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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22화 (122/621)

122화. 뜻밖의 움직임 (2)

한빈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옛 성현의 말씀에 따르면 약속은 문서로 남기는 게 최고입니다, 어르신.”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소협?”

가주 정무룡의 눈이 다시 한번 커지는 순간이었다.

정무룡의 놀란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의 붓은 거침없이 한지 위를 누볐다.

한지 위에 내용이 하나둘 늘어나자 정무룡의 눈이 커졌다.

한 획 한 획이 마치 무공의 초식처럼 날카로웠기 때문이다.

서체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내용이 그렇다는 말이었다.

한빈이 그리는 한 획 한 획에는 적의 목줄을 끊어 놓겠다는 일념이 담겨 있었다.

물론 한빈의 칼끝, 아니 붓끝이 향하는 곳이 하남정가가 아니라는 것은 정무룡도 알고 있었다.

한빈은 하북팽가에 남아 있는 적들의 날개를 꺾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아예 씨를 말리려는 것이다.

한빈의 붓놀림에 정무룡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붓을 멈춘 한빈이 고개를 들었다.

잠시 오가는 시선.

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서명하시지요, 어르신.”

한빈이 붓을 내밀자 정무룡이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붓을 받아 든 정무룡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휘리릭!

그는 바로 서명을 하며 사람 좋은 얼굴로 한빈을 바라봤다.

“이제 됐는가? 소협.”

“네, 완벽합니다. 어르신.”

그때였다.

시녀 하나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녀는 가주 정무룡의 곁에 다가가 뭐라 속삭였다.

가주 정무룡의 눈이 커졌다.

“선배가 대체 왜?”

뜻 모를 말을 내뱉은 가주 정무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협, 잠시만 기다리시게,”

“네, 알겠습니다. 어르신.”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무룡은 다급하게 가주전을 빠져나갔다.

그것도 잠시, 가주전 밖에서는 소란이 일어났다.

“자네! 왜 나를 막아…….”

“아니 선배! 지금 들어가시면…….”

웅성대는 소리.

가주전 안으로 들어오려는 자와 그것을 막으려는 정무룡 간의 언쟁이 있나 싶더니 문이 열렸다.

덜컹.

문이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어떤 거지였다.

정확히 말하면 한빈의 계약 사부인 무제자 홍칠개였다.

광개가 휘적휘적 한빈이 앉은 탁자로 걸어오자 정무룡이 난색을 표하며 외쳤다.

“선배, 그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제 손님이…….”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나? 정무룡.”

정무룡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무제자 선배. 거기 계신 분은 선배의 제자가 아니래도요.”

“허, 넌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소문 듣고 궁금해서 오신 거 다 압니다. 제자는 무슨 제자입니까? 농이 지나치십니다.”

“허허, 아니래도…….”

그들은 아옹다옹하며 한빈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정무룡이 미안한 얼굴로 한빈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소협, 미안하네. 내가 말릴 수 있는 선배가 아니라서 말이네. 그러니까…….”

정무룡은 미안한 듯 한빈과 광개를 번갈아 봤다.

그때 한빈이 일어났다.

“사부님, 오셨습니까?”

“허허, 너무한 거 아니냐? 제자야? 일을 시켜 놓고 잔칫상에는 부르지도 않고 말이다.”

“그러니까 그 잔칫상에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몰라서요.”

“흠,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런데 이 늙은 가주 놈한테 대신 설명 좀 해 봐, 제자야.”

“무슨 설명 말씀입니까?”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홍칠개가 자신과 한빈을 번갈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너하고 내 관계 말이다. 허허.”

함박웃음을 지으며 한빈을 바라보는 홍칠개의 모습에 한빈은 마주 웃었다.

“하하, 사부님.”

호칭 하나로 모든 상황이 정리되자 정무룡의 눈이 한없이 커졌다.

“무제자 선배가 한 말이 사실인가? 소협.”

“네, 사실입니다.”

한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북팽가의 직계가 개방도라는 말인가?”

