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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120화 (120/621)
  • 120화. 사필귀정(事必歸正) (8)

    한빈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하남정가에서 자신과 관계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저들이 싹 다 죽는다고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한빈이었다.

    즉, 정휘지가 표적을 잘못 삼은 것이었다.

    “뭐라?”

    정휘지의 눈이 커졌다.

    그들의 대화에 원로와 각주 들은 표정이 수십 번 변했다.

    처음에는 놀랐다가, 다음에는 청운사신의 말에 실망했다.

    하지만, 청운사신의 말이 맞았다는 걸 그들은 다음 정휘지의 행동에서 알 수 있었다.

    정휘지는 각주에게 겨눴던 검을 거두고 다시 한빈에게 몸을 날렸다.

    순간 여기저기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긴장감이 풀리자 누군가 죽어 가는 소리로 속삭였다.

    “역시 청운사신이야. 무위뿐 아니라 혀도 맵네 매워. 이번에는 검이 아닌 혀로 우리를 구했어.”

    “휴, 그러게 말이야.”

    “우린 여기 있으면 방해나 되니 이제 물러나자고.”

    “그래, 지금 보니 정휘지가 제정신이 아니야.”

    “맞아. 하남정가를 발전시킬 사람은 자기뿐이 없다고 연설할 때는 언제고, 우리를 죽이려고 그래? 둘째 공자가 정신이 나간거지.”

    원로와 각주 들은 웅성거리며 가주전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아쉬운지 열린 문을 통해 한빈과 정휘지의 혈투를 눈에 담았다.

    그때였다.

    정휘지가 묘하게 방향을 틀었다.

    동시에 그의 검에 서늘한 검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쾌검백결(快劍百決)의 수법이었다.

    검기로 그물을 짜서 상대를 가두는 수법.

    그 검기에 묶인다면 목표는 백 갈래로 쪼개져서 핏덩이가 된다.

    하남정가에서도 가주만이 쓸 수 있다는 극강의 검법.

    정휘지의 모습에 정무룡이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은 정휘지에게 쾌검백결의 초식을 가르쳐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주전에 몰래 숨겨 놓은 비급을 몰래 익힌 것이 분명했다.

    “욕심이 많구나, 욕심이…….”

    정무룡은 말을 맺지 못했다.

    정휘지가 구사한 쾌검백결의 검기가 자신 쪽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정휘지로서도 이것은 마지막 초식이었다.

    모든 공력을 짜내 펼친 이번 초식으로 아비인 정무룡, 형인 정인지 그리고 자신을 함정에 몰아넣은 해남사우라는 정체불명의 낭인들을 모두 처단할 작전이었다.

    파팍! 슈웅!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검기를 본 정무룡이 다급히 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내공을 운용했다.

    스르륵!

    정무룡의 검에 서서히 피어나는 검기.

    그때였다.

    정무룡이 울컥하고 피를 토해 냈다.

    아직 몸이 회복이 안 된 것이다.

    뒤쪽에서는 한빈이 정휘지를 추격하고 있는 상황.

    하지만, 이대로라면 정무룡과 그 주변에 있는 이들은 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한빈이 도리어 속도를 줄였다.

    전광석화의 수법을 거두고 새로운 초식을 구사하려 한 것이다.

    ‘허장성세!’

    초식을 떠올림과 동시에 성대로 모든 공력이 집중되었다.

    “놈!”

    한빈의 사자후가 가주전 내부를 채웠다.

    짧은 외마디 사자후였지만, 그 목소리가 의미하는 것은 만만치 않았다.

    거대한 기세에 정휘지도 펼쳤던 쾌검백결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가 느낀 상대의 경지는 분명 화경이었다.

    정휘지는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를 향해서 날아오는 날카로운 검날.

    푹!

    한빈의 월아가 정휘지의 어깨를 꿰뚫었다.

    순간 정휘지의 몸이 허물어졌다.

    밖에서 둘의 대결을 지켜보던 이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청운사신이 이겼어.”

    “보통 고수가 아니었어.”

    “역시 화경의 고수가 분명해.”

    “맞아, 그 기세는 분명 화경이었어.”

    “그런데 청운사신이 뭐 하는 거지?”

    “그러게, 승부는 났잖아. 그런데 왜…….”

    원로와 각주 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것은 그들이 청운사신이라 이름 붙인 한빈의 행동 때문이었다.

    한빈이 지금 캐낸 것은 구결 하나였다.

    아직 남은 구결을 캐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했다.

    한빈이 정휘지를 향해 또박또박 외쳤다.

    “이 검은 패륜을 벌하는 검이요!”

    푹!

