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뜻밖의 움직임 (1)
같은 시각 하남정가 가주전.
어느 정도 뒤처리가 끝나자 가주 정무룡은 한빈과 마주하고 있었다.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로 자신의 가슴팍에 든 내용물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남정가로 출발하면서 몸에서 떼지 않았던 목걸이였다.
목걸이를 확인하는 한빈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해맑았다.
어찌 보면 득도한 고승처럼 허허롭게도 보였다.
그에 반해 정무룡은 무슨 얘기를 꺼내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었다.
정무룡은 잠시 한빈을 바라봤다.
가주 정무룡은 사람과 마주하면 눈을 들여다보곤 한다.
눈을 들여다보면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아무 욕심도 없는 저 눈빛은 깊이를 측정하기가 힘들었다.
차만 연신 들이켜던 가주 정무룡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협, 가문을 구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려야겠군요.”
한빈이 재빨리 손을 저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대협이라는 칭호는 가당치 않습니다. 하남의 절대자인 가주님께서 그리 부르시는 것은 저도 부담됩니다.”
“하남정가를 구한 분에게 대협이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붙이겠습니까?”
이것은 정무룡의 진심.
하지만, 한빈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저는 하남정가를 구한 게 아니라 정파 전체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뿐입니다. 그러니 대협이란 칭호는 거둬 주시지요. 거기에 인척 관계로 치면 사손뻘 되지 않습니까?”
한빈은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한빈의 말 중 반은 진심이었다.
하남정가를 구하기 위해 나선 것은 아니었다.
이번 계획의 목적은 정화 부인과의 악연을 끊고 용린검법의 구결을 완성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인척 관계로 사손뻘이라는 말은 진심이었다.
팽강위가 정무룡의 사위이니 한빈에게는 외조부와도 같은 사람이었다.
한빈의 말에 가주 정무룡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침음을 뱉었다.
“음…….”
마치 무당이나 화산의 도인처럼 정무룡의 눈빛에는 아무런 욕심도 담지 않고 있다.
수염을 쓰다듬던 그의 손이 멈췄다.
“정화가 출가외인이라고는 하지만, 핏줄이 주는 한 줌의 정은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조금의 관계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끝을 흐리자 정무룡의 눈빛이 바뀌었다.
“정화는 이제 제 딸이 아닙니다.”
“어려운 결심을 하셨군요.”
한빈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예의상 하는 행동이었다.
앓던 이 하나가 빠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낼 한빈이 아니었다.
이제는 못을 박을 때라는 듯 침통한 표정을 날이 선 표정으로 바꾸었다.
그 표정에 정무룡이 물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가주님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궁금하다니요?”
“따님, 아니 정화 부인이 보낸 한철 궤에는 곤륜의 진짜 청명환이 들어 있었을까요?”
“흠,”
정무룡은 살짝 침음을 토해 냈다.
“이건 직접 확인해 보셔야 하겠군요. 정휘지에게 전달한 것은 정화 부인이 준 한철 궤가 아닙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옆에 있는 장자명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장자명은 자신의 짐 속에서 뭔가를 꺼내 한빈에게 건넸다.
그 물건을 본 정무룡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한철 궤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한빈은 한철 궤를 맞은편 정무룡에게 쓱 밀며 말을 이었다.
“봉인된 인장을 확인해 보시죠.”
“네, 알겠습니다.”
정무룡이 한철 궤를 들어 봉인을 확인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한빈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게 정화 부인이 제게 건넨 한철 궤입니다. 봉인을 보시면 가주님께서는 진위(眞僞)를 확인하실 수 있을 테지요.”
“이건 하남정가에서부터 쓰던 정화의 인장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지난번에 복용했던······.”
정무룡이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그것은 가짜입니다. 영단까지는 아니어도 보약은 되겠지요.”
“그럼, 그때 의식을 잃고 상태가 악화된 것처럼 하라고 한 게······.”
“그 후에 대처를 보기 위함입니다. 정휘지는 그 가짜 청명환이 독약인 것처럼 굴었죠?”
“······.”
“저는 아마도 정화 부인이 건넨 이 한철 궤에 독약이 들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을 확인하느냐 마느냐는 온전히 가주님의 마음입니다.”
“흠.”
가주 정무룡은 낮은 신음을 토해 내며 한철 궤과 한빈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전까지 평온했던 그의 눈빛에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스쳐 지나갔다.
한빈과 처음 마주친 것은 며칠 전 새벽이었다.
자신의 소변을 받기 위해 들어온 두 명의 하인을 봤을 때는 여느 때처럼 수치스러웠다.
하남의 절대자가 똥오줌도 못 가린다니?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지고 나서 정무룡은 쭉 이 상태였다.
어떨 때는 죽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가문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 일어나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곤 했다.
하인이 들어오기 전, 정무룡은 천지신명께 기도를 했다.
가문을 구해 준다면 자신의 생명을 바치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한빈과 장자명은 처소에 숨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무룡을 치료했다.
첫날에는 사지에 감각이 돌아왔고 둘째 날에는 진기를 사지에 보낼 수 있었다.
그들이 정무룡을 치료한 시간은 실질적으로 이틀.
정무룡은 한빈을 하늘이 보낸 신의라 생각했다.
하지만, 가주전에서의 한빈의 무위를 보고 마음을 바꿨다.
젊은 나이에 화경이라?
물론 이것은 한빈이 사용한 허장성세로 인한 착각이지만, 가주 정무룡은 그리 생각했다.
앞으로 십 년만 지나면 강호 위에 군림할 인재라 판단을 바꾸었다.
그런데 또다시 한빈에 대한 판단이 바뀌었다.
지금 보니 계책 또한 정의맹 군사에 못지않았다.
