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사필귀정(事必歸正) (1)
모두의 시선이 한빈에게 몰린 상황.
한빈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그런 걸 두고 사소한 오해라는 거지. 뭐,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곳이 바로 강호고 말이야. 그러니 다들 신경 쓰지 마.”
한빈은 손을 내저은 채 침상으로 걸어가 벌러덩 누웠다.
그때 설화가 나지막이 말했다.
“역시 맞은 사람은 주화입마를 입어도 때린 사람은 발 뻗고 잘 잔다는 속담이 맞네요.”
“설화야, 뭔가 바뀐 것 같은데?”
장자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묻자 설화가 당과 꼬치를 가리켰다.
“아저씨, 저거!”
그 모습에 장자명이 한숨을 쉬었다.
“휴……. 그래. 먹는 게 남는 거다, 설화야.”
장자명은 품 안에 손을 넣어 전낭을 만졌다.
무보수로 일하는 그가 어떻게 돈이 생겼을까?
이것은 이무명과 설화가 몰래 돈을 챙겨 줬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무명과 설화는 장자명에게는 은인이었다.
장자명을 조용히 객실을 나서며 생각했다.
이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말이다.
장자명이 제일 걱정하는 것이 가짜 청명환이었다.
한빈이 퍼뜨렸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만든 것은 자신이니 말이다.
그런데 말을 듣고 보니 잔혈마도와의 결전 이후 청명환은 그들의 관심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가짜 영단이 버려질 것을 생각하지 씁쓸했지만, 이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생각했다.
* * *
사파 중에서도 방귀깨나 뀐다는 문파인 백사문은 오늘따라 정신이 없었다.
이틀 만에 영단산에서 벌어졌던 전설적인 대결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중 적룡대협에 대한 이야기는 점점 부풀려져, 적룡대협은 단순한 무인이 아닌 절세고수가 되어 버렸다.
영단산을 반쪽 내며 잔혈마도를 물리쳤다느니.
영단산의 천상 위에서 살던 신선이 잠시 내려와 사파의 무사를 구해 줬다느니.
영단산에 버려진 아이가 영단산에서 자란 약초를 먹고 혼자서 절세고수로 성장했다느니.
사파에서 키운 비밀 병기라느니 하는 갖가지 소문이 저잣거리에 떠돌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신빙성이 있는 것은 사파에서 키운 비밀 병기라는 소문이었다.
절세고수가 어찌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던가?
고수는 기연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 강호의 정설.
하지만, 문제는 누가 키웠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진세미의 아버지인 백사문주 진사명은 먼저 돌아온 문도들에게 물었다.
“내가 이해가 안 되는 점이 하나 있다.”
“말씀하십시오.”
부상 때문에 먼저 돌아온 사파 무사가 포권했다.
그 모습에 사파 무사의 상태를 살핀 진사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이었다.
“너희가 당한 상처는 적룡대협이 입힌 것이라 들었다. 맞느냐?”
“맞습니다.”
“그 후 적룡대협이란 자는 잔혈마도의 손에 너희들을 구했다고도 했다. 맞느냐?”
“네 맞습니다.”
“흠, 그렇다면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을 너희도 느끼겠지.”
백사문주 진사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수하들을 바라봤다.
진사명은 아직 적룡대협의 정체에 대한 의구심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나타난 사파의 영웅이라?
만약에 현장에서 그를 지켜봤다면 진사명도 흥분했을 수도 있겠지만, 상황을 듣다 보면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때 수하 하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적룡대협이 우리를 공격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이유라? 소상히 말해 보아라.”
“그때 저희는 청명환에 미쳐 있었습니다. 적룡대협이 저희를 쓰러뜨리지 않았다면 저희는 분명히 날뛰다가 다른 문파의 손에 죽든지, 아니면 잔혈마도의 칼에 목이 달아났을 겁니다. 이것은 다른 사파도 마찬가지입니다.”
“음.”
진사명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수하의 눈빛을 봤다.
