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허장성세 (4)
한빈이 자신의 아래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잔혈마도는 방심이라는 두 글자를 버렸다.
한빈은 매서워진 잔혈마도의 칼끝에 더욱 긴장했다.
동시에 쓸 수 있는 용린검법의 초식은 아직 두 개였다.
전광석화와 쾌검난마 중 하나만 빼도 바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한빈은 본신의 내공까지 운용해 속도를 높여 나갔다.
쓱!
다시 잔혈마도의 파혈도가 한빈의 상체를 훑고 지나갔다.
휘릭!
잔혈마도의 공격에 한빈이 입고 있던 무복이 누더기가 되었다.
점점 회색 무복이 떨어져 나가고 안에 입었던 붉은 색 무복이 드러났다.
잔혈마도의 공격에 겉에 입었던 회색 무복이 가루가 되어 버리자 한빈의 본래 무복인 적색 무복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회색 무복이 잔혈마도의 공격에 날아가고 적색 무복만이 남아 있는 상태.
한빈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사파 무인들의 눈에는 그 모습이 경건해 보였다.
붉은 무복 위로 살짝 흘러내린 피는 마치 몸을 감싼 호신강기처럼 보였다.
누군가 말했다.
“저 대협도 화경이다! 우린 살았어!”
“와아!”
울려 퍼지는 함성.
누군가가 다시 칼을 잡았다.
“우리도 대협을 돕자!”
그가 막 잔혈마도를 향해 달려들려고 할 때 뒤쪽에서 다른 무사가 그를 잡았다.
탁!
뜻밖의 상황에 무사가 뒤를 돌아봤다.
“왜 그래?”
“우리가 나서면 대협에게 방해가 될 것이야.”
“그게 무슨…….”
“생각해 봐, 화경의 고수 간의 대결이야. 우리가 도움이 될까? 아마도 저 대협은 오히려 우리를 상처 입힐까 봐 자신의 검을 쓰지 못할지도 몰라.”
납득이 되는 말이었기에 튀어 나가려던 무사는 힘없이 검을 늘어뜨렸다.
하지만, 고개만은 숙이지 않았다.
마교의 고수인 잔혈마도와 팽팽하게 맞서는 한빈의 모습을 놓치기 싫은 것이었다.
이제는 잔혈마도에게 죽는다는 두려움 따위는 벗어 버렸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한빈의 검을 바라볼 뿐이었다.
무사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아름답구나!”
그것은 진심이었다.
확실히 보이지는 않지만, 두 고수 간의 대결은 넋이 나갈 만큼 아름다웠다.
동시에 가슴에서 뭔가가 치솟았다.
그것은 강함에 대한 열망이었다.
물론 산서삼살도 마찬가지였다.
도망치려면 지금이 기회였다. 하지만, 그들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한빈과 잔혈마도의 대결을 바라봤다.
빙혈서생이 나지막이 말했다.
“조문도 석사가(朝聞道 夕死可)라는 말이 떠오르는군요.”
“나도 마찬가지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이 이렇게 마음에 와닿을 줄은 몰랐군.”
산서삼살도 진심 어린 눈빛으로 한빈을 바라봤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는 신분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존경심이 들었다.
거기에 더해 자신에게 보여 줬던 무위가 빙산의 일각이라 생각하니 알 수 없는 경외감이 가슴에서 솟구쳐 오르는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빈은 산서삼살을 봐준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대화는 한빈의 귀에도 똑같이 들렸다.
한빈이 속으로 미칠 것 같았다.
모두가 달려드는 아수라장이 펼쳐진다면, 그나마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자신을 화경의 고수라 생각하고 대결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었다.
다들 같이 덤벼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한빈에게 그럴 여유가 없었다.
슉!
지금도 날아드는 잔혈마도의 파혈도를 막기 버거웠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쾌검난마의 효용 덕분에 한빈의 검이 호신강기를 뚫고 잔혈마도의 몸에 상처를 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호신강기를 뚫는 검이라?
누가 봐도 같은 경지로 볼 터였다.
슉!
