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사소한 오해 (4)
“그런데 갈림길이 왜?”
광개가 묻자 한빈이 씩 웃으며 답했다.
“우리 여기서 헤어지자.”
“왜 그래?”
“여기가 흩어지기에 제일 좋은 장소 같다.”
“그럼 돈은 어디서 받아야 하는데?”
광개의 표정은 심각했다.
그 모습에 한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며칠 뒤에 하남정가로 와.”
“그때 없으면?”
“만약에 내가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기서 기다리고, 내가 떠났다고 하면 하북팽가로 찾아오면 된다. 하북팽가로 찾아오면 여비까지 챙겨 주지.”
“고맙다, 친구!”
광개는 한빈에게 허리를 숙이며 포권했다.
누가 봐도 친구가 아닌 고객을 대하는 자세.
한빈이 겨우 웃음을 참았다.
한빈은 재빨리 잎사귀가 무성한 나뭇가지를 하나 뜯어내 발자국을 털며 흔적을 없앴다.
그 모습을 본 광개가 혀를 찼다.
“하는 짓을 보면 늙은 생강 느낌이 펄펄 나는 것 같은데.”
한빈은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잘 부탁해.”
“그래, 나중에 보자.”
동시에 귓가에 바람 소리가 들렸다.
사사삭.
고개를 들자 광개는 적당한 흔적을 남기고 사라졌다.
* * *
광개와의 약속과는 달리 한빈은 반대쪽 갈림길로 가지 않았다.
사파의 수색대라면 그리 만만히 볼 존재가 아니었다.
흔적이 없다고 해도 인원 중 일부는 다른 방향으로 보낼 것이 분명했다.
한빈은 기척을 숨기고 수풀 속으로 숨었다.
멀리 있던 횃불이 점점 가까워졌다.
예상대로 대규모의 병력이었다.
그들의 병기는 다양했다.
어떤 이는 검을.
어떤 이는 도를.
어떤 이는 창을 들고 있었다.
모두의 어깨에는 사도련 소속임을 나타내는 뱀 무늬가 선명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빈은 혀를 찼다.
자신을 잡겠다고 복면도 벗어 던지고 하나로 뭉친 것이 분명했다.
갈림길이 나오자 그들은 발길을 멈췄다.
몇몇이 모이는 것으로 봐 조장급이 추격 경로에 관해 상의하는 모양이다.
추격 경로에 관해 결정이 났는지 병력 대부분은 광개가 사라진 방향으로 이동했다.
물론 사분지 일은 예상대로 다른 길로 흔적을 추적했다.
잠시 후.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한빈은 샛길로 산을 거슬러 올라갔다.
한빈이 최대한 기척을 숨기고 샛길로 걷고 있을 때였다.
빠득.
누군가 나뭇가지 밟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개 짖는 소리도 들렸다.
컹컹.
그 소리는 적막한 숲을 깨웠다.
잠들었던 새들도 날아올랐다.
한빈은 재빨리 기척을 숨겼다.
* * *
같은 시각, 광개는 사파의 무리와 마주쳤다.
가장 앞서서 흔적을 찾던 여자 무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우리는 사도련 소속으로 누군가를 찾고 있습니다. 흔적이 보여 찾아왔는데 댁이 있군요.”
“나는 개방의 광개라 하오.”
“저는 백사문의 진세미예요. 개방의 광개라면 혹시 하남 분타주 아니신가요?”
“그렇소, 하남의 분타주 광개가 바로 나요!”
광개를 엄지를 들어 자신의 가슴팍을 찍어 가며 자신 있게 답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왜 흔적을 남기신 거죠?”
“내가 흔적을 남기든 안 남기든 그게 중요하오?”
“물론 중요하지는 않죠. 그런데 저희가 찾는 인물이 중요한 인물이라서 그러죠.”
“혹시 붉은 옷을 입은 인물이요?”
“헉.”
진세미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가를 반복하는 그녀의 얼굴에 광개를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혹시 그자와 무슨 관계요?”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표정이 아무 관계도 아닌 게 아닌데…….”
광개가 말끝을 흐리자 진세미가 앞으로 나왔다.
“그분의 차림새를 아는 것을 보니, 본 것이 분명하군요. 저희 사파와 척질 생각이 없으시다면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봤긴 봤소.”
