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사필귀정(事必歸正) (5)
물론 당황한 것은 정휘지만이 아니었다.
일개 하인이 하남정가의 실세에게 저리 장난을 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각주와 무사들도 눈이 동그래져서 하인을 바라봤다.
하지만, 정휘지가 가만히 있는데 나설 수도 없었다.
그때 하인이 다시 물었다.
“다시 묻죠. 가주님께서 어떻게 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물음은 명백한 도발.
정휘지가 내공을 담아 외쳤다.
“네놈이 진정 죽고 싶은 것이냐! 아무리 철없는 노비라고 하나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가문의 법도에 따라 너를 처리할 것이다.”
검집에 손을 얹고 하인에게 다가서는 정휘지.
그가 다가오자 하인이 손을 내밀며 외쳤다.
“말씀드리면 될 것이 아닙니까! 살인 멸구가 웬 말입니까?”
뒷걸음치며 고래고래 소리치는 하인의 모습에 정휘지는 걸음을 멈췄다.
저 하인이 나타나고 나서부터 이상하게 분위기가 흐려지는 모습이었다.
살인 멸구라는 단 한 단어가 가져오는 파장은 컸다.
사람들은 하인이 무슨 중요한 증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바라보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저 하인이 뭔가 아는 게 아니야?”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살인 멸구? 대체 뭘 숨기려는 거지?”
난데없는 상황에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때 대공자 정인지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아버님이 어떻게 되셨다는 말이냐? 말해 보아라.”
자신이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정인지는 아버지인 가주의 안위를 걱정했다.
하인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깨어나셨는데요.”
“깨어나셔? 그럼 눈을 뜨셨다는 말이더냐?”
“네, 정확히 얘기하자면 병환을 털고 일어나셨다고 하는 표현이 맞습니다. 뭐, 강남 무림 아니 하남정가의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죠.”
하인은 무슨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정인지와 정휘지를 번갈아 바라봤다.
물론 하인의 정체는 한빈이었다.
한빈은 심미호의 도움을 받아 의원이 아닌 하인으로 위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빈은 하남정가의 첫째와 둘째를 번갈아 바라봤다.
첫째인 정인지는 자신의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와는 반대로 정휘지는 한빈의 말이 절대 사실이 아니라는 듯 눈을 부라리며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어. 네놈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야!”
그 모습에 한빈이 말했다.
“하남정가의 이 공자님, 많이 당황하셨군요.”
“뭐, 뭐라? 내가 뭘 당황했다는 말이냐?”
정휘지가 표정을 굳히자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버님이 깨어났다고 하면 아들 된 도리로 당연히 좋아하셔야 하는 게 아닌가요?”
“아버님은 중독으로 인해 상태가 더욱 악화되셨다. 그런데 갑자기 깨어나셨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한빈이 보기 좋게 입꼬리를 올렸다.
“중독되신 것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확신하실 수 있죠?”
“청명환을 먹고 저리되셨으니 당연하지.”
“저기 있는 팽 공자가 청명환을 전달하고 나서 눈 깜짝할 사이에 중독이 되었습니다. 맞죠?”
“그렇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의심해야 할 사람은 약을 쓴 의원이 아닙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의원이 청명환을 바꿔치기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한철 궤에서 청명환을 꺼내는 것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그야 당연히 치료를 위해 의원이 꺼냈겠지.”
“저 같으면 이런 일을 벌이기 전에 의원의 손모가지부터 잘랐을 겁니다. 솔직히 정 공자님이 의원을 믿는 것도 순전히 본인의 입장 아닙니까?”
한빈이 고개를 돌려 힐끔 의원을 바라봤다.
의원이 눈을 크게 뜨고 뒷걸음쳤다.
그 모습에 한빈이 외쳤다.
“보세요! 뭔가 찔리는 게 있으니 저리 도망치죠. 의원은 믿고 팽가의 사 공자는 못 믿는다는 말씀입니까?”
“…….”
정인지는 한빈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눈썹만 꿈틀댔다.
