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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26화 (126/621)

126화. 빈손은 섭섭하지 (1)

마지막 장소는 어찌 보면 가장 허름한 연공실이었다.

한빈은 이무명과 설화를 대동한 채 가주 정무룡이 알려 준 연공실로 항하고 있었다.

그곳으로 향하는 한빈은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여기에 과연 전설의 검로가 남겨져 있을까?

그 검로는 용린검법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한빈은 하남정가로 자신을 이끈 운명과 용린검법이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다못해 홍칠개에게 구걸십팔보를 전수받고 그 초식이 용린검법의 융합편에 자리를 차지한 것도 운명에 가깝다 생각했다.

물론 그 운명은 자신이 개척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한빈이 전설의 검로에 목을 매는 것은 아니었다.

뭐, 흔적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었다.

최소한 전생의 잘못된 정보를 두 눈으로 확인은 한 것이니까.

한빈이 연공실을 향해 걸어가며 미소를 피워 내자 옆에서 지켜보던 설화가 소매를 잡아끌었다.

“공자님, 혹시…….”

말끝을 흐리는 설화의 모습에 한빈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설화야, 할 말 있으면 편히 해.”

“혹시 요즘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무슨 일? 급한 불은 다 껐잖아.”

“요즘 들어 역마살이 끼신 것 같아서요.”

말을 마친 설화는 멀뚱히 한빈을 바라봤다.

“역마살이라고?”

“네, 그렇지 않고서야, 연공실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시며 운기하실 리가 없잖아요. 평소에 좌선 한번 하시는 거 본 적이 없는데…….”

“아.”

한빈은 탄성을 흘리며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생각해 보니 좌선하고는 담을 쌓은 한빈이었다.

가끔 운기를 해도 민간의 운기 토납법 정도였다.

계획이 있어 상승 심법을 알아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이런 모습을 보이니 설화도 이상했을 것이다.

그 탄성의 끝에 한빈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다른 연공실 밑에는 수맥이 흐르는 것 같아서 말이야. 이번 연공실은 좀 괜찮았으면 좋겠는데…….”

한빈이 연공실 입구를 보며 씩 웃자 설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맥이라면 인정이네요, 공자님.”

옆에 있던 이무명도 진지한 표정으로 거들었다.

“네, 수맥이 흐른다면 아무래도 운기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사부.”

“흠, 그건 그렇지.”

한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바람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파파박.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홍칠개였다.

홍칠개는 한빈이 서 있는 한 걸음 앞에서 흙먼지를 휘날리며 멈췄다.

팍!

그 모습에 한빈이 손을 내저으며 흙먼지를 걷어 냈다.

“사부님, 왜 소란스럽게 뛰어오십니까?”

“허허, 제자야. 내가 이렇게라도 안 하면 네가 언제 나를 봐 주더냐?”

“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세요? 제가 언제 사부님을 소홀하게 했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어허, 네가 죄를 모르렸다?”

홍칠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한빈은 모른 척 고개를 갸웃하며 답했다.

“말씀을 해 주셔야 제가 알죠, 사부님.”

“그래, 네가 그렇게 얘기하니 속 시원하게 털어놓으마.”

“네. 말씀하시죠, 사부님.”

한빈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자 홍칠개가 어깨를 쫙 펴며 말을 이었다.

“내 상의도 없이 제자를 받는 게 타당하더냐? 제자야!”

말을 마친 홍칠개를 근엄한 표정으로 이무명을 바라봤다.

한빈은 헛웃음을 겨우 참으며 답했다.

“저와 무명은 계약관계 아닙니까? 그런데 그걸 왜 사부께 허락을 맡습니까?”

“허허, 그럼 너와 나는 계약관계가 아니더냐?”

“계약관계 맞죠. 그것도 깔끔한 계약관계죠.”

“그러니 말이다. 그러니 나와 무명이는 계약으로 이루어진 사손 관계가 되는 것이 아니냐?”

홍칠개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물었다.

“지금 뭘 내놓으라는 건가요? 사부님.”

“사손 내놓으라고.”

홍칠개의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이무명에게 돌렸다.

잠시 침묵이 맴돌자 이무명은 눈을 어디에 둘지를 몰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 모습에 한빈이 나섰다.

