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사필귀정(事必歸正) (6)
정휘지의 지시에 하남정가의 무사 하나가 정인지의 목덜미를 향해 검을 날렸다.
검 끝을 본 정인지는 눈을 감는 대신 고개를 돌려 태사의를 바라봤다.
저것이 뭐길래?
생각해 보면 정휘지의 계획은 너무나도 치밀했다.
아니 치밀한 계획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핏줄을 제거하고 태사의에 오르려는 야망이 무서웠다.
죽음을 앞둔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까지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정인지는 하남정가에 욕심이 없었다.
동생이 하남제일검으로 자라나 강남 오대세가를 아우르기를 바랐다.
그 원대한 계획을 위해서는 정인지가 하남정가에 집중해야 했다.
자신이 하남정가를 지키고 있으면 동생 정휘지가 언젠가는 정의맹의 맹주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영약을 동생에게 양보했었다.
동생의 수련을 위해서 어떤 일도 맡기지 않았다.
동생 정휘지가 하남제일검으로 커 나가는 데 조금의 소홀함이 없도록 도왔다.
그런데, 동생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순간 검 끝이 자신의 목 한 치 앞에 다다른 것이 보였다.
정인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팅!
검이 튕기는 소리가 들렸다.
무사는 손이 얼얼한지 뒤쪽으로 한 발짝 물러서 상대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하인 복장을 한 한빈이 웃고 있었다.
무사는 그 모습에 뒤로 한 발짝 더 물러났다.
한빈에게 묘한 기세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정휘지는 일이 틀어졌음을 눈치채고 재빨리 다른 무사에게 말했다.
“팽가의 사 공자를 죽여라!”
말을 마친 정휘지가 눈을 크게 떴다.
팽가의 사 공자 곁에 있던 무사들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기 때문이다.
털썩!
마치 부러진 수수깡처럼 옆으로 꺾인 채로 쓰러졌다.
쓰러진 무사의 뒤쪽에는 여자아이가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점혈이 풀린 이무명도 쓰러진 무사에게 검을 빼앗아 들고 있었다.
난데없는 상황에 정휘지가 다시 가주 패를 높이 들었다.
“당황하지 말고 여기 있는 적들을 이 자리에서 지운다!”
무사들이 점점 이무명과 설화를 보며 포위망을 좁힐 때였다.
정체불명의 사자후가 가주전을 뒤덮었다.
“이놈들!”
강력한 내공이 담긴 사자후 같은 외침에 무사들은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무사들의 눈이 커졌다.
그 소리는 가주전의 옆문에서 들려왔다.
무사들이 그곳을 보고 있을 때였다.
드르륵.
바퀴 달린 의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헉!”
“저, 저분은…….”
하남정가 무사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무 바퀴가 멈추자 의자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는 하남정가의 가주 정무룡이 앉아 있었다.
비록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분명 가주 정무룡이 맞았다.
가주 정무룡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내부를 훑어보고 있었다.
아파서 핏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누가 봐도 화난 모습이다.
가주 정무룡이 다시 외쳤다.
“모두 검을 내려놓거라!”
분위기는 눈보라가 치는 것 같이 무거워졌다.
하남정가 무사들이 멈칫했다.
그때 반대쪽에서 정휘지가 외쳤다.
“저것은 가짜다! 모두 가주 패와 내 명에 따라라!”
정휘지는 손에 잡은 가주 패를 치켜들었다.
순간 하남정가 무사들은 가주 패와 가주 정무룡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아침까지 누워 있던 가주님이 깨어나실 리가 없지. 저놈은 가짜다!”
그 무사의 외침에 분위기는 정휘지 쪽으로 넘어왔다.
하남정가 무사들이 기세 좋게 다시 검을 잡았다.
그 모습에 정휘지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지금 외친 자는 자신의 오른팔이었다.
이곳의 무사들은 모두 가주 직속 무력대였다.
가주의 직속부대 중 반은 자신의 사람이고 반은 낭인 시장에서 고용한 실력 좋은 무사들이었다.
