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사필귀정(事必歸正) (7)
정무룡이 건재하다라?
이것은 판세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뜻했다.
그때까지 멀찌감치 떨어져 조용히 난장판을 바라보던 원로와 각주 들이 어깨를 움찔했다.
정휘지가 가짜라 했던 말을 반신반의했던 그들이었다.
잠시 눈알을 굴리던 그들은 가주 정무룡을 향해 포권했다.
“가주님, 쾌차를 축하드립니다!”
“가주님…….”
명백한 태세 전환.
동시에 낭인으로 위장한 맹호사대에게 제압당한 하남정가 무사들도 병기를 떨어뜨렸다.
쨍그랑!
쨍그랑!
이제는 싸울 명분이 없어진 것이다.
검신이 바닥에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한여름 소나기처럼 울렸다.
그 울림에 정휘지는 바로 반응했다.
정체불명의 하인이 가장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인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이제는 자리를 피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한 정휘지는 주변을 둘러보며 서서히 뒷걸음쳤다.
그때 가주 정무룡이 외쳤다.
“가주를 능멸한 자, 가문을 배반한 자, 형제를 해한 자는!”
정무룡이 잠시 말을 끊으며 시선을 한빈에게 돌렸다.
그는 한빈에게 작게 포권하며 말을 이었다.
“사지 근맥을 자르고 뇌옥에 가두는 것이 가칙입니다. 그런 자에게는 죽음도 사치지요. 차마 제 아들에게 손을 쓰지는 못하겠으니 처리는 대협에게 맡기겠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런데 이번 부탁까지 하면 세 가지 빚을 지신 겁니다, 가주님.”
“알겠습니다. 그리하도록 하죠.”
정무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정휘지가 천천히 뒷걸음치다가 설화에게 달려갔다.
정휘지의 움직임은 실로 민첩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설화의 뒤에 선 정휘지가 외쳤다.
“더 이상 가까이 오면 이 아이의 목을 베겠다.”
그 외침에 한빈이 다급하게 외쳤다.
“설화야!”
누가 봐도 설화를 걱정하는 모습.
하지만 한빈이 걱정하는 이유는 전혀 달랐다.
설화가 구결을 나타내는 요혈을 훼손할까 두려워서였다.
다급하게 달려오는 한빈을 본 정휘지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약점이…….”
정휘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까 한빈에게 당했던 옆구리의 반대쪽이 뜨끔해서였다.
옆구리에서 이상하게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슬쩍 옆구리를 봤더니 단검이 하나 더 박혀 있었다.
그의 흰 무복에 뻘건 피가 스며들었다.
“이런 제길!”
정휘지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설화를 베려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이게 대체…….”
정휘지의 눈이 커졌다.
잡아 두었던 설화가 자신의 손아귀를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그때 정휘지의 앞에 다가온 한빈이 말했다.
“설화야, 내 물건은 건들지 말라고 했지?”
“죄송해요.”
설화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에 한빈이 피식 웃으며 정휘지에게 다가갔다.
한빈은 정휘지의 옆구리에 박힌 단검을 바라봤다.
아직까지는 한빈의 계획대로였다.
정휘지의 무위는 초절정 최상급으로 화경을 앞두고 있는 상태였다.
즉, 그냥 붙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운 상대라는 말이었다.
잔혈마도를 해치울 때에는 쾌검난마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정파인 정휘지에게 쾌검난마가 통할 리가 없었기에 한빈은 그의 힘을 조금 빼놓았다.
정정당당한 승부?
그건 정휘지에게는 과분하다 생각하는 한빈이었다.
한빈이 다가서자 정휘지가 외쳤다.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하남정가의 행사에 끼어든다는 말이냐!”
“하남정가의 일에 끼어든 것은 너고!”
“뭐라?”
“너 방금 파문당했거든. 족보에 네 이름은 없어. 한마디로 이제 정 씨 성을 쓸 수 없다는 거지.”
한빈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엄지로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가주 정무룡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정무룡은 깨어나서 사태를 파악한 뒤 정휘지와 관계된 모든 이들을 가문에서 파문하기로 했다.