“아, 사부님! 자꾸 왜 그러세요?”

홍칠개는 손바닥을 보이며 한빈의 말을 막았다.

“제자야, 너는 잠시 쉬고 있거라. 나는 사손하고 얘기 좀 해야겠다.”

말을 마친 홍칠개가 빙긋 웃으며 이무명을 잡아끌고 옆으로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섰다.

한빈은 그 모습에 기가 찼다.

몇 발짝 떨어져도 다 들릴 텐데 저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것은 한빈의 잘못된 생각이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은 홍칠개는 기막으로 소리를 막았다.

기막을 친 후 홍칠개는 이무명에게 입을 열었다.

한빈은 기막 가까이에 다가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홍칠개가 펼쳐 놓은 기막은 그들의 대화를 완벽히 차단했다.

이 정도의 기막이라면 모든 내공을 불어넣어야 했다.

아마도 내공이 남아도는 모양이라 생각하며 한빈은 한숨을 쉬었다.

홍칠개는 한빈이 엿들으려 노력하는 모습을 바라보더니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제자를 향한 도발.

한빈은 씩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지켜봤다.

홍칠개는 한빈이 어떻게 이 대화를 들을 수 있겠냐는 듯 어깨를 펴고 이무명을 뭐라 설득하는 중이었다.

한빈은 그 모습에 기가 막혔다.

잠시 후, 기막이 걷히고 이무명이 울상이 된 채 걸어왔다.

홍칠개는 팔짱을 끼고 당당히 그 뒤에 서 있다.

그 모습에 한빈이 홍칠개를 바라봤다.

“사부님, 왜 강요를 하십니까?”

“강요라니?”

홍칠개가 움찔 놀라는 표정이었다.

분명 기막을 펼쳐 놓았다. 한빈이 대화를 들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한빈은 자신과 이무명의 대화를 들은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홍칠개는 이게 한빈의 허풍이라 생각했다.

그러고는 이무명에게 눈짓을 하며 자신과의 대화를 입 밖에 내지 말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 모습에 한빈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왜 멀쩡한 사람한테 거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까? 사부님.”

말을 마친 한빈은 홍칠개를 노려봤다.

자신을 개방에 끌어들이지 못하자 이무명이라도 개방도로 만들려는 수작이었다.

한빈이 대화 내용을 알아맞히자 홍칠개가 눈을 크게 떴다.

“헉.”

홍칠개는 나지막이 탄성을 흘렸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한빈에게 물었다.

“제자야, 어떻게 내 기막을 뚫은 것이냐?”

“제가 왜 기막을 뚫어요? 그리고 설사 기막을 뚫고 대화를 엿들을 천리지청술이 있다고 한들 왜 제가 공력을 낭비하겠습니까?”

“그럼 혹시 점쟁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제가 무슨 점쟁이예요?”

“그럼 대체 어떻게 대화를 엿들었다는 말이냐?”

“입술 모양만 보면 알 수 있죠.”

“입술 모양이라고?”

“그것을 구순술이라고 합니다. 필요하시면 가르쳐 드릴까요?”

“오호라, 그럼 좋지.”

“물론 공짜로는 안 되고요.”

“흠.”

홍칠개가 헛기침을 하자 한빈이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청운사신에 대한 소문은 왜 그렇게 과장해서 퍼뜨리신 겁니까? 사부님.”

“왜, 불만이냐? 하긴,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하남정가에 왔다는 이야기는 덕분에 쏙 들어갔지.”

“불만은 없습니다. 저는 제가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청운사신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사방팔방 소문내고 다닐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뭐, 이유는 간단하다.”

“이유가 대체 뭡니까? 사부님.”

“내 제자의 위명을 높이기 위해서다.”

“제자라니요?”

“바로 너 말이다.”

“청운사신과 저는 전혀 다른 인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상관이 있지. 하북팽가의 사 공자 팽한빈은 그날 분명히 청운사신에게 주군이라 외쳤다. 그러니 청운사신의 위명을 높이는 일이야말로 네 위명을 높이는 일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 너는 내 제자가 아니더냐. 결론은 내 위명도 덩달아 높아진다는 말이지.”

물론 맞는 말이었다.

“…….”