“그럼 어디로 갔는지 말씀해 주세요.”
진세미는 정중하게 다시 포권했다.
그 모습에 광개는 의아함을 느꼈다.
한빈의 말을 들어 보면 원수지간이 분명한데, 이들이 한빈을 칭하는 것이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사파의 무인들이 정파의 인물을 보고 그분이라 칭하는 사람은 각 파의 장문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혼란스러워진 광개는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그 모습에 진세미가 다급하게 물었다.
“그분은 어찌 된 거죠? 제발 말씀해 주세요, 광개 소협.”
이제는 소협이란 호칭까지 나왔다.
그때 광개는 번뜩 정신이 들었다. 상대가 사파라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멀쩡한 사람 코를 베어 가는 게 사파가 아니던가?
광개는 한빈과의 약속을 떠올리고 미리 정한 이야기를 풀어놓기로 결심했다.
“내가 그 사람을 본 것은 경탄강을 지나가면서입니다.”
“경탄강이라고요?”
진세미가 눈을 크게 떴다.
암초에 걸리지 않았다면 강물에 빠졌을 테고 그 강이 바로 경탄강이었다.
그렇다면 광개의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컸다.
진세미가 침을 꿀꺽 삼킬 때 광개가 말을 이었다.
“그때 허우적대는 사람을 보았고. 그 사내가 분명 붉은 옷을 입고 있었소.”
“어떻게 됐나요? 구해 주신 거죠?”
“아니오. 내가 노를 저어 갔을 때는 이미 폭포 밑으로 떨어진 후였소. 나도 폭포 때문에 더는 접근하지 못했소. 아시다시피 경탄강 하류의 폭포는 꽤 높지 않소. 그곳에서 떨어졌으면…….”
광개는 말을 아꼈다.
순간 진세미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하늘을 보며 외쳤다.
“진룡대협!”
그 모습에 광개의 눈이 커졌다.
‘팽한빈, 너는 분명히 원수라 하지 않았더냐? 그런데 저게 원수의 표정이더냐? 제길, 여자를 꼬셔 놓고 튄 건 아니겠지? 이런 스벌, 세상은 불공평하구나. 불공평해!’
광개가 속으로 욕설을 늘어놓을 때였다.
뒤쪽에 있는 사파 무사들이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털썩! 털썩!
한밤중에 똑같은 동작을 취하는 그들의 모습은 경건해 보였다.
문제는 그들이 사파인이라는 점이었다.
광개는 그것이 위협으로 느껴졌다.
“대체 왜들 이러는 것입니까?”
광개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사파인들이 병장기를 치켜들며 하늘을 향해 외쳤다.
“적룡대협!”
“적룡대협! 아니 됩니다!”
광개는 또 한 번 한숨을 삼켜야 했다.
저것은 사도련주를 향해서도 행하지 않는 예였다.
‘팽한빈, 네 정체는 과연 무엇이더냐?’
이쯤 되자 광개의 머릿속에 한 가지 불안감이 떠올랐다.
그것은 돈이라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확실치도 않은 신분에, 사파인에게 추앙받는 자가 어찌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아!”
이번에는 광개가 긴 탄성을 흘렸다.
하지만, 그의 탄성은 사파 무인들의 탄성에 이내 묻혔다.
“아! 적룡대협!”
그때 진세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에게 외쳤다.
“화경의 고수를 물리친 적룡대협입니다! 분명 살아 계실 겁니다. 폭포 아래를 수색하죠.”
“네, 그래요!”
뒤쪽에 있던 여자 무사가 다급하게 맞장구쳤다.
그 뒤로 사파 무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광개는 고개를 갸웃했다.
마지막에 들었던 화경의 고수라는 말이 뇌리에 남았기 때문이었다.
광개가 낮게 읊조렸다.
“설마…….”
이것이 사실이라면 강호를 발칵 뒤집어 놓을 일이었다.
하지만, 천지신명 앞에서 발설하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었다.
정보로 치자면 황금 한 냥은 족히 넘을 정보를 어떻게 한단 말이냐?
광개의 한숨은 깊어졌다.
하지만, 광개는 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팽한빈과 적룡대협이 동일인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광개는 재빨리 내공을 운용했다.