한빈이 오른쪽으로 돌며 잔혈마도의 파혈도(破血刀)를 피했다.
하지만, 그의 파혈도에 머리카락이 우수수 떨어져 나왔다.
위기일발!
그것이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였다.
한빈은 이제 모험을 걸기로 했다.
새로 얻은 초식을 사용해 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허장성세!
한빈이 초식을 떠올리자 바로 전광석화가 사라지고 대신 허장성세가 자리 잡았다.
순간 한빈이 외쳤다.
“갈!”
그 목소리에 모두가 움직임을 멈췄다.
산서삼살을 포함한 모두가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잔혈마도도 마찬가지였다.
잠깐의 순간이었지만, 한빈의 일갈은 잔혈마도의 몸을 옥죄어 왔다.
잔혈마도의 현재 경지는 화경 중 일 경.
지금 한빈의 외침은 화경 중 삼 경 이상의 공력을 담고 있었다.
그 차이는 일류와 초절정의 차이만큼이나 컸다.
잔혈마도는 움찔하며 지금 자리를 피해야 하나 아니면 상황을 더 지켜봐야 하나 망설였다.
물론 이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옥죄어 오던 한빈의 기세가 씻은 듯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서걱!
동시에 옆구리가 뜨끔했다.
잔혈마도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옆구리를 살폈다.
호신강기 덕분에 상처는 깊지 않지만, 분명 당한 것이다.
지금의 이상한 기세는 자신의 착각이라 생각했다.
그 착각 때문에 두 번이나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분노의 감정을 느끼는 것도 잠시, 잔혈마도 임길태는 혈맥을 찍어 피의 흐름을 막았다.
픽!
내공으로 막기에는 낭비라 생각한 것이다.
잔혈마도가 매서운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잔혈마도를 썰고 지나간 한빈이 거리를 벌리고 허공을 보고 있었다.
상대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허공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히 자신을 기만하는 것이라 잔혈마도는 생각했다.
감정을 추스른 잔혈마도 임길태가 말했다.
“자기는 죽이기에는 아깝네. 사로잡아서 죽는 날까지 갖고 놀아야겠어.”
“…….”
하지만, 한빈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인급 초식 하나가 완성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흩어진 용린검법의 구결 중 하나의 초식을 완성했습니다. 초식이 활성화됩니다.]
[인급(人級) 초식 자승자박(自繩自縛)을 획득하셨습니다.]
[자승자박(自繩自縛) - 용린겁법의 초식 중 이화접목의 수법에 해당합니다. 상대의 힘으로 상대를 누르는 수법이야말로 고수의 길로 접어드는 초입의 초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승자박을 시전하면 상대는 자신이 펼친 공력의 오 할을 돌려받게 됩니다. 단, 상대가 시전자의 경지보다 높을 때에는 이 할을 돌려받습니다. 지속 시간 한 시진. 필요 공력 오 년.]
한빈은 진한 미소를 피워 내며 슬금슬금 뒷걸음쳤다.
하지만, 잔혈마도는 파혈도를 세우며 미간을 좁혔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빈은 속으로 구걸십팔보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더는 대결을 지속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었다.
잔혈마도에게 더는 구결이 보이지 않았다.
전생에 마교와 싸웠다고 현생에서 싸우란 법은 없으니.
정마 대전이 일어나는 것은 십 년도 훨씬 지나서였다.
사실 잔혈마도가 중원에 온 것도 이해가 안 가는 상황이었다.
지금 마교는 봉문을 선언한 상태.
정, 사, 마가 모두 칼을 숨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교의 이십대 고수 중 하나인 잔혈마도가 나타나 청명환을 노린다고?
한빈도 이 상황이 정리되지 않았다.
어찌 됐든 한빈이 원하는 것은 것 구결 수집 하나였다.
현 상황에서 마교와 척을 져 봐야 원수를 하나 더 늘리는 일이었다.
여기서 자신의 신분이 밝혀진다면?
마교의 주적이 하북팽가가 될 수도 있을 일.
정마 대전을 앞당길 일도.
