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사소한 오해 (3)
그 삼광 중에는 산동악가의 악비광도 속한다.
삼광에 속하는 이들에게는 특징이 있다.
싸움을 좋아하는 것에 더해 미치도록 좋아하는 것이 한 가지씩 더 있다는 것이었다.
광개의 경우에는 돈이었다.
그에 대해 어찌 이렇게 소상히 아는가 묻는다면?
전생에 한빈과 광개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어린 얼굴 때문에 처음에는 못 알아봤지만, 그가 이름을 밝히니 그와의 기억이 떠올랐다.
상념에 잠긴 한빈을 본 광개가 말했다.
“뭐 하냐?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할 것 아니야?”
광개의 재촉에 한빈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나는 팽한빈.”
광개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하북팽가?”
한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왜?”
“하북팽가에서 검을 쓴다고? ……그 검으로 나를 꺾고?”
광개의 말뜻을 아는 한빈이 살짝 웃었다.
하북팽가의 핏줄이 검술을 익힌다고 하면 대개 이런 반응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광개가 이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었다.
한빈은 짧게 답했다.
“네가 그런 말 할 처지는 아닐 텐데.”
“흠.”
광개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찔리는 게 있는 것이다.
우스운 것은 거지이지만, 누구보다 돈을 밝히는 거지였다.
그것도 잠시 광개가 쓱 상체를 기울였다.
“하북팽가면 부잣집이네.”
본색은 바로 드러났다.
광개가 눈을 가늘게 뜨자 한빈이 손을 내저었다.
“나중에 말해 줄 테니 술 한 잔 더 줘라.”
한빈이 손을 내밀자 광개가 호리병을 건넸다.
입속에 술 한 모금을 털어 넣었다.
알싸한 느낌이 이십 년의 체증을 씻어 내는 느낌이었다.
한빈과 광개는 말없이 호리병을 주고받았다.
모닥불을 앞에 두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그때 광개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짝.
적막을 깨는 소리에 한빈이 물었다.
“왜 그래?”
“그런데 대체 왜 넌 강 가운데서 헤엄치고 있던 것이냐?”
광개가 화제를 돌리자 한빈은 준비한 이야기를 이었다.
“쫓기다가 강에 빠졌다.”
말을 마친 한빈은 광개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한빈은 주판알을 튕기는 중이었다.
한빈이 계획을 짜는 동안 광개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쫓기는 건가?”
“큰 사고는 아니야…….”
한빈은 말끝을 흐리며 토끼 고기를 마저 베어 물었다.
꼬치를 탁 내려놓자 광개가 눈을 빛냈다.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왜 같이 싸우게?”
“심심하잖아.”
그 말에 한빈은 멍하니 광개를 바라봤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빈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적이 누군지 알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너처럼 돈 많은 사람한테 개겼다는 건 나쁜 놈 아니냐?”
“풋.”
너무도 직설적인 말에 한빈이 술을 뿜었다.
“왜 그래?”
“네 말이 맞다. 나쁜 놈은 맞지.”
“그래, 나쁜 놈들은 족쳐야 해! 심심한데 잘됐네.”
광개의 단언에 한빈이 씩 웃었다.
돈을 좋아하고 싸움은 더 좋아하는 거지.
녀석은 미친 거지가 맞았다.
그때 광개가 물었다.
“그런데, 너 어디 다쳤냐? 혹시 주화입마?”
“궁금해?”
“뭐, 됐다. 싸움만 잘하면 되지 뭐. 대충 보니 일류? 그건 그렇고 네가 쓴 초식은 대체 뭐냐?”
광개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이제는 관심이 초식까지 이어졌다.
아마 처음 보는 무공일 것이었다.
한빈이 아무 표정 없이 말했다.
“막싸움!”
광개는 한 모금 들이켠 술을 토해 냈다.
“푸읍.”
광개가 뿜은 술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한빈이 재빨리 피하며 외쳤다.
“아, 물어봐 놓고 왜 그래?”
“…….”
사레가 들렸는지 광개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을 컥컥대던 광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산자락을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라.”
“왜 그래?”
“멀리서 기척이 느껴진다.”
동시에 광개가 눈을 감고 귀를 움찔거렸다. 그러고는 산자락의 한곳을 가리켰다.