한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신의일까?
하늘이 내린 무재(武才)일까?
아니면 제갈량이 다시 태어나기라도 한 것일까?
수많은 물음 속에 정무룡은 한철 궤를 조용히 품안에 넣었다.
한빈의 말대로 그곳에 독이 들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자신만이 알고 싶었다.
침통한 정무룡을 바라본 한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것으로 하북팽가에서 하남정가로 보낸 호송 임무를 마쳤습니다.”
말을 마친 한빈이 조용히 포권했다.
정무룡을 치료하며 모든 일을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정무룡의 몸 상태가 심각하여 치료가 먼저였고.
하남정가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해결이 먼저였다.
이제 모든 것을 설명했으니 임무가 완벽히 끝난 것이었다.
한빈의 모습에 정무룡도 일어나 포권하며 말했다.
“예가 지나치십니다, 대협.”
“이제 대협이란 칭호는 거두시지요.”
“대협이란 칭호가 부담되시면 당분간은 소협이라 부르죠.”
“말씀도 낮춰 주시죠. 다음에 마주칠 때는 팽가의 막내 공자로서 인사드릴 텐데요.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허허, 그럼 그리하겠네.”
정무룡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한빈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대협이라 칭하는 것은 청운사신.
그런데 한빈은 자신이 청운사신이란 사실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았다.
정무룡은 이 점에 감탄했다.
공명심이 없는 무인이 어디 있으랴?
화경의 고수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라?
그저 헛웃음밖에 안 나왔다.
정휘지를 하남제일검으로 키우기 위해 얼마나 힘을 썼던가?
그리고 하남정가에서는 정휘지라는 고수가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자랑했던가?
그런데 하북팽가는 화경의 고수를 키워 내고도 비밀을 유지하고 있었다.
정무룡은 문득 하북팽가의 저력이 무서워졌다.
하지만, 은인인 한빈에 대한 비밀은 무덤 끝까지 가지고 갈 생각이었다.
긴 웃음의 끝에 정무룡이 말했다.
“그럼 하나만 묻고 싶네, 소협.”
“말씀하시지요, 어르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는가? 소협.”
그 질문에 한빈이 눈을 빛내며 말없이 정무룡을 바라봤다.
순간 실내는 갑자기 정적에 휩싸였다.
정무룡은 재촉하지 않고 한빈의 답을 기다렸다.
침묵이 어색해질 때쯤 한빈이 입을 열며 손가락 하나를 폈다.
“제가 원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진지한 한빈의 눈빛에 정무룡이 가주의 체면도 잊은 채 상체를 기울였다.
“그것이 무엇인가?”
“정화 부인의 재산을 모두 몰수한 뒤 제가 관리했으면 합니다.”
한빈은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허허로운 표정으로 가주 정무룡의 대답을 기다렸다.
정무룡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의 딸 정화는 하북팽가로 출가한 이후로도 몇 가지 이권을 관리하고 있었다.
한빈의 말은 그것을 달라는 것이었다.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냐고 물었지만, 이렇게 딱 짚어서 요구할 줄을 몰랐던 정무룡이었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지만, 이유는 알아야 했다.
물욕이나 공명심에는 한 톨의 욕심이 없는 한빈이라 생각하기에 더욱 궁금했다.
정무룡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는가? 단순한 욕심은 아닌 것 같아서 드리는 말이네, 소협. 답을 안 해도 되니 마음에 담아 두지는 말게.”
“정화 부인이 하북팽에서 저지른 만행을 모두 밝혀내고 싶어서입니다. 정화 부인이 행한 모든 일의 뒤에는 하남정가에서 가져간 이권이 있다고 봅니다.”
“음.”
가주 정무룡은 침음을 흘렸다.
한빈의 의도는 명확했다. 숙적의 날개까지 꺾어 놓겠다는 의도였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좋네. 내 조치해 놓도록 하겠네.”
정무룡의 뜻도 간단했다.
정무룡 역시 딸인 정화 부인뿐 아니라 핏줄인 팽무빈, 팽경빈과도 인연을 끊겠다는 것.
“네, 감사합니다.”
한빈이 작게 고개를 숙이자 정무룡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네. 내가 미리 조치했어야 할 일이네, 소협.”
정무룡의 말에 한빈은 뒤를 힐끔 돌아봤다.
옆에 있던 장자명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장자명은 한빈의 행동에 놀라면서도 지금처럼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었다.
한빈이 하남정가에서 한 일은 누가 봐도 대협이라 불릴 만했다.
하지만, 한빈이 앞으로 할 일이 문제였다.
고개 숙인 장자명의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모습에 가주 정무룡이 놀란 듯 고개를 갸웃했다.
한빈의 행동은 그만큼 갑작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장자명은 숙인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말이다.
정무룡의 기울어진 고개가 아직 자리를 찾지 않았을 때 문이 열렸다.
스르륵!
열린 문틈으로 누군가 가볍게 달려왔다.
다름 아닌 설화였다.
정무룡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공을 안 익힌 듯 하면서도 단검을 쓰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던 소녀였다.
앙증맞게 생긴 소녀의 손속에 놀라 차후 그녀의 정체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는데 때마침 들어온 것이었다.
설화는 가주 정무룡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 탁자 위에 보따리를 풀었다.
촤르륵.
보따리가 풀리자 가주 정무룡의 고개가 더욱 기울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무슨 상황인지 감이 안 잡혔기 때문이었다.
설화는 정무룡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한지를 펼쳐 놓았다.
그러고는 통나무 속에 담긴 먹물을 벼루에 덜며 말했다.
“공자님, 먹은 방금 방에서 갈아 왔어요.”
“그래. 고맙다, 설화야.”
둘의 대화에 정무룡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소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