한빈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이무명을 힐끔 바라봤다.

분명 이무명은 그날 자신의 복장과 모습을 하고 홍칠개의 말대로 한빈, 즉 청운사신을 향해 주군이라 외쳤었다.

졸지에 가상의 청운사신이란 인물과 자신 사이에 관계가 생긴 것이다.

한빈의 입가에 보기 좋게 미소가 그려졌다.

그 모습에 홍칠개는 당황했다.

따질 것처럼 덤벼들던 제자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했기 때문이다.

홍칠개가 황당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때 한빈이 말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구순술은 그냥 알려 드릴게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제자야.”

“그건 일급비밀입니다, 사부님.”

한빈은 휘파람까지 불며 가벼운 걸음으로 앞서 나갔다.

사사 삭.

앞서 나가는 한빈을 보는 홍칠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왠지 건들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든 느낌이었다.

홍칠개가 고개를 돌려 설화에게 물었다.

“설화야, 내가 혹시 잘못한 게 있느냐?”

“할아버지, 잘은 모르겠지만, 공자님의 표정을 보면 잘못한 게 맞는 것 같아요. 저런 표정을 지으면 꼭 사고가 나잖아요. 뭐, 할아버지가 벌이신 일이니 잘못되면 모두 할아버지 책임이죠. 에이, 저는 신경 안 쓸래요.”

설화는 할 말 다 했다는 듯 빠른 걸음으로 한빈의 뒤를 따랐다.

그때 이무명이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타초경사(打草驚蛇)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사조님.”

“타초경사라면, 뱀이 놀라서 달아나고 말아야 하는 게 아니더냐? 그런데 왜 내가 불안한 거지?”

“뱀도 뱀 나름이죠. 물려고 덤비는 뱀도 꽤 많습니다.”

말을 마친 이무명이 빠른 걸음으로 한빈의 뒤를 따르자 홍칠개가 낮게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니 이무명 저놈도 말발이 좀 늘었네. 허허.”

* * *

한빈은 한바탕 소란을 뒤로한 채 마지막 연공실 안으로 들어왔다.

한빈은 연공실 내부 횃불에 불을 붙였다.

어찌 보면 이곳은 버려진 연공실에 가까웠다.

주요 전각들로부터 많이 떨어진 외진 곳에 위치한 연공실이었다.

직계들이 쓰는 연공실이 아닌 외부에서 온 손님들을 위한 연공실로 보였다.

만일 이곳에 전설의 검로가 남겨져 있다면?

아마도 그것을 남긴 이는 하남정가의 시조가 아닌 외부인일 가능성이 있었다.

한빈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벽을 아이의 머리 쓰다듬듯 쓰다듬었다.

혹시 모를 검로의 흔적을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한빈이 벽을 쓸고 가는데 거칠거칠한 표면이 느껴졌다.

한빈은 눈을 뜨고 그곳을 바라봤다.

분명 돌로 보이는데 손으로 만졌을 때는 흙이었다.

“뭐지?”

고개를 갸웃한 한빈은 그곳을 두드렸다.

퉁. 퉁.

안쪽이 비어 있는 것처럼 소리가 난다.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전생에 마교가 연공실을 허물어 검로를 없앤 이유를 알았다.

마교는 소문만 들었지, 검로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다른 공간 안에 숨겨져 있으니 찾을 수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한빈은 허리에 찬 월아를 들었다.

‘일촉즉발’

한빈의 검, 월아가 검기를 머금고 빛처럼 벽을 향해 날아갔다.

팡!

월아가 벽에 박혔다.

순간 벽이 녹아내리듯 허물어졌다.

스르륵.

먼지가 걷히자 사람 하나 들어갈 공간이 나타났다.

전생에는 정, 사, 마 모두가 발견하지 못한 비밀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안쪽은 칠흑처럼 어두웠다.

한빈은 안쪽 벽을 만져 봤다.

순간 한빈의 시야에 글귀가 떴다.

[용린검법의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이 깨달음을 얻게 된다면 융합편에 초식이 추가됩니다.]

그 글귀에 한빈이 입꼬리를 올렸다.

한빈의 예상이 맞았다.

과연 어떤 초식일까?

한빈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안쪽에 횃불을 비춰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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