한빈은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들은 사파 무인들일 것이었다.
지금쯤이면 산서삼살이 모든 사실을 토해 냈을 테고 흥분한 사파 무인들이 자신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한빈이 모른 척 물었다.
“저기서 기척이 느껴진다고?”
“산짐승들의 움직임으로 봐서 이쪽으로 오는 것 같아.”
광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빈은 잽싸게 모닥불을 껐다.
광개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보기에는 허당에 강호 초출 같은데 경험은 제법 있는 모양이군.”
그가 눈매를 좁히자 한빈이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본능이다. 그런데 부탁할 게 있다.”
“뭔데? 빨리 말해.”
“혹시라도 사람들과 마주치게 되면 나에 관해서는 얘기하지 마라.”
“알았다. 다녀와서 얘기하지.”
광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마친 광개는 풀 밟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서 사라졌다.
사사삭.
지금 광개가 펼친 무공은 한빈이 비급에 넣어 둔 구걸십팔보(求乞十八步)였다.
본래는 사결제자 이상에게만 전수된다는 무공이었다.
하지만, 광개는 재능을 인정받아 특별히 이십 대에 익힌 경신술일 것이었다.
뭐, 한빈은 홍칠개의 특별 제자이니 개방 방도가 아니라도 배울 수 있었고 말이다.
한빈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빛냈다.
한빈은 광개가 사라진 방향을 조용히 바라봤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산등성이에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척으로 판단하기에는 먼 거리였지만, 역시 광개의 말이 맞았다.
광개의 오감에는 산새들의 움직임과 소리가 잡힌 것 같았다.
산등성이의 불빛은 하나둘 늘어나더니 마치 지네 다리처럼 구불거리며 꼬리를 보였다.
역시 자신의 예상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저들에게 잡힌다면?
그럴 수는 없었다.
맞닥뜨려도 그것은 열두 시진이 지난 후 혹은 기본편의 구결을 회복한 다음이어야 했다.
상대의 패를 봤으니 이제부터는 수 싸움을 해야 했다.
역시 인생은 도박의 연속이라는 성현의 말씀이 맞다는 것을 한빈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영단산에서의 결전은 한빈에게 쾌감을 주었다.
연속된 짜릿한 느낌에 한빈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사사삭.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풀잎 밟는 소리만 내며 한빈 앞에 가볍게 멈춘 광개가 다급히 말했다.
“대체 너…….”
광개가 머뭇거리자 한빈이 물었다.
“왜 그래?”
“너 대체 사파와 무슨 일을 벌인 거야?”
다급한 광개의 표정에 한빈은 손을 내저었다.
“별일 아니야.”
“그런데 백 명이 넘는 사파 무사들이 저렇게 헉헉대면서 쫓는다고?”
“무림 공적이나 뭐 그런 거 아니니 걱정하지 마.”
한빈의 말에 광개가 웃었다.
“하하,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확실히 미친놈이 맞네. 화끈하게 사고 쳤구나. 원래 일을 저지르려면 최대한 크게…….”
광개는 흥분한 듯 침까지 튀겼다.
그 모습에 한빈이 재빨리 말렸다.
“쉿! 그만.”
“알았어.”
“그리고 너! 약속 하나만 하자.”
“뭔데?”
광개가 호기심에 눈을 빛내자 한빈이 속삭이듯 말했다.
“일단 절대 발설 안 하겠다는 약속부터 하고.”
“약속할게.”
말을 마친 광개가 입을 오므리며 침을 모으는 듯한 시늉을 했다.
한빈은 재빨리 광개의 입을 막았다.
“개방식으로 말고.”
광개는 재빨리 침을 삼키고 답했다.
“알았다.”
여기서 말한 개방식 약속은 서로의 이마에 침을 뱉는 것이었다.
서로의 말을 머릿속 깊이 새긴다는 의미였다.
전생에서는 그 약속 의식 때문에 광개의 목에 검 끝을 겨눴던 기억이 있었다.
광개는 아직도 아쉬운 표정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나 한빈은 광개와 함께.”
“나 광개는 한빈과 함께.”
광개도 받아쳤다.
그리고 둘이 동시에 다음 말을 이었다.
