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사소한 오해 (6)
이무명도 넋이 나가기는 마찬가지였다.
개방의 하남 분타주가 여기에 왜 온다는 말이던가?
광개라면 개방에서 방주로 키운다는 무공의 천재였다.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한빈과 허물이 없다는 것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만나 온 사이 같았다.
물론 그것은 이무명의 오해였다.
한빈은 전생에 인연으로 광개와 편히 지내는 것이고 광개는 그런 한빈에게 말려든 것이었다.
한편 광개 역시 이무명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넋이 나간 듯 추리를 이어 나갔다.
‘쌍둥이였어. 그래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할 수 있었던 것이고. 하나는 하북팽가의 사 공자고 하나는 사파의 영웅 적룡대협이고…….’
이것은 오해였다.
물론 광개는 그 오해를 입 밖으로 뱉지 않았다.
개방이 어떤 단체던가?
중원에 흩어진 십만 거지들이 눈과 귀가 되어 정보에서라면 제일가는 방파였다.
광개는 정보는 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추리를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자칫 문밖에서 듣는 이가 있을 수도 있었다.
이것은 돈을 남들과 나누는 것과 똑같은 행동이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넋이 나간 듯 입 모양으로 뭐라 중얼거리는 광개의 뒤통수를 한빈이 가볍게 때렸다.
팍!
정신을 차린 광개가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왜 때리고 그래?”
“몰라서 물어? 왜 남의 집 족보를 꼬고 그래?”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쌍둥이가 아니라는 말이야?”
그때 옆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휴…….”
광개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열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한숨을 쉬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설화였다. 광개의 눈은 다시 커졌다.
자신이 흥분을 했다고 해도 여자아이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저 소녀가 고수?
하지만, 고수의 풍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일 뿐이었다.
광개는 자신이 기척을 느끼지 못했기에 설화가 무인이 아니라 생각했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광개의 시선에도 설화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저는 설화라고 해요.”
“아.”
“그리고 할 말이 있어요, 거지 아저씨.”
“어? 거지라고?”
광개가 당황했다.
개방이니 거지는 맞다. 그런데 조그만 아이가 대놓고 거지라고 하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광개는 힐끔 한빈을 바라봤다.
한빈과의 첫 만남 때 느꼈던 억울한 감정이 느껴졌다. 그때 한빈도 저렇게 얄밉게 말했었다.
‘혹시 친척?’
광개는 다시 시선을 설화에게 돌렸다.
설화는 올망졸망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저렇게 귀여운 아이가 사파도 찜 쪄 먹을 한빈 같은 놈과 친척일 리는 없었다.
게다가 딱 봐도 시녀가 아니던가?
거기에 더해 설화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말했을 리는 없다 생각했다.
광개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개방의 제자니 거지가 맞긴 맞지. 괜찮으니 말해 봐.”
“감사해요, 거지 아저씨. 우리 공자님하고 이 호위는 한눈에 봐도 다른데 착각을 하시는 게 이상해서요. 이 부분도 그렇고 저쪽도 그렇고…….”
설화는 둘 사이의 다른 점을 가리켰다.
하지만, 광개의 고개는 점점 기울어졌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던 것이다.
이건 마치 요즘 북경에서 유행한다던 숨은그림찾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때 설화가 말을 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는…….”
그때 한빈이 끼어들었다.
“내가 더 잘생겼다는 점이지. 설화야, 간단하게 설명하면 될 것을 왜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해?”
그 말에 모두가 입을 벌렸다.
그때 한빈이 다시 광개를 바라봤다.
“그건 그렇고 부탁한 일은 잘 마쳤어?”
“그건 내가 물어보려고 하던 거다.”
“뭐가 궁금한데?”
“혹시 적룡대협이라 자가 불리는 자가 진짜 너냐?”
이번에는 방 안의 모든 사람이 눈을 크게 떴다.
주변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빈이 광개를 바라봤다.