다시 질문을 던진 정무룡의 눈이 한없이 커졌다.

아무리 계산을 해 봐도 정답이 없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때 무제자 홍칠개가 재빨리 나섰다.

“어허, 왜 그리 남의 사제 관계에 그렇게 관심이 많아, 늙은이. 내 제자지만, 개방도는 아니야. 거기까지만 알고 있어.”

“무제자 선배, 관계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러니…….”

말끝을 흐린 홍칠개는 주변을 쓱 훑어보더니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놨다.

탁!

탁자 위에 올려진 것은 다름 아닌 죽은 비둘기.

정무룡의 눈이 다시 커졌다.

“이게 뭡니까?”

“전서구라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지 않나?”

“이상한 점이라…….”

정무룡이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대신 답했다.

“없군요.”

“그래, 없어. 즉 눈속임이라는 거지.”

둘의 대화를 듣던 정무룡이 급히 끼어들었다.

“뭐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허허, 아직 병마에서 회복하지 못했군. 잘 보게, 비둘기 다리를 말이야. 이건 비둘기가 떨어지고 바로 품에 넣어 온 것이라네. 즉 떨어질 때 그대로라는 것이지.”

“그러고 보니…….”

정무룡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에는 매달려 있어야 할 전서 통이 없었던 것이다.

정무룡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전서 통이 없군요. 이 비둘기는 어디에서 잡아 온 것입니까?”

“하남정가에서 뿌려진 비둘기일세.”

“그럼 혹시?”

“그 혹시가 맞아. 나는 제자의 부탁으로 하남정가 담장 밖에서 개방의 천라지망인 타구천지를 펼쳤어.”

타구천지란 개방에서 쓰는 포위 전술로, 개 한 마리 빠져나갈 틈 없이 천지를 뒤덮는 진법을 말한다.

“허, 그렇다면 밖에는…….”

“그렇지, 개방도들이 쫙 깔려 있는 상황이네.”

“허, 그런 일이…….”

“뭐, 하남정가에 폐 끼칠 일은 없어. 알아서 끼니를 때우고 있을 테니. 그래도 내일은 우리 애들 좀 챙겨 주라고.”

“네, 알겠습니다. 선배, 그런데 아까 말한 눈속임이라는 의미가 무얼 말씀하시는 겁니까?”

“누군가 하남정가에서 일어난 일을 외부에 전달했다는 거지. 비둘기가 날아간 개수를 보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하고 다른 곳에서 전서구를 날렸다는 말일세.”

“그렇다면?”

“하북팽가에 있는 자네 딸이나 다른 세력에게 진짜 전서구가 날아갔겠지.”

“흠.”

정무룡의 눈빛이 깊어졌다.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그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자식들.

그중 하나의 사지 근맥을 자르고 뇌옥에 가뒀다.

한빈이 제시한 대로 출가외인인 딸의 재산을 몰수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칼을 휘둘러야 한다?

병마에서 아직 회복되지 않은 정무룡으로서는 약간 버거운 상황이었다.

그의 표정을 본 한빈이 말했다.

“하북팽가에 있는 공모자는 이제 용서해도 될 것 같습니다, 어르신.”

“용서한다고?”

정무룡의 눈이 커졌다.

순간 홍칠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끼어들었다.

“제자야, 그게 무슨 말이냐?”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제자인 한빈치고는 너무 너그러웠다.

홍칠개가 생각하기에 한빈은 상대를 한번 물면 절대 놓지 않는 사냥개였다.

그런데 용서라니?

의심 어린 홍칠개의 눈빛에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아마 다시 일어설 힘은 없을 겁니다. 이제는 끝났겠지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무룡은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자신의 딸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위기에 쓸 자금은 따로 마련해 뒀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단죄를 못 한 아쉬움과 손자들에게 살길이 생겼다는 묘한 안도감이 뒤섞였다.

정무룡은 정화의 비자금을 한빈에게 말할까 하다가 조용히 입을 닫았다.