    피부를 꿰뚫는 소리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것은 정휘지가 이제까지 벌였던 일에 대한 단죄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정휘지에 동조하려 했던 세력은 자신의 어깨가 뚫린 듯 움찔했다.

    “어찌 보면 이 벌은 네가 가벼울 수도 있다. 이 검은 가문을 책임질 직계로서 수하들을 해하려 한 네놈에게 내리는 단죄의 검이다!”

    푹!

    한빈의 검이 다시 정휘지의 요혈을 찍었다.

    모두는 숙연해졌다.

    한빈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들의 가슴에 박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침없는 한빈의 행동에 누군가는 의문을 가졌다.

    누군가가 말했다.

    “청운사신이 사파의 인물이었어?”

    “사파는 무슨 사파. 사파면 왜 우리를 돕기 위해 왔겠어? 정파의 인물 중에도 괴팍한 양반들이 한둘이야?”

    “마치 얼음장 같은 것이 감정이란 없어 보이잖아. 이제까지 그런 고수가 정파에 있었어?”

    “이전에는 없었지만, 지금은 있잖아.”

    “지금은 있다니? 누구?”

    그의 질문에 잠시 대화를 멈췄다.

    그러고는 여럿이 동시에 외쳤다.

    “청운사신!”

    그들의 대화에도 한빈은 조용히 검으로 정휘지의 요혈을 제압해 나갔다.

    물론 그것은 구결이 있는 점이었다.

    [용안(龍眼)으로 초식을 확인합니다.]

    [인급(人級) 구결 인(人)을 획득하셨습니다.]

    [……]

    [인급(人級) 구결 성(成)을 획득하셨습니다.]

    한빈이 검을 멈췄다.

    드디어 마지막 인급 구결 한 개를 획득한 것이다.

    [인급(人級) 초식 살신성인(殺身成人)을 획득하셨습니다.]

    살신성인이라면 논어에 나오는 대목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나오는 인은 어질 인이고 용린검법에서의 인은 사람 인이었다.

    한빈이 살짝 의문을 품고 있을 때였다.

    다시 문구가 나타났다.

    [살신성인(殺身成人) - 세상에 흩어진 구결을 모으는 방법은 하나가 아닙니다. 자신의 몸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방법도 그중 하나입니다. 상대방의 공격에서 구결을 흡수하는 인급 최상의 초식입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면 보충 설명을 활성화하십시오.]

    한빈은 바닥에 널브러진 정휘지에게 슬쩍 시선을 돌렸다.

    희미하지만 아직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일렁이고 있다.

    한빈은 아무 망설임 없이 정휘지의 요혈을 찔렀다.

    푹!

    구결이 흡수되는가 싶더니.

    […… 보충 설명으로 전환됩니다.]

    획이 분리되더니 다시 새로운 획으로 합쳐지며 보충 설명이 시작되었다.

    [살신성인의 초식은 때에 따라 흡공대법(吸功大法)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적도 있습니다.]

    “흠.”

    한빈이 어이없다는 듯 헛기침을 뱉었다.

    흡공대법이면 정사지간의 인물이 만들어 냈다는 신공이었다.

    잘못 쓰면 오해를 받을 여지가 있다는 말이었다.

    생각해 보면 용린검법의 흔적이 무림의 여기저기에 남아 있는 듯 보였다.

    그때였다.

    다시 문구가 나타났다.

    [인급 초식 세 개를 모았습니다. 기본편의 책장이 추가됩니다. 책장 추가를 위해서는 네 시진의 명상이 필요합니다. 네 시진의 명상 중에는 어떤 방해도 받아서는 안 됩니다.]

    한빈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었다. 책장이 추가되고 기본편의 구결들이 늘어난다면?

    초절정 최상급은 훌쩍 뛰어넘을 것이었다.

    한빈이 미소 짓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한빈의 소매를 슬며시 끌었다.

    “대협.”

    상념에서 깨어난 한빈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가주 정무룡이 멍한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빈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아무 생각 없이 구결을 위해서 검을 찔렀지만, 정휘지도 엄연한 정무룡의 아들이었다.

    제압한 것을 떠나 이렇게 욕을 보였다는 데 대해 조금 미안했다.

    한빈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정무룡이 먼저 말했다.

    “아직 사지 근맥을 안 자르셨습니다. 대협의 손을 더럽힐 필요 없이 제가 마무리하지요.”

    말을 마친 정무룡은 아무 거리낌 없이 정휘지의 사지 근맥을 검으로 그었다.

    스윽.

    무복에서 스며 나오는 핏물이 바닥을 적시자 정무룡이 뒤를 돌아보며 무사들에게 명했다.