물론 하북팽가에서 잔뜩 꿈에 부풀어 있던 정화 부인도 벌써 파문당한 상태였다.
정휘지와 정화 부인은 이제 하남정가의 적이면서 정파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휘지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만은 내 손으로 죽인다.”
말을 마친 정휘지가 품속에서 단약을 꺼냈다.
그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영약은 아닐테고…….’
불길한 모습에 한빈이 재빨리 일촉즉발의 수법으로 검을 뻗었다.
파박!
이제는 정휘지의 목덜미까지 한 치 앞.
그때였다.
정휘지의 앞에 거대한 기막이 펼쳐졌다.
동시에 한빈의 검이 튕겨져 나갔다.
팡!
충돌음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한빈은 정휘지가 삼킨 단약의 정체를 곧 깨달았다.
한빈은 뒤로 물러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넌 지금 최악의 선택을 했어.”
“네놈을 죽일 수 있다면 최악의 선택은 아니지.”
“그렇다고 한월단을 삼켜?”
한월단은 빙공을 나타내는 한(寒)과 일취월장(日就月將)이란 말에서 월을 따 만든 이름이었다.
단약 하나면 눈 깜짝할 사이에 공력을 일취월장시킨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한월단은 선천지기마저 모두 빨아들여 잠재력을 폭발시킨다.
선천지기를 모두 소모한 무사는 어떻게 될까?
한월단의 효과가 끝나면 그 음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장기가 얼어 버리기 마련이었다.
십중팔구 폐인이 된다는 말이었다.
지금 정휘지는 동귀어진의 수법을 선택한 것이다.
정휘지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네놈의 식견이 대단하구나. 한월단을 알다니!”
정휘지의 외침에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정휘지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휴!”
심호흡하는 정휘지의 입가에는 서릿발처럼 차가운 한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심호흡 한 번 하자, 장내가 얼어붙을 것 같은 기세에 휩싸였다.
정휘지의 옆구리에 박혔던 단검이 스르륵 밀려 나왔다.
툭! 툭!
바닥에 구르는 단검.
하지만, 정휘지의 옆구리에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정휘지가 한기로 흘러나오는 피를 제어한 것이다.
그 모습에 가주 정무룡이 외쳤다.
“대협! 피하시오!”
그의 외침에 한빈이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마시지요.”
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정휘지에게 집중하며 용린검법의 응용편과 융합편의 구결을 운용했다.
‘전광석화.’
‘구걸십팔보.’
순간 한빈의 스르륵 사라졌다.
물론 사라진 것이 아니라 너무 빨라 사라진 것처럼 보인 것이다.
그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것은 하남정가의 몇몇 고수와 설화밖에 없었다.
설화는 한빈의 움직임에 혀를 찼다.
“참, 어떻게 저리…….”
“너는 주군의 움직임이 보인다는 말이냐?”
이무명이 놀라 묻자 설화가 답했다.
“살짝 보여요. 그런데 저 공격을 막을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럼 주군이 이길 수는 있을 것 같으냐?”
“아니요, 이길 수는 없을 거예요.”
“그럼 주군이 위험하지 않느냐? 우리가 빨리…….”
“걱정하지 마세요. 지지도 않을 거니까요.”
“허…….”
이무명이 긴 탄성을 흘렸다.
이무명이 아무 말 못 하고 눈을 크게 뜨며 한빈의 모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였다.
멀리 떨어져 한빈과 정휘지의 혈투를 바라보고 있는 하남정가의 가주 정무룡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나이에 저런 방법을 쓰다니……!”
알 수 없는 정무룡의 말에 풀려난 정인지가 다가와 물었다.
“아버님,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북쪽에서 한풍이 불어오니 모든 것을 얼리는구나. 하지만, 푸른 구름이 한풍을 감싸니 봄날이라도 봄날! 이제 세대가 바뀌었어.”
가주 정무룡이 시를 읊듯 혼잣말을 내뱉자 정인지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버님, 저 대협은 대체 누구고요?”
