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사필귀정(事必歸正) (4)
그들의 발소리가 뇌옥의 철창 앞에서 멈추자 이무명이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정휘지의 수하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는 비릿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죄인은 어서 일어나시오.”
“…….”
이무명은 황당하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
분명 가문의 자체 재판이 열릴 것이라고 했다.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사돈 집안의 직계를 죄인 취급한다라?
주군인 한빈이 실패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싫었다.
하지만, 정휘지의 수하는 묘하게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무명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을 본 정휘지의 수하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기분 좋게 부하에게 외쳤다.
“어서 끌어내라!”
이무명과 설화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휘지의 수하가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변명할 기회는 줘야 할 테니, 아혈은 풀어 줘야지.”
그는 마치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 점혈을 풀었다.
픽!
동시에 이무명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음.”
정휘지의 수하가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너무 서운해하지 마시죠. 저희라고 팽가의 공자님께 이런 대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 제 주군의 물음에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십시오. 그것만이 살길입니다.”
“자네, 이러고도 무사할 성싶은가!”
이무명이 한빈의 역할에 감정 이입해서 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외침에 정휘지의 수하가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아혈은 가주전에 도착해서 다시 풀어 드려야 할 듯싶군요.”
픽!
그는 다시 이무명의 아혈을 점혈했다.
점혈을 당한 이무명은 아무 표정 없이 캄캄한 복도의 끝을 바라봤다.
천천히 끌려가는 이무명이 힐끔 옆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설화가 무표정하게 걷고 있었다.
* * *
이무명이 끌려간 곳은 하남정가의 가주전이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바라봤다.
가주전에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앞에 둔 승냥이 떼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그들의 눈빛은 미묘하게 달랐다.
원하는 바가 모두 다른 것이다.
누군가는 금력을 원할 테고.
누군가는 권력을 원하는 것 같았다.
물론 어디에 줄을 설까를 고민하는 자도 보였다.
묘한 분위기에 이무명은 이를 악물었다.
‘대체 주군은 어디에 있는 거지?’
이무명은 쉴 틈 없이 사람들을 살폈다.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시작하려나 보네,”
“다들 정숙하시오.”
그들의 외침이 잦아들기도 전에 발소리가 들려왔다.
터벅터벅.
내공을 실은 듯 발소리에 맞춰 가주전이 울렸다.
그 발소리는 가주전의 태사의로 향했다. 그 소리의 주인공은 정휘지였다.
자신이 오늘의 주인공이라고 밝히는 듯한 요란한 등장이었다.
천천히 상석으로 오른 그는 비어 있는 가주의 태사의를 힐끔 바라봤다.
하지만, 그곳에 앉지는 않았다.
급할 것이 없다는 여유 있는 눈빛이었다.
태사의 옆에 선 정휘지는 날 선 표정으로 가주전 내부를 바라봤다.
가주전의 좌우로는 하남정가의 원로와 각주 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휘지와 시선이 마주친 원로와 각주 들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중 몇몇은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짓고 있다.
원로와 각주를 살피던 정휘지는 상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빈객으로 와 있는 곤륜파의 이진명과 점창파의 정창명이 무표정한 얼굴로 뭔가를 기다리듯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정휘지가 그들을 바라보자 상념에서 깨어난 이진명과 정창명이 작게 미소 지었다.
정휘지는 이번만큼은 날 선 표정을 풀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에게 예의를 표했다.
곤륜파의 이진명과 점창파의 정창명은 이곳에서 일어날 모든 일의 증인이 될 것이다.
또한 그들은 정휘지의 행동이 공정함을 정파의 모두에게 설파할 것이다.
일단 정휘지가 원하는 판이 마련된 상황이었다.
이제 하남정가의 세대교체라는 진수성찬이 바로 앞이었다.
물론 그 전에 맛보기 음식이 필요했다.
정휘지는 이제부터 팽한빈과 정인지라는 최고의 재료를 잘게 다질 터였다.
정휘지는 조심스럽게 태사의를 쓰다듬으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 모두가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휘지의 표정을 바라보던 이무명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휴…….”