그 모습에 한빈이 피식 웃으며 다시 물었다.
“의원은 믿고 형제는 못 믿는다는 말씀입니까?”
한빈의 지적은 타당성이 있었다.
한빈은 좌중을 돌아보며 계속 외쳤다.
“중독에 대한 증거는 의원과 정휘지의 증언이 유일합니다.”
그 모습에 정휘지가 다급하게 답했다.
“다른 증거가…….”
한빈이 그의 말을 바로 끊었다.
“그 다른 증거라는 것은 확실한 증거입니까?”
정휘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빈을 바라봤다.
복장은 분명 하인이 맞았다.
그런데 자신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살살 약을 올리며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정휘지는 힐끔 정인지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자신만 함정을 판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정체불명의 하인은 정인지의 사람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의 아비인 가주 정무룡이 자리에서 일어날 일은 없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 바로 정휘지였으니 말이다.
그는 몇 달 전 아비 정무룡에게 백독곡에서 채집했다는 영초를 복용시켰다.
세상에는 영초로 알려졌지만, 몇 가지 약초를 섞으면 독성을 띠는 약재로 변했다.
그러니 어떤 의원이 와도 고칠 수 없는 병이었다.
물론 최고 영단이라 불리는 청명환을 복용한다면 어느 정도 회복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정무룡이 복용한 청명환은 분명 가짜였다.
하북팽가에서 보내올 때부터 가짜였으니 말이다.
이것은 정화 부인과 정휘지가 사전에 약속한 것이었다.
운이 좋게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하남정가에 도착한다고 해도 자신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즉, 어찌 되었든 하북팽가의 사 공자와 하남정가의 대공자는 이곳에서 죽어야 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라?
그 변수는 가주 정무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저 하인 복장을 한 사내가 거짓을 고한 것이 분명했다.
하인 복장의 사내는 대공자 정인지가 심어 놓은 첩자가 분명하다고 정휘지는 생각했다.
그는 일단 상황을 수습하기로 했다.
정휘지는 힐끔 점창파의 정창명을 바라봤다.
거대 문파의 힘을 빌리기로 한 것이다.
눈이 마주친 정창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휘지가 말을 이었다.
“증거에 대해서 점창파와 곤륜파를 대표하는 두 고수가 인정했거늘 그걸 부정할 자가 누가 있다는 말이더냐?”
정휘지의 말이 끝나자 정창명이 내공을 실어 외쳤다.
“하인 주제에 대문파인 우리 점창파를 모독하는 것이더냐!”
점창이라는 이름으로 누르려는 것이었다.
그의 외침에 정휘지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나머지 사람들은 그대로 굳었다.
쩌렁쩌렁한 그의 외침에 정휘지와 관계없는 좌중은 긴장한 것이다.
누군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하인의 목이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하네.”
“이제 곧 떨어지겠지. 쯧.”
모두가 혀를 차고 있을 때 한빈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저도 다른 구파일방 중 한 곳에 서찰의 진위에 대해 물어보겠습니다.”
그 말에 여기저기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누군가가 말했다.
“설마 했는데, 미친놈이었잖아.”
“그러게 말이야.”
“그럼 대공자하고 팽가의 공자가 공모한 게 맞는 거야?”
“그건 또 다른 문제지. 그러데 저 하인 놈은 미친 게 확실해. 자기가 뭔데 구파일방한테 물어봐.”
“하하, 그러게 말이야.”
사람들이 웅성거리자 정휘지와 관계된 모든 이들은 동시에 입꼬리를 올렸다.
정창명도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허허, 하인 주제에 어찌 구파일방을 논한다는 것이더냐?”
말을 마친 정창명은 한빈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가 진짜 한빈이라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로 생각되는 이무명이 한빈 대신 붉은 무복을 입고 제압당한 채 앉아 있으니, 하인이 한빈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했다.
모두의 시선을 받은 한빈이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갑작스러운 한빈의 행동에 모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모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빈을 바라볼 때 뒤쪽에서 가주전의 입구가 열렸다.
덜컹!