    “놈을 뇌옥에 가두거라.”

    그 외침에 밖에서 멍하니 있던 무사들이 우르르 가주전으로 들어왔다.

    그때였다.

    파드득.

    새들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갸웃한 정무룡이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마도 첩자들이 전서구를 날리는 소리일 듯싶습니다. 며칠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정휘지의 단독 소행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 전서구를…….”

    “미리 준비해 뒀습니다. 전서구는 하남정가 밖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파드득, 파드득.

    대화 도중에도 비둘기의 날갯짓 소리는 계속 울려 퍼졌다.

    * * *

    하남정가를 에워싼 한 무리의 거지가 있었다.

    그들은 새총을 들고 하남정가를 벗어나려는 비둘기를 잡고 있었다.

    툭! 툭!

    비둘기는 하남정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땅에 떨어졌다.

    비둘기를 주워든 거지 하나가 말했다.

    “아, 홍칠개 어르신은 왜 이런 일을 시키는 거지?”

    “아무렴 어때, 오늘 저녁은 비둘기구이를 먹을 수 있잖아.”

    “야, 말을 바로 해야지, 이 비둘기를 누구 코에 붙여?”

    “지금 잡은 것만 스무 마리인데 부족해?”

    “너랑 나랑만 있냐?”

    거지는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하남의 거지는 다 모인 듯 새총을 들고 하남정가를 에워싸고 있었다.

    이건 개방이 전서구를 위해 펼친 특별한 천라지망이었다.

    하남정가 밖을 벗어날 수 있는 비둘기는 한 마리도 없었다.

    * * *

    멀리서 하남정가 쪽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마을 어귀 객잔에서 술을 들이켜다가 하남정가 위를 날아오르는 비둘기를 보더니 어디론가 급히 달려갔다.

    그가 달려간 곳은 강가였다.

    강 근처에는 닭을 키우는 듯 닭 울음소리와 닭이 퍼드덕거리는 소리, 그리고 닭똥 냄새로 가득했다.

    사내는 양계장 문을 열고 조용히 누군가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늙은 농부가 닭에게 모이를 주고 있었다.

    사내는 늙은 농부에게 말했다.

    “실패한 모양입니다.”

    “그러면 소식은 전해 줘야지.”

    늙은 농부는 뒤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문을 열자 그곳에는 닭장 대신 비둘기가 들어 있는 새장이 있었다.

    일각 뒤.

    그 닭장 가득한 농가의 지붕으로 전서구가 날아올랐다.

    이들은 정화 부인이 만일을 대비해서 심어 놓은 첩자였다.

    전서구도 못 날릴 상황을 대비해서 심어 놓은 첩자들이 이제야 제 몫을 하는 것이었다.

    * * *

    그날 밤, 하북팽가의 정화 부인 처소.

    정화 부인은 일다경 전에 전서구를 받았다.

    전서구의 내용은 놀라웠다.

    자신과 손을 잡았던 둘째 오라버니, 즉 정휘지의 계획이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정화 부인은 잠시 넋을 놓고 남쪽을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이제는 현실을 생각해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 자살행위라 생각하여, 일단 이곳을 탈출하기로 했다.

    정화 부인은 가장 값비싼 물건을 꺼내기 위해 자신의 금고를 열었다.

    그곳에는 한철 궤와 서책 몇 권이 놓여 있었다.

    서책은 주원에서 가장 큰 전장인 만금 전장에서 돈을 찾을 수 있는 장부이며 한철 궤에는 진짜 청명환이 들어 있었다.

    금고에 가진 것들은 보자기에 싸던 정화 부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한철 궤의 무게가 살짝 다르다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가벼운 게 아니라 조금 무거웠다.

    “뭐지?”

    고개를 갸웃한 정화 부인이 재빨리 한철 궤를 바라봤다.

    한철 궤를 봉인한 밀랍도 그대로였다.

    그런데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정화 부인은 다급하게 봉인을 뜯고 한철 궤를 열었다.

    “헉!”

    정화 부인이 헛숨을 토해 냈다.

    진짜 청명환이 들어 있어야 할 한철 궤에는 싸구려 쇠구슬이 녹슨 채 들어 있었다.

    동시에 정화 부인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정화 부인은 다급하게 장부를 열어 봤다.

    동시에 욕지거리를 토해 냈다.

    “앗! 이런 빌어먹을 새끼!”

    장부의 껍데기는 그대로였지만, 안의 내용물이 바뀌었다.

    텅텅 빈 종이 위에 네 글자만 적혀 있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스르륵.

    넋 나간 정화부인의 몸이 허물어졌다.

    그렇다면, 진짜 청명환과 장부는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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