구걸십팔보를 펼치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한빈을 찾기로 결심한 것이다.
만약 못 찾는다면 최대한 빨리 하남정가로 가 보기로 했다.
이것은 돈에 대한 욕심보다 한 발 더 앞서는 무인으로서의 호기심이었다.
* * *
네 시진 후 한빈은 눈을 빛내며 사냥에 열중하고 있었다.
뭐,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낮에 하던 구결 수집을 지금 하는 중인 것이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용린검법의 기본편 중 속(速)을 획득하셨습니다.]
[……]
[용린검법의 기본편 중 공(功)을 획득하셨습니다.]
[……]
보충 설명에서 나온 그대로였다.
구결이 비어 있을 때에는 지금처럼 구결을 취할 수가 있었다.
물론 기본편 구결이 다 차면 더는 구결을 습득하지 못하는 것은 전과 같았다.
한빈은 이곳을 벗어날 구결을 모두 습득한 상태였다.
땀을 흘린 결과 기본편 중 속(速)은 한계까지 채운 상태였다.
더는 무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한빈은 전광석화와 구걸십팔보를 운용했다.
이제는 하남정가를 향해 가야 할 때였다.
사사삭.
풀 밟는 소리만 남기고 사라지는 한빈의 입가에는 호선이 새겨졌다.
그 웃음은 진심이었다.
과거로 돌아온 후 보게 될 경극 중 가장 기대되는 장면이 나올 차례였으니 말이다.
* * *
같은 시간 하남정가 가주의 처소.
터벅터벅.
묵직한 발소리가 가주의 처소 앞에 울리다 멈췄다.
가장 앞에는 정휘지와 그의 수하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자신의 아비인 가주 정무룡이 잠들어 있는 처소를 바라보던 정휘지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네 명의 무사가 각을 잡고 서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중 여인이 앞으로 나왔다.
물론 여인은 심미호였다.
“저희가 맡을 일이 이곳을 호위하는 일인가요?”
“그렇다. 나는 너희 해남사우를 믿는다.”
해남사우는 심미호가 급조한 신분으로, 소대섭, 조호, 장삼을 포함해서 네 명이었다.
심미호가 포권하며 말했다.
“네, 맡겨만 주세요. 그런데…….”
말끝을 흐리는 심미호의 모습에 정휘지가 눈썹을 꿈틀대며 물었다.
“왜 그러느냐?”
“호위의 대상이 하남정가의 가주라고는 안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싫다는 것이냐?”
“가주님을 호위할 정도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 제가 받은 돈으로는 조금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심미호의 말에 정휘지의 수하가 재빨리 나섰다.
“허허, 정식 무사로 채용되는 것으로 부족하다는 말이더냐?”
“정식 무사도 좋지만, 저희 낭인들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지요. 제 의동생들에게 당장의 보상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얼마를 원하는 것이냐?”
“그야 알아서…….”
심미호는 말끝을 흐리며 정휘지의 안색을 살폈다.
그리 기분 나쁜 눈빛은 아니었다.
정휘지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해남사우가 낭인이라 확신한 것이었다.
정휘지가 이곳을 낭인에게 맡기는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명령에 절대적인 사냥개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하남정가의 무사를 이곳에 세워 놓는다면 절대 안심할 수 없었다.
물론 해남사우라는 사냥개는 사냥이 끝난 후 삶아 먹을 것이었다.
어차피 삶아 먹을 사냥개에게 뭔들 못 해 줄까?
정휘지는 품 안에서 전낭을 꺼내 수하에게 건넸다.
전낭을 받은 수하가 정휘지의 눈치를 살폈다.
진짜 건네도 되겠냐는 눈짓이었다.
정휘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하자 수하의 눈이 커졌다.
정휘지의 계획을 모르는 수하의 입장에서는 너무 많은 금액이었다.
수하가 떨리는 손으로 전낭을 건넸다.
“자, 둘째 공자님께서 내리는 것이니 받게나.”
전낭을 받은 심미호가 확인도 안 하고 품 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잽싸게 각 잡힌 포권을 하며 외쳤다.
“충성!”
그 목소리에 정휘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수고해 주게.”
정휘지는 잠시 해남사우로 위장한 심미호를 훑어보더니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