“음.”
한빈은 팔짱을 끼고 잔혈마도와의 결전을 떠올렸다.
그때 사파 무사들의 함성도 들렸다.
분명 한빈을 적룡대협이라 칭하며 응원했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광개의 태도였다.
한빈은 광개에게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말했었다.
긴 침음의 끝에 한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냐? 혹시 사파 놈들이 죽자 사자 덤비더냐?”
“그게 아니라 반대다.”
“반대라고?”
한빈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광개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기 시작했다.
“하하!”
“왜 그렇게 웃어?”
“갑자기 황당한 장면이 생각나서.”
“무슨 장면?”
“네가 말한 대로 얼마 안 지나 사파 무리와 만났어.”
“그래서, 내가 말한 대로 전한 거지?”
“그래, 붉은 옷을 입은 자가 폭포 밑으로 떠내려갔다고 하니 사파 놈들이 대성통곡을 하더라. 무슨 사파의 영웅이라나? 사도련주가 죽어도 그렇게 슬피 울지는 않을 거다. 대체 무슨 일이냐?”
“뭐, 내가 좀 도와주기는 했지.”
“그, 그럼 화경의 고수랑 붙은 게 사실이냐? 그럼 적룡대협이 너란 얘기야? 여기 있는 이 양반이 아니고?”
광개가 살짝 흥분해서 질문을 쏟아 내자 이무명이 나섰다.
“우리는 영단산에서 내려와 여기에 묵은 지 한참 지났습니다.”
“허허.”
광개는 허탈하게 웃으며 한빈을 바라봤다.
자신의 추리가 무참히 깨진 것이다.
긴 웃음의 끝에 광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는 천지신명께 맹세한 친구가 맞지?”
“그럼, 당연하지.”
“친구, 그럼 솔직하게 얘기해 주는 게 어때?”
“일단…….”
한빈이 말끝을 흐리며 설화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모습에 놀란 장자명은 눈을 크게 떴다.
어디선가 많이 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설화는 구석에서 보따리 하나를 들고 왔다.
장자명은 오는 길에 설화가 지필묵을 사길래 왜 그러나 했었다.
설화는 반듯하게 한지를 펼친 후 미리 준비한 먹물을 그릇에 쏟았다.
설화에게 붓을 건네받은 한빈은 지체 없이 문장을 써내려 갔다.
장자명은 자신도 모르게 천장을 올려다봤다.
분명 처음에는 또 하나의 노예가 탄생하는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장자명은 광개가 저 문서에 서명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장자명은 자신의 모순된 마음이 이해가 안 되었다.
그것도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던 장자명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장자명은 동료가 늘어난다는 점에서 묘하게 기분이 좋았던 것이었다.
휙! 휙!
일필휘지로 내용을 써내려 간 한빈이 호호 불어 먹물을 말린 다음 붓을 광개에서 건넸다.
붓을 건네 받은 광개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걸 왜 나한테 줘?”
“서명하라고.”
“무슨 서명을 해?”
“생각해 봐, 우린 동업자라고 했지?”
“그렇지.”
“내 부탁을 들어주면 그 대가를 톡톡히 쳐준다고도 했고?”
“당연하지.”
“그런데, 넌 뭘 믿고 내 부탁을 들어준다는 거지?”
“그야, 네가 하북팽가의 사 공자니…….”
“그러니 하는 말이야. 혹시 내가 중간에라도 잘못되면?”
“그야 하북팽가에서…….”
“그래, 하북팽가에서 뭘 믿고 너한테 수고비를 주지?”
“아.”
광개는 그제야 입을 떡 벌렸다.
천지신명께 약속한 사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둘 사이의 일.
한빈이 빠지고 나면 약속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광개가 긴 탄성의 끝에 물었다.
“혹시 입 씻으려고?”
“아니, 약속을 지키려고 문서로 남겨 놓는 거다.”