이제 하남정가가 나설 일이 아니라 하북팽가가 나서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하지만, 이미 한빈이 모든 것을 조치해 뒀음은 정무룡도 몰랐다.

아직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 정무룡에게 한빈이 말했다.

“제가 전한 청명환이 가짜라면 진짜 곤륜의 청명환은 정화 부인이 가지고 있을 겁니다.”

한빈은 이제 진짜 청명환의 행방까지 정화 부인에게 뒤집어씌웠다.

한마디로 완전범죄.

한빈이 사람 좋은 얼굴을 하자 정무룡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후……. 미안하네, 소협. 딸아이를 잘못 키운 내 죄가 크네.”

한빈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이제 저희 하북팽가에서 알아서 할 일이지요.”

말을 마친 한빈은 조용히 품속에 있는 목걸이를 매만졌다.

역시 몰래 먹는 영단이 제일 맛있다는 옛 성현의 말은 틀린 점이 없었다.

상념을 털어 낸 한빈이 가주 정무룡을 바라봤다.

“가주님, 어떤 방해도 받지 않을 공간이 필요합니다.”

“내 연공실이면 되겠는가?”

“네, 가주님의 연공실이면 더할 나위 없죠. 감사합니다, 어르신.”

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했다.

사실 하남정가 가주의 연공실에서 확인해야 할 것이 하나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부탁하려고 얘기를 꺼냈는데 알아서 챙겨 준 것이다.

잠시 후 한빈과 설화 그리고 장자명은 하인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떠났다.

한빈이 자리를 떠나자 홍칠개와 마주한 정무룡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선배, 이렇게 왕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무룡이 말끝을 흐리자 홍칠개가 물었다.

“왜 그러는가? 몰래 숨겨 놓은 좋은 술이라도 있던가?”

“술 이야기가 아닙니다, 선배.”

“그럼 뭔가?”

“저는 팽 소협의 정체가 진심으로 궁금합니다.”

“내 제자라니까.”

“그 말이 아닙니다. 소협의 검은 하남정가의 쾌검보다 빨랐으며 보법은 구름을 밟고 지나가는 듯 부드러웠습니다. 팽가에 이런 검법과 보법이 있던가요?”

정무룡의 눈빛이 지금만큼은 살아났다.

근심은 모두 털어 버리고 그의 눈에는 한빈이 보여 줬던 무위에 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모습에 씩 웃은 홍칠개가 답했다.

“보법은 구걸십팔보라네,”

“구걸십팔보요? 그건 개방의 상승 무공이 아닙니까? 개방의 제자가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구걸십팔보가 어려워서 못 배우는 거지, 개방의 정식 제자만 배울 수 있는 무공은 아니지 않나?”

“…….”

정무룡은 아무 말 없이 홍칠개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홍칠개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러나?”

“구걸십팔보가 구름 위를 걷는 그런 보법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청운사신이라는 별호가 하남정가를 들썩이게 하고 있겠습니까?”

“청운사신이라고?”

가늘게 뜬 홍칠개의 눈에서는 기대감이 흘러나왔다.

그 시선에 정무룡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 * *

하남의 대표적인 사파인 백사문의 가주전.

가주전은 귀빈의 방문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가주 진사명이 상대에게 포권했다.

“군사, 어서 오십시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대는 가볍게 포권했다.

얼굴은 삼십 대 중반처럼 보이지만 희끗희끗한 머리가 그의 연륜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붓 모양으로 생긴 병기인 판관필을 들고 있는 그의 별호는 익절선생.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모든 일을 칼같이 끊는 냉혈한이라고 해서 붙여진 별호였다.

정파에서는 익절선생 마휘라고 하면 다들 꺼리는 인물이었다.

무위도 무위지만 지략에서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와 거래를 해 본 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응한 거래라도 결과를 놓고 보면 익절선생 마휘의 손바닥 안이었다고 말이다.

그런 익절선생 마휘가 왜 이곳을 찾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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