그 전쟁의 선두에 설 일도 만들어서는 안 되었다.
한빈은 재빨리 자리에서 사라졌다.
사사삭.
풀 밟는 소리와 함께 한빈이 사라지자 잔혈마도가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넋을 놓고 있는 사파의 무리였다.
멍하니 있던 그들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대협이 도망간 거야?”
“지금 한 수를 보여 줬잖아. 왜 잔혈마도의 숨통을 끊지 않고 간 거지?”
사파의 무리는 웅성대기 시작했다.
한빈이 자리에서 사라지자 죽어도 좋다는 결심도 봄날 눈 녹듯 사라졌다.
그때였다.
두리번거리던 잔혈마도도 소리 없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대협은 도망친 게 아니오!”
“그럼 왜 없어졌는데?”
“우리를 위해 자리를 피한 것이오. 절세신공이라는 것이 아무 곳에서나 쓰면 주변까지 휘말려 들게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소? 대협은 우리를 위해 잔혈마도를 유인한 것이오.”
그의 말에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멈췄다.
그러고는 서로를 바라봤다.
복면을 쓴 채 서로를 바라보던 사파 무사들.
그중 하나가 복면을 벗었다.
그 모습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외쳤다.
“나는 청명환 같은 건 필요 없소. 대협이 펼치는 절세신공에 말려들더라도 마지막 대결을 보겠소. 이 복면을 벗어 던지고 자랑스러운 사파의 일원으로 말이오.”
무사는 손에 든 복면을 팽개쳤다.
그게 시작이었다.
모든 사파 무사들이 복면을 벗어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곳에는 여인도 있었다.
여자 무사들의 눈빛에는 조금 더 깊은 선망의 뜻이 담겨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산서삼살을 바라봤다.
“빙혈서생!”
“왜 그러시오?”
빙혈서생이 답하자 사내가 물었다.
“아까 보니 대협의 신분에 대해 아는 것 같던데, 대체 저분은 누구십니까?”
“흠.”
빙혈서생은 관자놀이를 툭툭 쳤다.
하북팽가의 사 공자라고 하면 저들은 자신의 말을 믿을까?
그리고 정체를 밝혔을 때 산서삼살에게 돌아올 후환은 없을까?
여러 고민 속에 빙혈서생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 잔혈마도와 한빈이 사라진 방향을 보던 여자 무사가 말했다.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저는 저분을 적룡대협이라 부르겠어요.”
“적룡대협?”
“맞아요.”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여자 무사가 맞장구쳤다.
“적룡대협이라, 어울리네요. 적룡대협이라면 삼백 년 전 사파를 구원하신 분 아닌가요?”
“저 대협이야말로 그분의 이름을 물려받을 자격이 있어요. 붉은 피를 호신강기 삼아 두르는 저분이야말로 사파의 구세주인, 이번 세대의 적룡대협이에요. 저는 그분께 충성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고는 병장기로 바닥을 찍기 시작했다.
쿵, 쿵.
그에 맞춰 너 나 할 것 없이 외쳤다.
“적룡대협 만세!”
“만세!”
만세는 황제에게나 붙이는 구호였지만, 사파 무사들에게는 상관없었다.
한껏 감상에 젖었던 사파 여인 중 하나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와 안면이 있는 무사가 물었다.
“무슨 일이오?”
“가요. 내가 추적술에는 자신이 있어요. 잔혈마도와 적룡대협의 흔적을 찾아 그들의 대결을 봐요. 나는 죽어도 좋아요. 그 대결을 꼭 볼 거예요.”
“옳소!”
다른 무사도 맞장구쳤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사파 무사들은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청명환이라는 보물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산서삼살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듯 멍하니 사라진 무사들의 모습을 바라봤다.
편육랑아가 외쳤다.
“그 악마를 적룡대협이라 부른다는 것입니까?”
“쉿!”
빙혈서생이 검지를 들어 편육랑아의 입술에 갖다 댔다.
그 모습에 흑의살풍이 말했다.
“우리는 모른 척하는 것이 좋겠다.”
“네, 맞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서 빠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