그의 눈빛에는 한 치의 두려움도 없었다.
저런 눈빛을 한 자가 거짓을 고할 리는 없는 일이었다.
긴 침음의 끝에 진사명이 말을 이었다.
“세미는 아직 수색 중이라고 했지?”
그가 말한 세미는 경탄강 하류에서 적룡대협을 찾고 있는 진세미였다.
무사가 고개를 숙였다.
“네, 그렇습니다. 아가씨는 현장에 남아 있는 사파를 규합해서 적룡대협을 찾는 중입니다.”
그의 말에 진사명을 고개를 돌려 총관에게 말했다.
“남는 무사를 모두 세미에게 보내시오.”
“네, 알겠습니다.”
진사명의 눈빛이 깊어졌다.
자신이 들은 것이 모두 맞다면, 이것은 기회였다.
적룡대협이란 영웅을 찾는다면 백사문이 사파의 패권을 쥘 수 있었다.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적룡대협이란 걸출한 인물의 출현은 사파를 하나로 규합할 기회를 잡은 것이었다.
살았든 죽었든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 * *
다음 날 아침, 경탄강 하류.
백사문의 진세미는 사파 무사들을 이끌고 이틀 동안 경탄강 주변을 수색 중이었다.
이쯤 되면 적룡대협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진세미가 그것을 인정하기 싫어 한다는 점이었다.
진세미뿐만이 아니었다.
사파 무사들은 삼 일 밤낮을 꼬박 새우는 강행군에도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어떻게든 적룡대협의 시체라도 찾겠다는 일념으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강가를 수색하는 중이었다.
이제는 한계 상황이 왔다.
말이 삼 일 밤낮이지 사파의 무인 중 몇이 쓰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진세미와 사파 무사들이 고민하고 있을 때 멀리서 배가 한 척 보였다.
점으로 보였던 배가 가까워지자 진세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상류에는 폭포가 있고 지금 이곳은 수심이 낮아 배가 들어오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배.
진세미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찾는 적룡대협이 저 배에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진세미가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쿵!
배가 암초에 걸리는 소리가 났다.
진세미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곳은 수심이 낮아 작은 나룻배도 가끔은 암초에 걸리기 때문이었다.
순간 위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왜 안 가는 거야?”
여인의 목소리였다. 이어서 울먹이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저, 이쪽은 뱃길이 아니라고 몇 번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너희가 육지 길을 모른다고 해서 뱃길로 온 거잖아.”
“소저, 그게 우리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어쭈, 이것들이? 나를 습격해 놓고 모른 척하려고 해?”
“그건 그분이 이전에 용서한 일…….”
“배 아래에서 쓰러져 있던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사 공자를 찾아내!”
여인이 호통쳤다.
그들의 상하 관계는 누가 봐도 분명했다.
그 무리의 대장은 여인이었고 사내들은 하인처럼 보였다.
물론 여인의 정체는 무소율이었다.
사실 무소율의 존재는 수적들에게 재앙이었다.
배와 배 밑에 쌓인 재물과 곡식을 팔아 새 출발을 하려고 꿈에 부풀어 있을 때 무소율이 깨어난 것이었다.
양악군이 없는 수적 무리는 평범한 도적 떼에 가까웠다.
평범한 도적의 무리가 무소율을 이긴다?
그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성난 무소율은 수적에게 분풀이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무소율이 원하는 바를 들어줘야 했다.
지금도 무소율은 수적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사실 무소율도 이들에게 화풀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배 아래 쓰러져 있는 자신을 잊은 채 떠난 한빈이 미웠다.
얼마나 존재감이 없었으면 자신을 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한빈은 한빈이라고 치고 악비광은 어떠한가?
강아지처럼 졸졸 쫓아다니며 구애하던 악비광마저 자신을 잊었다고?
생각해 보니 천리표국의 표사들도 얄미웠다.
사실 제일 얄미운 것은 설화라는 시녀였다.
그 일행 중 가장 철저한 것이 설화였다. 그런데 설화가 자신을 잊었다라?
