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사소한 오해 (1)
평상시에 운용해도 반년 이상은 누워 있어야 한다고 전해지는 부작용이 있는 것이 마교의 역혈신공이었다.
그런데 지금 중독된 상태에서 운용한다면?
아마 일각도 안 되어 죽을 것이 분명했다.
잔혈마도가 죽는 것은 한빈과 관계없었지만, 문제는 그가 죽으면 구결도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역혈신공으로 강해진 그에게 달려든다라?
이제 한빈이 선택해야 할 때였다.
한빈의 선택은?
선획득 후수습이었다.
한빈은 재빨리 잔혈마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성동격서의 초식을 운용했다.
확률은 이 할.
이 할의 도박이 적중한다면 한빈의 승리였다.
파고드는 한빈의 검을 파혈도의 홈이 낚아채려 덤볐다.
그때였다. 한빈의 검이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
한빈의 검이 다시 나타난 곳은 잔혈마도의 왼쪽 가슴 한 치 앞이었다.
푹!
한빈의 검이 잔혈마도의 왼쪽 가슴에 박혔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사파 무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적룡대협이 이겼다!”
“사파가 마교를 이겼어!”
“적룡대협 만세!”
하지만, 잔혈마도는 파혈도를 놓지 않았다.
역혈신공이 만들어 낸 공력 때문일까?
생기를 잃지 않은 잔혈마도는 그의 파혈도를 한빈의 옆구리에 찔러 넣었다.
사파 무인들의 함성이 비명으로 바뀌었다.
사파 무인 중 여자 무사가 소리 질렀다.
“앗! 어떻게 해?”
“빨리 가서 적룡대협을 구해요!”
다른 여자 무사가 외쳤다.
그들이 달려가고 있을 때 한빈의 눈앞에는 구결이 떠오르고 있었다.
[용안(龍眼)으로 초식을 확인합니다.]
[인급(人級) 구결 살(殺)을 획득하셨습니다.]
[인급(人級) - 살(殺)]
구결을 확인한 한빈이 자신의 옆구리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파혈도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한빈이 말했다.
“빼!”
잔혈마도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네가 먼저 빼!”
둘은 그렇게 서로의 가슴과 옆구리에 애병을 박아 넣은 채 기 싸움을 펼쳤다.
한빈은 지금 상황이 진퇴양난임을 깨달았다.
저 멀리서 자신의 싸움을 지켜보는 사파 무인들의 기척은 깨달은 지 오래였다.
지금은 적룡대협이니 사파의 구세주니 하며 추켜세우지만,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게 밝혀지는 순간 그들은 돌아설 것이 분명했다.
그 뒤에 산서삼살까지 있으니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문제는 지금의 상처였다.
지금의 상처를 치료하자면 기사회생을 써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공력이 부족했다.
그때 한빈의 눈에 잔혈마도가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가 보였다.
얼핏 보면 보통 목걸이 같아도 저것은 영단을 넣고 있는 목걸이가 분명했다.
마교의 영단이라?
사실 찝찝할 것도 없었다.
용린도 마교에서 탈취한 것이니 말이다.
한빈은 검을 움켜잡은 그대로 왼손을 뻗어 그의 목걸이를 낚아챘다.
잔혈마도는 놀란 듯 발버둥 쳤지만, 한빈의 동작이 더 빨랐다.
이제는 역혈신공의 효과도 줄어드는지 점점 약해지고 있는 잔혈마도였다.
그때 사파 무인들도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여자 무사가 안타까움에 비명을 질렀다.
“적룡대협께서 우리를 위해서 동귀어진을……!”
여자 무사는 말을 맺지 못했다.
한빈과 잔혈마도가 서로의 몸에 병기를 꽂은 채 낭떠러지에서 미끄러진 것이었다.
* * *
한빈은 허공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한빈은 먼저 잔혈마도에게 빼앗은 목걸이를 삼켰다.
쌉싸름한 향기가 목울대를 타고 넘어갔다.
그것은 분명히 천산에서 나는 백년설삼을 말려 만든 영약이 분명했다.
‘마교의 영약으로 목숨을 건질 줄이야.’
슝!
그 순간에도 한빈과 잔혈마도는 강물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이제 감각도 의식도 희미해졌다.
앞을 바라보니 잔혈마도도 눈을 감고 있다.
의식을 잃은 것이다.
한빈은 그와 허공에서 회전하며 떨어지고 있었다.
