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사필귀정(事必歸正) (3)
정휘지의 앞으로 달려온 의원이 고개를 조아렸다.
“이것으로 한숨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 의원.”
“네, 가주님.”
”아버님을 잘 부탁하네. 청명환으로 아버님을 반드시 살려 주게.”
정휘지는 의원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모습만 봐서는 진짜 가주를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하남정가에서 오랫동안 지내 온 이무명은 그 모습이 가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휘지의 야심은 하남정가 사람이라면 호위 무사부터 하인까지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 말이다.
의원이 들어가고 일각이 지났을 때였다.
“어, 어어!”
안쪽에서 당황한 의원의 외침이 들려왔다.
숨 한 번 참을 시간이 지나자 의원이 달려 나왔다.
사색이 된 의원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가주님이 위험합니다!”
“뭐라? 무슨 일이더냐?”
“아, 아무래도 청명환에 독이 든 것 같습니다.”
그들의 대화에 이무명은 눈매를 좁혔다.
정휘지의 함정에 걸린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가져온 청명환은 가짜가 맞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화 부인이 준 진짜 청명환이 든 한철 궤는 한빈이 가지고 떠났었다.
이무명은 조용히 정휘지를 응시했다.
당황한 표정에 비해 입꼬리가 살짝 춤을 추고 있었다.
이무명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어떻게 청명환에 독이 들어 있다는 말입니까?”
“미안하네, 사 공자. 하남정가의 가칙을 따라 줘야겠네.”
정휘지가 손을 뻗었다.
그의 검지가 이무명의 어깨 쪽에 있는 견정혈을 눌렀다.
픽!
순간 이무명은 상체를 움직일 수 없었다.
마혈을 제압당한 것이다.
이무명의 옆에 있던 설화는 눈을 크게 뜨며 울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너무 놀라 울음도 안 나오는 아이의 모습이었다.
황당한 상황 속에서도 이무명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남들은 속겠지만, 설화의 모습은 분명 연기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뛰는 가슴을 멈출 수는 없었다.
어쨌든 함정에 빠진 것이기에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 정휘지가 외쳤다.
“용의자를 포박하라! 대신 정중히 모시도록.”
추상과 같은 명령에 가주의 처소를 지키던 호위 무사들이 튀어 왔다.
그들은 순식간에 이무명과 설화를 포박했다.
이무명은 꽁꽁 묶인 설화와 함께 하남정가의 지하에 있는 뇌옥으로 끌려갔다.
빠르게 뛰던 이무명의 심장이 안정된 것은 묘하게 결박을 당하고 나서였다.
정신이 없어서 확인을 못했었는데, 그를 결박한 것은 조호였다.
설화를 결박한 것은 심미호였고 말이다.
어찌 보면 마혈을 제압당한 것이 행운이었다.
마혈을 제압당하지 않았다면 분명 표정의 변화가 있었을 것이었다.
터벅터벅.
뇌옥의 복도를 걷다가 가장 끝 방에서 조호가 멈췄다.
그러고는 열쇠로 철창을 열었다.
뇌옥의 철창이 열리자 조호와 심미호는 이무명과 설화를 무지막지하게 밀어 넣었다.
털썩.
얼마나 세게 밀었는지 이무명과 설화는 뇌옥 바닥을 굴렀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정휘지의 수하가 말했다.
“허허, 아까 우리 공자님게서 살살 다루라고 했을 텐데.”
“죄인에게 대하는 예우치고는 살살 다룬 편이지요.”
심미호가 포권하며 답하자 정휘지의 수하가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역시 말귀를 잘 알아듣는 친구들이군. 며칠 안 남았으니 조금만 고생하라고. 평생 먹고살 돈을 만지게 해 줄 터이니.”
“존명!”
심미호가 과하게 허리를 꺾으며 포권했다.
누가 보면 하남정가에 간이라도 내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심미호와 조호는 이무명과 설화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사라졌다.