“오, 역시 하북팽가의 직계는 다르군. 고맙다.”
“그러니 여기 서명하면 돼.”
“알았다, 여기 서명하면 되는 거지? 그런데 비밀 유지 조항은 뭐지?”
“그것도 어차피 천지신명께 맹세한 거잖아. 우리가 얘기한 건 다 적어 넣었다.”
“그래, 고맙다.”
광개는 의심 없이 똑같은 내용이 써진 두 장에 각각 서명했다.
그 모습에 설화는 혀를 찼다.
비밀을 어겼을 경우 위약금이 무려 백 배였던 것이다.
광개의 서명이 끝나자 한빈은 모두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모두는 한빈이 화경의 고수를 꺾었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그것을 믿은 것은 오직 장자명뿐이었다.
가짜 청명환 두 알이면 아마 혈맥이 단단히 꼬였을 것이었다.
가짜 청명환에 넣은 것은 평범한 독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독이라고 하기보다 영단에 가까웠다.
천수장에서 고생고생하면서 깨우친 음양의 이치.
사람의 몸을 지탱하고 있는 음양의 조화를 무너뜨려 주화입마에 들게 하는 약이었다.
가짜 청명환을 복용한 자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게 서서히 무너져 갈 것이다.
장자명은 그것이 한빈의 무서운 점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백독곡의 백독문과 사천의 당문은 독에서라면 중원에서 두 손가락 안에 드는 문파와 가문이었다.
그런데, 그 두 곳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불특정 다수에게 독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전쟁 중이라면 다르겠지만,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목표한 대상에게만 독을 쓰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하지만, 한빈은 누군지 모를 사람에게 가짜 청명환을 푼 것이다.
이것에 대해 장자명이 물어봤을 때 한빈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 물건을 홈쳐 가는 놈이 적이 아니면 뭐겠어? 장 의원은 목에 칼을 들이대는 놈을 그냥 둘 거야?’
그 말에 장자명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교의 고수가 가짜 청명환을 먹었다 하니 그 상황이 예상이 된 것이었다.
아마도 잔혈마도는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고 가짜 청명환 때문에 주화입마에 든 상태에서 당했으리라.
과연 한빈은 이것을 예상하고 준비한 것일까?
장자명은 멍한 눈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물론 나머지 사람도 멍하게 한빈을 바라보는 것은 똑같았다.
항상 평정심을 잃지 않던 설화도 이번에는 눈빛이 흔들렸다.
마교의 잔혈마도라?
그는 흑천의 주인이라도 어찌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한빈이 그자를 꺾었다고?
역시 한빈에게는 남모를 비밀이 있음이 분명했다.
그 비밀을 안다면 중원 제일의 살수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 생각했다.
물론 옆에 있는 이무명의 눈빛도 흔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빈은 모두의 눈빛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일단 내가 마교의 고수를 제압했다는 것은 비밀로 한다.”
“네, 공자님.”
설화가 답하고 뒤를 이어 이무명이 포권했다.
그의 태도는 어느 때보다 각이 잡혀 있었다.
“네, 주군.”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던 중 광개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네가 화경의 고수를 제압했다 치자. 그리고 사파 놈들이 자신을 구해 준 줄 착각하고 너를 적룡대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도 그렇다고 쳐.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다.”
“말해 봐, 친구.”
“네가 죽었다니 목 놓아 울부짖던 게 사파 놈들이야.”
“그런데?”
“널 죽이려고 찾던 게 아니라, 네가 걱정돼서 추격하던 것 같은데…….”
“그게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렇게 애타게 널 찾는 사람한테 처음에는 왜 칼침을 놓은 거냐?”
광개의 질문에 여기저기서 헛숨이 터졌다.
“헉! 공자님!”
설화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자 장자명도 물었다.
“아무리 사파라 하지만, 어찌 보면 아군인데 왜 그러셨습니까? 사 공자.”
“주군, 대체 왜…….”
이무명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