방해꾼들도 모두 밖으로 사라졌으니 이곳의 절대자는 자신이었다.
정휘지는 힐끔 자신의 아비인 가주 정무룡을 바라봤다.
가주인 아버지가 등장했다는 자체가 놀랍긴 했지만, 지금 목소리로 봐서는 회복을 못 한 것이 분명했다.
정휘지는 하남정가 무사들을 향해 다시 외쳤다.
“신속히 처리하라! 저 가짜도 같이 처리하라!”
이제는 자신의 아비까지 죽이라 명하는 정휘지.
그를 보고 있던 하남정가의 가주 정무룡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삶을 포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결단을 내리려는 것일까?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빈이 기분 좋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와 동시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한빈과 정인지 그리고 가주 정무룡을 향하던 무사들이 멈칫한 것이었다.
그들의 행동은 마치 최면에 걸린 것과도 같았다.
이상한 행동에 정휘지가 다시 외쳤다.
“대체 빨리 처리하지 않고 무엇 하는 것이냐! 가주 패의 명에 모두 따라…….”
정휘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세히 보니 무사의 반이 동료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었다.
정인지와 가주를 처단하려고 걸어가던 무사들이 동료에게 제압당한 것이다.
정휘지의 눈이 커졌다.
지금 이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지금 검을 겨누고 동료를 제압하고 있는 무사들은 자신이 직접 뽑은 낭인 무사들이었다.
대공자 정인지를 따르는 무사들은 임무를 핑계로 다른 곳으로 보내 버렸다.
부족한 무사들은 하남 낭인 시장에서 돈을 주고 고용했다.
정휘지는 오히려 기존에 데리고 있던 자들보다 낭인으로 고용한 무사들을 더 믿었다.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닌 돈을 따르는 낭인들이었기에 돈만 제때 준다면 배신당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순식간에 하남정가 무사들을 제압한 자들이 어딘가를 바라보며 외쳤다.
“모두 처리했습니다, 부대주!”
정휘지도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가주 정무룡을 부축하고 있는 무사 쪽이었다.
“헉!
정휘지가 놀라움에 탄성을 질렀다.
정무룡을 부축하고 있는 무사는 다름 아닌 해남사우였다.
낭인 중에서도 더 웃돈을 주고 가주전의 호위를 맡긴 그 무인 말이다.
“대, 대체 왜?”
떨리는 정휘지의 목소리에 심미호가 한 발 나서며 말했다.
“우리는 더 큰 돈에 충성하거든요. 그깟 푼돈은 안 먹혀요.”
사실 반은 진심이었다.
정휘지가 준 돈보다 한빈의 대우가 좋았으니 말이다.
그때 누군가가 심미호의 어깨를 토닥였다.
“잘했어, 부대주.”
“별말씀을요, 대주님.”
그들의 대화로 봐서 어딘가의 무력 단체가 분명했다.
낭인 시장에 잠입해서 자신의 일을 방해한 무력 단체라?
대공자 정인지가 비밀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는 말인가?
이것은 정휘지로서는 상상도 못 한 결과였다.
정휘지는 검을 잡은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주변을 살폈다.
혼자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정휘지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그것은 당연히 하인 복장을 한 한빈이었다.
“너만은 내 손에 죽인다.”
정인지의 검에서 푸른 검기가 피어났다.
스멀거리며 피어오르는 검기.
그것은 초절정 최상급에서나 보일 수 있는 무위였다.
파팍!
정휘지가 한빈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들었다.
순간 한빈의 신형이 사라졌다.
사사삭.
정휘지의 검이 한빈이 있던 자리를 갈랐다.
휘리릭!
한빈의 뒤쪽에 있던 휘장이 정휘지가 내뿜는 검기에 반으로 잘렸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한빈이 사라지는 장면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한빈이 반으로 갈라진 휘장 아래 쓰러져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죽했으면 한빈으로 변장하고 있는 이무명마저 비명을 질렀을까?