잊었다기 보다는 모른 척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한창 성을 내고 있는데, 강가에 모여 있는 수많은 무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충 봐도 적의는 없어 보였기에 무소율은 배에서 뛰어내렸다.
팍!
강가의 자갈 밭으로 뛰어내린 무소율은 천천히 무사들에게 걸어갔다.
저벅저벅.
자갈 긁히는 소리를 내며 혼자 걸어가는 무소율을 경계하는 사람은 의외로 없었다.
점점 가까워지자 맨 앞에 있는 여인이 보였다.
그 여인의 표정을 본 무소율은 고개를 갸웃했다.
침울한 분위기가 표정에서 읽혔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여인은 그리고 뭔가를 물어볼 것이 있는 듯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무소율이 그녀의 앞에 가 먼저 포권했다.
“저는 무씨검가의 무소율이라고 해요.”
“아, 무씨검가의 무 소저시군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백사문의 진세미라고 해요.”
“아, 진 소저의 말씀도 많이 들었습니다.”
무소율도 같이 맞받았다. 그녀의 말은 반은 진실이었다.
정파 사이에서 사파 무사들의 좋은 이야기가 나올 리는 없지만, 백사문의 진세미라면 들어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서로 인사를 건넨 두 여인은 잠시 머뭇거렸다.
침묵의 시간이 적당히 흐르고 나서 입을 연 것은 진세미였다.
“저, 묻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배를 타고 올라오시면서 혹시 붉은 옷의 무사를 보시지 않았는지요?”
“붉은 옷이라?”
무소율은 눈매를 좁혔다.
붉은 옷이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한빈이었기 때문이다.
무소율의 표정을 본 진세미가 물었다.
“혹시 보셨나요? 강에 떠 있는 형체라도 보셨으면 제발…….”
그녀의 말이 끝나기 전에 무소율이 되물었다.
“붉은 옷의 무사를 강에서 왜 찾으시는 거죠?”
“저희를 구해 주시고 강에 빠졌어요. 그래서 찾고 있어요. 저희는 그분을 적룡대협이라고 부르고 있죠.”
“그 붉은 옷의 무사가 혹시 하북팽가의 사 공자를 말씀하시는…….”
“아니에요. 하북팽가의 사 공자는 영단산을 내려간 지 오래예요. 저희가 알기로는 무사히 잘 내려갔어요.”
“휴…….”
무소율이 안도의 한숨을 내뱉자 진세미가 물었다.
“소저께서 찾으시는 분이 하북팽가의 사 공자신가요?”
“네, 그 일행을 찾고 있어요. 그런데 진 소저는 적룡대협이란 분을 아직도 못 찾으셨단 거죠?”
“네, 분명 장방 폭포 밑으로 떨어지셨다는 건 확인했는데…….”
진세미가 멀리 있는 폭포를 가리키자 무소율이 고개를 돌렸다.
생각보다 높이가 있는 폭포였다.
저기에서 떨어졌다면?
그것도 부상을 입은 상태로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었다.
무소율의 표정을 본 진세미가 말했다.
“화경의 잔혈마도를 물리치신 분이에요. 절대 죽었을 리가 없어요.”
“헉, 마교라니요?”
“저희는 마교와 일전을 펼쳤어요. 정확히는 저희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을 때 적룡대협이 구해 주신 거지만요.”
“마교가 하남까지 왔다니 그게 무슨 일입니까?”
“그건 저도 몰라요. 지금쯤이면 사실이 전달됐을 테니, 사도련과 정의맹의 수뇌부가 움직이겠죠.”
진세미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파나 사파나 모두 중원의 문파.
평상시에는 명분과 이익에 따라 으르렁대지만, 마교가 나타났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세외 쪽인 천산 산맥에 있는 마교는 강호인에게는 중원의 문파가 아니었다.
마교가 나타나면 각을 세우던 정파와 사파도 어느 정도 뜻을 모으기 마련.
물론 마교가 중원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이들의 오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