 시전할 수 있지만, 파혼검의 깨달음은 다른 이에게 전수할 수 있었다.
한빈이 보기에 설화와 이무명, 둘 다 충분한 자격이 있었다.
설화는 전생에도 현생에도 자신을 돕기 위해 옆에 있는 사람이었다. 물론 자의든 타의든 말이다.
이무명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대역을 맡은 이였다.
둘 다 한빈을 위해서 목숨을 건 사람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아마도 자신만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후세를 위해 용린검법의 흔적을 타인에게 전달하려는 행동이 초식의 변화를 만든 것 같았다.
한빈이 글자를 뚫어져라 보고 있자 획이 흩어지더니 다시 새로운 글귀를 만들어 냈다.
[살신성인 – 용린검법으로 이어진 자의 마음을 얻게 되면 필요한 구결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라?
한빈은 살신성인이라는 글자에서 고개를 돌렸다.
필요한 구결을 습득할 수 있다는 문구는 설화와 이무명을 가르쳐 보면 해결될 것 같았다.
한빈이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작업을 마친 설화와 이무명이 나왔다.
한빈의 옆으로 온 이무명이 깊숙이 포권했다.
“사부, 지시하신 작업은 다 마쳤습니다.”
그의 말에 한빈이 힐끔 입구를 바라보며 답했다.
“저건 어떻게 하려고?”
한빈이 가리킨 곳에는 널브러져 있는 문짝 두 쪽이 있었다.
그 문짝을 본 이무명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 문짝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설화가 저렇게 만든 것입니다.”
이무명이 어깨를 활짝 펴며 힐끔 설화를 바라봤다.
설화가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나빠요, 아저씨! 그건 고자질이에요!”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잖느냐?”
“사 주기로 한 당과 열 배예요.”
둘이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한빈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떨어져 나간 문을 대충 세웠다.
탁! 탁!
문 두 개를 대충 세운 한빈이 말했다.
“됐으니 가자.”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뭐, 아무도 안 오는 곳인데, 하남정가에서 여기까지 확인하겠어? 그러니 그냥 대충 세워 놓고 가자고. 뭐 저걸 책임질 놈은 문을 쓰러뜨리는 재수 없는 놈이겠지.”
“헉!”
이무명이 탄성을 터뜨리며 원망 어린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왜 설화와 자신을 차별 대우를 하냐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한빈의 다음 말에 그 눈빛은 바로 바뀌었다.
“무명과 설화에게 전수할 무공이 있다!”
* * *
하남정가의 빈객들이 사용하는 구석진 연무장.
이전 연공실과 마찬가지로 주요 전각에서는 한참 떨어진 연무장이지만, 주변이 연못으로 둘러싸인 덕분인지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둘 법한 선기가 풍겨 나는 곳이었다.
한빈은 연무장에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너희에게 전수할 초식은 파혼검이야. 여기서 파혼은 사람의 육체뿐 아니라 혼도 날린다는 말이야. 그만큼 강력한 초식이지. 물론 이 초식을 깨닫냐 못 깨닫냐는 오로지 너희들의 노력에 달려 있으니 명심해.”
“…….”
이무명은 말없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설화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왜 저도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저는 제자도 아니지 않나요?”
설화가 눈을 빛내며 묻자 한빈은 잠시 그 답을 고민하는 듯 하늘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