“허허, 대지를 얼게 할 한풍을 저리 잠재우니 청운사신(靑雲死神)이라 할 수밖에 없구나!”
“청운사신이라고요?”
정인지는 고개를 돌려 한빈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 얼핏 보이는 것은 한빈의 푸른 의복이었다.
그것은 진짜 푸른 구름처럼 보였다.
한기를 감싸는 푸른 구름이라?
그의 아버지인 정무룡이 말한 청운사신이란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그들의 대화에 하남정가의 원로와 각주 들이 조용히 말했다.
“청운사신이라?”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군.”
“강호에는 기인이사(奇人異士)가 셀 수 없이 많다고 하지 않나. 청운사신도 그중 하나인 것이지.”
“허허, 아무리 그래도 저런 고수가 어찌 지금까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단 말인가? 내 오늘 안목을 넓혔네.”
그들은 정휘지가 일으킨 반란은 안중에도 없었다.
지금만큼은 한 명의 무인일 뿐이었다.
그들은 한빈과 정휘지의 결투에 푹 빠져 모든 것을 잊고 있던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그런데 청운사신이 이길 수 있을까? 아직 정휘지는 건재하잖아.”
“그러게, 가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보면 분명 유리한 것은 청운사신인데…….”
하인으로 위장한 한빈의 별호가 청운사신으로 굳어지며 뜻하지 않게 정파의 대표적인 기인으로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외침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주전의 여기저기서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챙! 챙!
합이 거듭될수록 득의만만했던 정휘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에 반해 한빈의 입꼬리는 점점 올라갔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한빈의 작전은 간단했다.
강맹한 정휘지의 기세에 그대로 부딪칠 필요는 없다.
적이 가장 강할 때 머리를 들이미는 것은 하책.
굳이 정휘지가 벌리고 있는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밀 필요는 없었다.
즉, 한월단의 효과가 끝나는 시점에서 필요한 구결을 캐내면 그만이었다.
한월단의 효과가 얼마나 지속될까?
그것은 길어야 반 시진일 것이다.
그 시간이 지난다면?
한빈은 미소를 지으며 구름처럼 정휘지의 주변을 맴돌았다.
한빈의 모습에 정휘지가 검을 멈췄다.
가주전 내부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해졌다.
한빈을 바라보던 정휘지가 외쳤다.
“이런 비겁한 놈! 사내라면 내 검을 피하지 말아라!”
“어떻게 알았어?”
“뭐를 말이냐?”
“내가 비겁한 거 말이야. 비겁하든 당당하든 관계없어. 네 사지 근맥만 자르면 그만이거든. 내가 왜 네 장단에 손을 맞춰야 하는데?”
“…….”
“내가 네 연인이라도 되는 거야? 그렇게 몸부림치다가 고이 가 버리라고.”
“이런 개새…….”
정휘지는 말을 잊지 못했다.
한빈이 자신의 품으로 짓쳐들어왔기 때문이다.
파팍!
정휘지가 재빨리 물러났다.
한월단의 효과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 시점을 한빈이 기가 막히게 파악하고 숨통을 조여 오는 것이었다.
정휘지는 틈을 만들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눈에 이 대결을 넋을 잃고 구경하고 있는 원로와 각주가 들어왔다.
정휘지는 그들에게 달려갔다.
그들을 공격하면 상대는 분명 구하러 올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의 앞에 선 정휘지가 앞에 있는 각주 하나를 베려 검을 들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튀어나왔다.
하남정가에서는 어깨에 힘 좀 쓰는 고수라지만, 한월단을 취한 정휘지를 막을 이는 이곳에 없었다.
그때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그 웃음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물론 웃음의 주인공은 한빈이었다.
정휘지가 검을 멈추고 한빈에게 외쳤다.
“계속 도망만 다닌다면 이들을 죽이겠다.”
“멈추긴 왜 멈춰? 하던 거 계속해. 그러지 않아도 배신자를 골라내려면 골머리 아플 텐데, 네가 대신 처리해 주면 나야 좋지.”
이것은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