“악! 주군!”
이무명은 자신이 변장하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한빈을 불렀다.
그때 옆에 있는 설화가 이무명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아저씨, 왜 그렇게 놀라요? 이형환위 처음 봐요?”
이무명이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바라봤다.
정휘지의 주변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빈이 있을 곳이라고는 반으로 갈라져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는 휘장 아래밖에는 없었다.
놀라던 이무명이 설화에게 물었다.
“이, 이형환위라고?”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설화야.”
“공자님의 마지막 표정 보셨어요?”
“무슨 표정?”
“음흉한 표정이요.”
이무명은 놀람도 잊은 채 설화를 멍하니 바라봤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주군 한빈이었다.
자신은 그 놀람에 한빈의 표정까지 볼 생각은 못 했다.
아니, 한빈이 정휘지의 검을 피했다는 것도 몰랐는데…….
의문이 쌓이자 이무명이 다시 물었다.
“설화야, 진짜 주군의 표정을 봤단 말이냐?”
“원래 표정을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거잖아요.”
설화가 웃었다.
그 웃음에 세차게 뛰던 이무명의 가슴도 천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무명과 다른 무사들이 정휘지가 벤 휘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가장 놀라고 있던 것은 정휘지였다.
하남제일검이라 자신하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 손끝에 느껴졌던 감각은 묘했다.
살짝 스친 느낌이었다.
자신의 검이 닿기 전에 정체불명의 하인은 몸을 빼내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그는 과연 누굴까?
하지만, 지금은 의문을 떠올릴 때가 아니었다.
정체불명의 괴인을 처리하는 것이 먼저였다.
마음을 다스리며 기감을 끌어올린 정휘지의 감각에 괴인의 기척이 잡혔다.
동시에 정휘지는 뒤로 몸을 돌리며 검을 그었다.
하남일쾌!
쾌검을 중시하는 하남정가의 가장 기본적인 검법이었다.
하지만, 정휘지가 쓰는 하남일쾌는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이것은 하남정가가 추구하는 궁극의 빠른 검.
그것을 정휘지가 구현하고 있는 것이었다.
스윽!
정휘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번에도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옆구리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뭐지?
정휘지는 자신의 옆구리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단검 한 자루가 박혀 있었다.
그때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려 보니 하인 복장을 한 괴인이 자신의 아비인 가주 정무룡의 옆에서 미소 짓고 있었다.
정휘지의 옆구리에 단검을 꽂아 넣고 뒤로 물러난 한빈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용안(龍眼)으로 초식을 확인합니다.]
[인급(人級) 구결 신(身)을 획득하셨습니다.]
[인급(人級) - 살(殺), 신(身)]
구결을 확인한 한빈이 낮게 읊조렸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왕거니가 맞았군.”
이건 진심이었다.
정휘지의 몸에는 아직도 구결을 나타내는 점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오늘 하나 남은 인급 초식을 완성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의미심장한 한빈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정무룡이 눈을 크게 떴다.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대협.”
놀란 듯한 정무룡의 목소리에 한빈은 그제야 그를 바라봤다.
“아, 가주님. 죄송합니다, 의미 없는 넋두리였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저자를 어떻게 처리해 드릴까요?”
“둘째의 처리라면 대협의 뜻대로…….”
정무룡의 말이 끝나기 전에 한빈이 물었다.
“저는 하남정가의 가칙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말을 마친 한빈은 진지한 표정으로 가주 정무룡을 바라봤다.
이미 정휘지에 대한 처리는 자신이 맡기로 했다.
하지만, 정도라는 것이 있다.
한빈은 자신의 마음대로 요리할 테지만, 그래도 가칙의 범위를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
한빈의 질문을 받은 가주 정무룡이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형을 함정에 빠뜨리고 자신을 죽여 가주 자리를 찬탈하려던 정휘지가 있었다.
자신의 둘째 아들을 매섭게 바라보던 정무룡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병색이 완연해 보였던 정무룡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