어린 시절부터 몸담아 온 하남정가에 대한 환상이 모두 깨지는 날이었다.
그때 정휘지가 고개를 돌리더니 내공을 실어 외쳤다.
“대공자를 들여라!”
그의 지시를 받은 무사들이 가주전의 옆문을 열었다.
정휘지를 따르는 무사들이 누군가를 포박한 채 끌고 왔다.
제압당한 상태이지만, 그 사내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끌려온 사내가 정휘지 앞에 섰다.
사내와 정휘지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른다.
가주전에 있는 모든 이들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정휘지와 사내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사내였다.
그는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둘째야, 이게 무슨 일이더냐?”
사내는 정휘지의 형이자 하남정가의 소가주인 정인지였다.
그는 한 시진 전 하남정가로 돌아와 동생에게 하북팽가에서 보낸 청명환이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았었다.
정휘지는 그 소식을 전하며 정인지에게 암습을 날렸다.
마음을 탁 놓고 있던 정인지는 정휘지에게 힘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정인지의 노기 어린 질문에 정휘지는 아무런 표정 없이 말했다.
“그건 제가 물어보고 싶습니다. 형님, 대체 왜 그런 일을 벌이신 것입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하북팽가에서 가져온 청명환에는 독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덕분에 아버님의 상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대체 아버님이 어떻게 되었다는 말이냐?”
정인지는 자신의 상황도 잊은 듯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왜, 모른 척하십니까? 이미 팽가의 사 공자가 모든 사실을 토설했습니다.”
“팽가의 사 공자라고?”
정인지는 눈을 가늘게 뜨고 가주전의 내부를 둘러봤다.
아무리 봐도 가주전에 자신이 아는 하북팽가의 인물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하북팽가에 사 공자가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정인지였다.
그만큼 하북팽가에서 한빈의 존재는 미미했다.
하북성에서야 최고의 겁쟁이로 유명했지만, 그 오명이 하남까지 퍼질 까닭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인지는 가주의 치료에 필요한 영약을 구하기 위해 무당파와 화산파 그리고 소림사를 오갔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바람에 그간 강호에 떠도는 소문도 들을 수 없었다.
그때 정휘지가 손뼉을 쳤다.
짝짝!
그 소리에 맞춰 무사들이 뒤쪽에서 붉은 무복의 사내를 끌고 왔다.
무사들은 가주전의 중앙에 붉은 무복의 사내를 팽개쳤다.
무사들이 붉은 무복의 사내를 에워싸자 정휘지가 검지로 그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형님은 진정 저자를 모른다는 말씀입니까?”
그 모습에 놀란 정인지가 외쳤다.
“둘째야!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형님이 팽가의 사 공자와 모의를 해 놓고 모른 척하십니까? 가주 자리가 그토록 탐나셨단 말씀입니까?”
“대체 무슨…….”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정휘지는 천천히 이무명에게 걸어갔다.
이무명의 앞에 선 정휘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은 필요 없다. 팽한빈, 그대는 하남정가의 대공자 정인지와 공모한 사실을 인정하는가?”
내공이 담긴 쩌렁쩌렁한 외침에 모두는 눈도 껌뻑이지 않고 대답을 기다렸다.
이무명은 정휘지가 이렇게 인면수심의 인간일 줄은 몰랐었다.
정휘지는 자신의 은인들을 대놓고 무시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이무명을 죽을 위기에서 구해 주고 거둬 준 하남정가의 가주.
자신이 절정까지 오르는 데 지원해 준 대공자 정인지.
자신의 검을 알아준 한빈까지.
모두를 농락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무명은 자신의 상황도 잊은 채 외쳤다.
“네 이놈!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리 모함을 한다는 것이더냐? 대공자께서 너를 어떻게 돌봤더냐? 동생에게 영약이란 영약은 다 양보해서 하남제일검으로 만든 것이 대공자이거늘. 너는 어찌 그 은혜를 배신한다는 것이더냐?”
이무명의 외침에 원로와 각주들이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휘지는 묘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의 끝에 정휘지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그렇게 자백을 하는구나. 너는 분명 대공자와는 안면이 없을 터, 어찌 그렇게 우리 집안에 대해서 소상히 알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또한 증거가 아니더냐?”