“세상 끝까지 비밀을 지킬 것을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말을 마친 한빈이 씩 웃었다.
“그래, 지금부터 하는 얘기는 동업자로서 하는 얘기니 잘 들어.”
“동업자라고?”
광개의 눈이 커졌다.
한빈이 씩 웃었다.
동업자라는 단어는 금전이 오간다는 것을 뜻했다.
한빈이 말을 이었다.
“끝까지 듣고 질문해. 그러니까…….”
한빈은 영단산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물론 독이니 구결이니 하는 숨어 있는 이야기들은 밝히지 않았다.
다 듣고 난 광개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까, 네가 마교의 잔혈마도와 한판 벌였다는 거야?”
“그래.”
“그리고 그 잔혈마도는 화경의 고수였다.”
“뭐, 대충.”
“더해서 사파 전체를 엿 먹였고 말이지?”
“그것도 대충 맞지.”
“하하하!”
광개는 주변이 떠나갈 듯이 웃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지금 한빈의 말을 다른 이가 들었다 해도 믿을 수는 없었다.
천지신명께 맹세한 사이라고는 하지만, 광개도 한빈을 말을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모두가 하북팽가의 대표로 청명환을 운송하며 생긴 일이라는 거지? ·····게다가 마교라?”
“음, 뭐. 중요한 건 사파 무사들에게 내가 죽었다고 전하는 거야.”
“그건 내 전문이지. 그런데 보수는…….”
광개가 말끝을 흐리자 한빈이 품에서 한철 궤를 꺼냈다.
한철 궤를 본 광개가 눈을 살짝 떨었다.
“헉, 네 말이 사실이었어?”
“이건 이번 표행의 책임자가 나라는 증거. 소문의 대가로 은전 열 냥. 어때?”
“어쩐지 처음 볼 때부터 인상이 남다르다 했더니…….”
광개가 한빈을 다시 살펴봤다.
그 모습에 한빈은 헛웃음을 지었다. 노 가지고 장난하던 게 다섯 시진 전이었다.
그런데 저런 거짓말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하다니.
하지만, 녀석은 믿을 만했다.
돈이라면 죽는 척이라도 할 놈이었고, 친구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놈이었다.
물론 현생에는 친구가 아닌 동업자로 만족하는 것이 좋았다.
“그럼 사파 놈들 앞에서 하북팽가의 사 공자가 죽었다고 선포하면 되는 거네.”
“사 공자라고 하지 말고 적룡대협이라고 해.”
“적룡대협이라? 지금의 네 모습치고는 너무 거창한데.”
“마음대로 생각하고. 맡겨도 되는 건가?”
“그럼, 당연하지. 내가 하남의 거지들을 다 동원해서라도 철저히 소문낼 테니 걱정하지 말고.”
“그럴 짬밥은 되고?”
한빈이 피식 웃었다.
광개가 하남 분타주이긴 해도 비슷한 지위에서는 나이에서 밀릴 게 뻔했다.
“뭐, 나는 하루에 다섯 끼를 먹으니 짬밥에서는 그다지…….”
광개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려 하자 한빈이 바로 끊었다.
“됐어.”
“그럼 넌 어떻게 빠져나가려고?”
“조용히 지켜보다가 덤비면 그냥 멱을 따 버려야지.”
한빈이 계획을 늘어놓자 광개가 헤실헤실 웃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너 사파 아니냐?”
“사파? 내가 어딜 봐서 사파냐?”
“생각하는 게 정파 같지는 않아서. 거기에 아까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마교 같기도 하고…….”
광개의 말에 한빈은 헛기침했다.
싸우면 싸울수록 닮는다고 하지 않던가.
마교와 그렇게 싸웠으니 닮을 수도 있다 생각했다.
상념을 털어 낸 한빈이 광개의 어깨를 톡톡 쳤다.
“일단 자리부터 피하자.”
“그래, 알았다.”
한 시진 정도 움직이며 둘은 쉴 틈 없이 말을 이었다.
그러던 중 갈림길이 나왔다.
길을 힐끔 바라보던 한빈이 말했다.
“잘됐다. 여기 갈림길이 있다.”
양쪽 길을 가리키자 광개가 눈매를 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