피도 눈물도 없는 심미호와 조호의 연기에 이무명은 또 한 번 놀랐다.
잠시 동안 저들의 행동이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했으니 말이다.
그때 설화가 이무명의 앞에 주변에 떨어진 나무 막대로 뭔가를 썼다.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글자로 대화를 나누자는 뜻 같았다.
스슥.
설화가 쓴 글자가 완성되었다.
-아저씨, 괜찮아요?
답을 하려던 이무명은 마혈과 아혈이 동시에 제압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무명이 멍하니 있자 설화가 기존 글씨를 지우고 다시 글씨를 썼다.
스슥.
-마혈은 풀어 드릴테니 눈치 보면서 움직이세요.
말을 마친 설화가 검지로 이무명의 혈도를 풀었다.
픽!
이무명은 그제야 움직일 수 있었다.
그때 이무명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점혈은 당하지 않았지만, 포박을 당했던 설화였다.
그런데 어떻게 글씨를 쓸 수 있던 거지?
고개를 돌려 보니 밧줄이 정갈하게 정리된 채 옆에 놓여 있었다.
거기에 한 가지 의문이 더해졌다.
정휘지는 상체만 점혈을 했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고급 수법.
그렇다면 설화의 경지는 최소 절정 최상급 이상이라는 이야기였다.
순간 이무명은 소름이 돋았다.
한빈에게 마음을 준 후 시한부로 천수장에 남아 있기로 했지만, 이렇게 괴물들이 득실거릴 줄은 몰랐었다.
문득 며칠 전에 한빈이 들려준, 한빈과 잔혈마도 사이에 있었던 사건이 떠올랐다.
이무명은 그게 사실이 아니라 생각했다.
제압을 했어도 혼자 한 일은 아니라 생각했다.
지난번 검을 맞대었을 때 한빈의 모든 실력을 알았다 생각했는데…….
‘그 안까지 들여다본 것이 아니었던가?’
이무명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같은 시각 하남정가의 접객실.
정휘지의 앞에는 두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하남정가의 빈객으로 와 있는 점창파와 곤륜파의 고수였다.
점창파의 고수는 정창명이었고 곤륜파의 고수는 이진명이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정휘지였다.
“지금 하남정가 내부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점창파의 정창명이 묻자 정휘지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청명환이 도착했습니다.”
“오호, 그렇다면 가주께서 병마를 떨치고 일어나시겠군요.”
“저도 그런 희망을 가졌습니다만, 말 못 할 일이 일어났습니다.”
“말 못 할 일이라…….”
“두 분께 말씀드리지 못할 일은 없지요. 청명환인 줄 알고 먹였던 영단이 사실은 독이었습니다. 덕분에 아버님은 지금 그나마 붙잡고 있던 의식이 끊긴 상태고요.”
“허허.”
“문제는 사후 처리입니다. 청명환을 빼돌리고 대신 독약을 넣은 일을 주도한 것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입니다.”
“흠.”
점창파의 정창명이 수염을 매만졌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면 얼마 전 봤던 사악한 놈이었다.
배분으로 누르려다가 도리어 당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정창명이 강호에서 구른 시간만 해도 몇십 년이었다.
지금 상황을 모를 리 없었다.
수염을 매만지던 정창명의 손이 멈추고 그의 입이 열렸다.
“어떻게 해 주면 좋겠소?”
“아무래도 이 일에는 저희 형님이 관여된 것 같습니다.”
“허허, 대공자가요?”
정창명은 모른 척 다시 수염을 매만졌다.
그 모습에 정휘지가 말을 이었다.
“저희 아버님께서 깨어나시면 후계 구도를 다시 짠다 하셨습니다. 그게 두려웠던 것이지요.”
“…….”
정창명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그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곤륜의 이진명이 대신 말했다.
“그럼 저희가 정의맹을 대표해서 하남정가 재판의 증인이 되면 되는지요?”