세차게 문이 열리고 뒤쪽에서 비추는 햇볕이 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긴 그림자를 따라 모두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곳에서는 무사 하나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화려한 검을 허리에 차고 여유 있게 걸어오는 그는 남들에게 보이려는 듯 소매를 펄럭였다.
그 소매에는 매화 문양이 선명했다.
누군가 그를 보며 낮게 외쳤다.
“화산파다!”
“화산파의 매화검수?”
그들의 외침에 곤륜의 이진명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가주전에 들어온 자는 그도 익히 아는 얼굴이기 때문이다.
그는 주위의 양해도 구하지 않고 곤륜의 이진명 앞에 섰다.
그가 정중히 포권했다.
“이진명 대협, 오랜만입니다.”
“허, 서재오 대협이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이진명도 놀라 마주 포권했다.
지금 이곳에 나타난 화산파의 검객은 다름 아닌 화산파의 매화검수 서재오였다.
이진명은 눈을 가늘게 뜨며 머리를 굴렸다.
과연 아군일까? 적군일까?
이진명은 서재오가 아군에 가깝다 생각했다.
그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에게 원한이 있으니까 말이다.
서재오는 반드시 자신들과 뜻을 함께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진명의 기대는 서재오의 다음 말에 무너졌다.
“제가 이 필체를 보니 위조의 가능성이 있군요. 그리고 구파일방이라는 거대한 문파가 언제부터 남의 가문의 행사에 간섭했습니까? 저희 화산파도 이런 일에 나선 적은 없습니다.”
따끔한 일침에 이진명의 입술이 살짝 떨렸다.
곤륜과 점창이 화산 앞에서 당당할 수 있던가?
구파일방에 정확한 서열은 없지만, 화산을 힘으로 누르기에는 점창과 곤륜이라는 이름으로는 조금 부족했다.
게다가 화산의 제자 서재오가 외친 강호의 도리는 논리에도 맞았다.
이진명으로서는 반박할 논리도 힘도 없는 것이다.
서재오도 지금의 일이 내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검과 매화 패를 받기 위해서는 한빈의 말에 따라야 했다.
사실 이 필체가 누구의 것인지 이진명이 어떻게 알겠는가?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번 일이 잘 끝나면 매화 패를 돌려받을 수 있으리라는 사실뿐이었다.
서재오에게 이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다만, 돌려받을 매화 패를 생각하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모습에 곤륜의 이진명이 낮게 읊조렸다.
“미쳤군, 미쳤어.”
난데없는 상황에 정휘지는 뭔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품속에서 가주 패를 꺼내 들었다.
가주 패를 높이 쳐든 정휘지가 외쳤다.
“하남정가의 무사들은 가주의 명을 받들라!”
가주 패의 절대적인 권위 앞에 하남정가 무사들이 동시에 검으로 바닥을 찍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쿵! 쿵!
가장 앞에선 무사가 각 잡힌 목소리로 말했다.
“명을 내리십시오!”
그 모습에 정휘지가 외쳤다.
“하남정가의 역적들을 모두 처단하라!”
무사들이 검을 빼 들었다.
스릉! 스릉!
무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조를 나누어 각자 맡은 인물을 처단하기 위해 다가갔다.
한쪽은 한빈으로 변장한 이무명 쪽으로.
한쪽은 대공자 정인지 쪽으로.
가주전에는 언제 피가 튀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긴장감이 맴돌았다.
정휘지가 서재오와 이진명 그리고 정창명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제 외부인은 나가 주시죠. 저희 가문의 일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서재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흠.”
그가 한빈에게 부탁받은 것은 딱 여기까지였다.
이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와는 관계없었다.
서재오가 이진명과 정창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이만 퇴장하는 게 좋겠습니다.”
“자네 말이 맞네.”
정창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재오의 뒤를 따랐다.
이제는 증인이 될 외부인은 모두 사라진 상태.
정휘지는 자신의 형인 대공자 정인지를 바라봤다.
“차마 제 손으로 직접 처리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정휘지는 슬쩍 턱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