정휘지의 묘한 언변에 이무명은 숨이 막혔다.
한마디로 자충수였다.
한빈을 연기해야 하는 그였지만, 잠시 이성을 잃고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다시 이무명이 입을 열려 할 때였다.
정휘지가 손을 뻗었다.
뱀처럼 이무명을 향해 날아오는 그의 검지.
픽!
이무명은 눈을 크게 떴다.
정휘지가 더는 말이 필요 없다는 듯, 이무명에게 점혈을 한 것이었다.
마혈을 제압당한 이무명은 눈만 껌뻑였다.
이무명을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며 피식 웃은 정휘지는 품속에서 서찰 하나를 꺼냈다.
정휘지의 손에 든 서찰에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그는 얼굴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이 서찰은 대공자와 팽가의 사 공자가 모의했다는 증거가 틀림없습니다. 저는 이곳에 자리하신 점창파의 정창명 대협께 이 문서의 진위를 감정받고자 합니다.”
말을 마친 정휘지는 조용히 정창명에게 걸어가 그의 앞에 서찰을 두었다.
서찰을 받은 정창명은 몇 번 쓱 읽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팽가의 사 공자와 하남정가의 대공자가 모의한 정황이 분명하군. 자네도 보게.”
정창명은 서찰을 옆에 있는 곤륜파의 이진명에게 쓱 내밀었다.
서찰을 살핀 이진명이 말을 이었다.
“이 필체는 대공자의 필체가 분명한 것 같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여기에는 청명환을 바꿔치기해서 하남정가 가주님을 해치겠다는 계획이 소상하게 적혀 있군.”
정창명과 이진명의 대화에 모두가 웅성대기 시작했다.
“뭐야? 진짜였어?”
“대공자가 왜 가주님을 해친다는 거지? 가만히 있어도 그 자리는 자신에게 넘어올 텐데.”
“아니지. 가주님이 얼마나 정정하신데, 자리를 물려줘?”
“그리고 곤륜과 점창의 빈객이 거짓말을 할 리 없잖아.”
대문파라는 곤륜과 점창의 고수가 나서서 증언하자 정휘지가 말한 것은 사실로 굳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대공자 정인지가 외쳤다.
“이놈! 피를 나눈 형제를 모함하는 것도 모자라 아버님을 해치다니…….”
정인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휘지가 나섰다.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형님.”
말을 마친 정휘지는 다시 손뼉을 쳤다.
동시에 정휘지가 불러온 의원이 한철 궤를 들고 들어왔다.
모두의 앞에 선 의원이 아무 말 없이 한철 궤를 열자 정휘지가 말했다.
“의원은 보여 주시오.”
정휘지가 손짓하자 의원이 한철 궤에 은침을 꽂았다가 뺐다.
그러고는 그 은침을 모두에게 보여 줬다.
모두의 시선은 조그마한 바늘로 모였다.
순간 원로와 각주 들이 다시 웅성대기 시작했다.
“검은색으로 변했군. 그렇다면…….”
“은침이 변한 걸 보면 독단이 들어 있던 것이 분명하군.”
“서찰에 독단이라……. 증거가 명확해.”
그들도 무인이라 그런지 작은 은침의 변화도 바로 알아챘다.
그들의 속삭임에 정인지의 눈이 커졌다.
꼼짝없이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정인지의 표정을 본 정휘지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죄인들을 단죄한다!”
말을 마친 정휘지가 검집을 들었다.
휙!
정휘지의 행동에 모두는 숨소리를 죽였다.
그때였다.
누군가 가주전의 옆문을 열고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가주님이! 가주님이!”
빛바랜 청색 의복을 입은 젊은 사내였다.
복장으로 봐서는 하남정가의 하인이 분명했다.
예상했던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한 정휘지가 짐짓 침통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아버님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청색 의복의 하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그 하인의 표정이 묘했다. 마치 정휘지를 깔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인 하인이 말을 이었다.
“어떻게 되셨을 것 같습니까?”
갑작스러운 하인의 물음에 정휘지의 눈썹이 꿈틀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