주변의 경치가 휙 지나가고 있다.
한빈은 재빨리 두 발을 잔혈마도의 가슴에 밀착했다.
그리고 젖 먹던 힘을 다해 다리를 뻗었다.
슥!
잔혈마도에게 박혀 있던 월아가 뽑혀 나왔다.
잔혈마도가 박아 넣은 파혈도도 살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뽑혀 나왔다.
뿌득!
한빈은 자신에게 남은 내공을 확인했다.
아직 바닥까지 한참 남았는데에도 오 년이란 내공이 영단으로 더해졌다.
운공도 안 했는데 오 년의 내공이 들어왔다?
어찌 보면 아쉬운 일이었다.
복용 후 운공만 제대로 했다면 그 이상의 효과를 얻었을 것 같았다.
이제 남은 내공은 다시 십팔 년.
한빈은 재빨리 용린검법의 인급 초식 중 ‘기사회생’을 떠올렸다.
동시에 흐려졌던 의식이 점점 돌아왔다.
아마 감각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한빈은 용린검법의 신비함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이 용린검법의 끝은 검의 끝 혹은 무학의 끝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었다.
용린검법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은 생존이 먼저였다.
한빈은 재빨리 바닥을 바라봤다.
푸른 강물이 점점 눈앞에 가까워졌다.
첨벙!
물속에 들어간 한빈이 잠시 뒤 수면으로 나왔다.
한빈은 주변을 둘러봤다.
한쪽은 절벽.
한쪽은 강가까지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체력이라도 남아 있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무리였다.
한마디로 진퇴양난.
잔혈마도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지만, 이제 곧 물고기 밥이 될 신세였다.
남은 내공은 삼 년이지만, 그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사회생이 죽을 고비에서 꺼내 준 것은 맞다. 하지만, 그 효용은 십 할이 아닌 구 할.
아직도 상처는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한빈은 쉴 새 없이 발길질하며 물 위에 떠 앞을 바라봤다.
그때 멀리 나룻배 하나가 보였다.
이제 모험을 걸어야 했다.
한빈은 온 힘을 다해 나룻배를 향해 헤엄쳤다.
나룻배에 거의 다가갔을 때였다.
나룻배 위에서 누군가 외쳤다.
“거기서 대체 뭐 하냐?”
고개를 들어 보니 죽립을 쓴 사내가 노를 젓고 있다.
뱃사공이 분명했다.
한빈은 물살과 싸우며 나룻배로 다가갔다.
이제 뱃사공이 젓는 노가 코앞이었다.
한빈은 노를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휙, 휙.
‘뭐지?’
한빈이 눈매를 좁혔다.
노가 갈지자로 움직이며 한빈의 손아귀를 피해 갔다.
한빈은 이마에 팔자 주름을 새기며 외쳤다.
“사공! 지금 뭐 하는 거요?”
뱃사공이 죽립을 벗었다.
뱃사공은 산발이 된 채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는 다시 노를 움직였다.
자세히 보니 허리에 표주박과 매듭을 달고 있었다.
저게 가짜가 아니라면 개방 방도라는 이야기였다.
뱃사공이 놀리듯 말했다.
“얼마 줄 건데? 배에 오르려면 뱃삯부터 줘야지.”
이건 한마디로 미친 거지였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데 돈부터 달라고?’
한빈은 속으로 혀를 찼다.
미친 거지는 그렇게 한빈을 놀리면서 계속 노를 저었다.
이건 한번 해 보자는 얘기였다.
한빈은 살아야겠다는 생각보다 괜히 오기가 났다.
동시에 본능대로 움직였다.
노를 잡으려 허우적거리지 않고 그 움직임에 주시했다.
어쩐지 눈에 익은 선이었다.
가만히 보니 그것은 봉법의 투로.
“타구봉법?”
한빈의 외침에 미친 거지가 노를 멈칫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한빈은 노를 잡았다.
미친 거지가 깜짝 놀라 노를 놨다.
노가 쑥 내려왔다.
한빈은 그 틈을 타서 더욱 노의 위쪽에 매달렸다.
노가 더 내려왔다.
급하게 노의 끝을 잡은 미친 거지가 소리쳤다.
“이 썩을 놈아! 노를 놔야 건져 주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냐?”
그 외침에 한빈이 씩 웃었다.
이미 한빈의 몸은 물 밖으로 반쯤 나와 있었다.