“네, 맞습니다. 아직은 이 일이 새어 나가면 안 됩니다. 대환단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밖에 나간 저희 형님이 돌아오기까지는 말입니다. 며칠 뒤에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오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때 나서 주시면 됩니다.”
“네, 좋습니다. 그런데, 집안 싸움에 저희가 끼어들 명분이 조금…….”
이진명이 말끝을 흐리자 정휘자가 상자 두 개를 내밀었다.
스윽.
납작한 상자 두 개가 정창명과 이진명의 앞에 각각 놓였다.
상자의 크기에 정창명은 살짝 실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이진명도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들의 모습에 씩 웃은 정휘지가 살짝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일어났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이며 이진명과 정창명의 앞에 놓은 상자를 잡았다.
가볍게 열자 상자 안에 든 황금이 모습을 드러냈다.
점창파의 원로 정창명이 옅은 탄성을 토했다.
“허허.”
곤륜의 일대제자 이진명도 마찬가지였다.
“은이 아니라 황금이라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진명은 잽싸게 상자를 끌어당겨 자신의 무릎에 놓았다.
* * *
이틀 후 하남정가의 뇌옥.
이무명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심미호와 조호를 보고 안심했지만, 묘하게 불안감이 커져 갔다.
문제는 심미호와 조호가 그 후로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밖에서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옆을 힐끔 보니 설화는 눈을 감고 좌선을 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운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덜컹!
그 소리에 설화는 재빨리 좌선을 풀고 옆에 정리했던 밧줄로 자신의 몸을 포박했다.
아무리 봐도 신기에 가까운 솜씨.
저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저잣거리의 공연 패거리들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무명은 아무리 생각해도 설화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화전민 출신의 저잣거리 공연단?
점점 장자명을 닮아 가는 이무명이었다.
그때였다.
정휘지의 수하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뇌옥의 철창 앞에 섰다.
“둘 다 어서 일어서라!”
그의 행동에 이무명이 눈매를 좁혔다.
상대는 자신을 하북팽가의 사 공자로 알고 있을 텐데 이렇게 하대한다?
그것은 반드시 죽이겠다는 신호였다.
이무명이 쏘아보자 정휘지의 수하가 말했다.
“내가 선물로 충고 하나만 하지.”
“…….”
“이제 가문의 재판이 열릴 것이야. 그때 무조건 우리 이 공자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라. 그렇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야.”
“…….”
이무명이 아무 말 없이 바라보자 정휘지의 수하가 말했다.
“참, 아혈이 아직 안 풀렸지. 어쨌든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때였다.
설화가 말했다.
“저도 살려 주시는 거예요, 아저씨?”
“그래, 너는 점혈을 안 했으니 말이 통하겠구나. 너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네라고 대답하면 몸성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잠시 뒤에 다시 오마.”
정휘지의 수하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뇌옥을 빠져나갔다.
그가 빠져나가자 설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휴, 이 생활도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그죠, 아저씨.”
웃는 설화에 비해 이무명의 얼굴을 돌처럼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구나. 일이 이 정도 진행됐으면 밖에서 무슨 소식이라도 들려야 할 텐데, 아직도 정휘지와 그의 수하들이 설치는 것을 보니 조금 불안하구나.”
“아저씨도 참, 공자님 못 믿으세요?”
“믿기야 하지. 그런데 내가 믿는 공자님마저 안 보이니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구나. 사실 하남정가의 가주님도 걱정되고.”
“공자님이 먼저 출발하셨으니 모두 해결하셨을 거예요.”
설화는 웃는 얼굴로 이무명을 바라봤다.
이무명은 설화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한빈을 믿는다지만, 조금 있으면 목이 달아날 판인데 어찌 이리 태평하다는 말인가?
지금 상황을 보면 가주도 상태가 악화된 것이 분명했다.
하남정가의 대공자까지 자리를 비운 상태.
과연 이 난국을 뒤집을 수 있을까?
이무명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했다.
그때였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터벅터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