한빈은 매미처럼 노에 달라붙은 채 외쳤다.
“먼저 노값부터 줘!”
타구봉법을 쓰는 미친 거지가 한빈을 뿌리치지 못할 리 없겠지만, 그 정도 힘을 쓰게 되면 노도 부러지기 마련이었다.
노를 온전히 회수하려면 한빈을 먼저 떼 놓아야 했다.
한빈의 말에 놀란 미친 거지는 화들짝 놀라 외쳤다.
“이 썩을 놈이 뭐래?”
“귀가 먹었나? 노 가지고 싶으면 돈 내놔!”
한빈이 계속 맞받아치자 미친 거지가 노를 마구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이런 미친놈이…….”
한빈은 이를 악물었다.
잔혈마도에게 입은 상처 중 구 할은 회복되었지만, 아직 내공을 쓸 처지는 아니었다.
그때 저 멀리서 시원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쏴아악!
속이 뻥 뚫리는 듯한 시원한 소리에 미친 거지가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에 한빈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봐! 폭포 처음 봐?”
배는 폭포 쪽으로 빠르게 떠내려가고 있었다.
거지가 한빈과 폭포를 번갈아 봤다.
배는 여전히 폭포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
다급해진 미친 거지가 외쳤다.
“이 썩을 놈아! 빨리 올라오라고!”
“노값부터 줘. 안 그러면 못 내줘.”
한빈이 다시 외치자 미친 거지가 살벌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이 썩을 놈이!”
그것도 잠시 폭포가 만들어 낸 수평선과 한빈을 번갈아 보던 미친 거지의 동공에는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고는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이 죽일 놈아, 노값 줄 테니 어서 올라오지 못해?”
한빈은 눈매를 좁혔다.
“약속하는 거지?”
한빈은 다시 한번 약속을 확인했다.
미친 거지가 손을 내밀었다.
“뭐든지 줄 테니 올라오라고 이 썩을 놈!”
한빈은 그제야 노를 놓고 배에 올랐다.
힐끔 바닥을 보니 매듭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아마도 한빈과 실랑이를 하다가 노에 걸려 떨어진 것 같았다.
한빈은 그 매듭을 품속에 넣었다.
미친 거지가 죽을 듯 살 듯 노를 저었다.
노가 제법 큰 포말을 일으켰다. 타구봉법을 극성까지 펼친 듯 보였다.
한빈은 배 위에서 큰 대자로 뻗었다.
폭포에서 어느 정도 멀어지자 거지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대체 정체가 무엇이냐?”
“물에 빠진 사람!”
“휴.”
“보따리 내놓으라는 얘기는 안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한빈이 씩 웃자 거지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헛소리 말고 정체가 뭐냐니까? 이 쥐방울만 한 놈아!”
“쥐방울?”
한빈이 기분 나쁜 듯 바라보자 미친 거지가 다시 받아쳤다.
“그럼 네가 쥐방울 아니고 뭐냐?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쳐서!”
“뭐, 젊게 봐 주니 고맙고.”
한빈이 일어나 각 잡힌 포권을 했다.
순간 배가 출렁하고 흔들렸다.
미친 거지가 다시 소리쳤다.
“이 썩을 놈아! 자리에 앉아! 왜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그의 외침에 한빈은 자리에 앉았다.
“어, 미안! 내가 좀 흥분했지?”
“이 썩을 놈이 이제 좀 정신 차리네.”
거지가 다시 혀를 차자 한빈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노값으로 밥이나 줘. 고기반찬이면 더 좋고.”
이것은 한빈의 진심이었다.
한빈은 미치도록 배가 고팠다.
이것은 구결에 대한 갈망이 아니고 진짜 배가 고픈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한빈은 거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신분이 밝혀진다면 사파가 따라올 것이 분명할 터.
제법 고수로 보이는 이 거지가 도와준다면 이 위기를 넘기는 것도 쉬울 것이었다.
물론 하루만 도움을 받으면 된다.
그 뒤로는 기본편의 구결이 모두 회복될 테니 말이다.
싱긋 웃는 한빈을 본 거지가 불만 섞인 목소리를 토해 냈다.
“이 빌어먹을 놈이, 배를 뒤집으려 해 놓고 나한테 밥까지 얻어먹으려고 해?”
하지만 한빈은 여유 있게 답했다.
“당연히 먹을 건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